•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1장 기생의 삶과 생활
  • 6. 변화는 새로운 변화를 낳고
우인수

근대기에 조선조의 기생은 기능에 따라 크게 두 가지의 유형으로 분리되어 변모하여 갔다. 하나는 기생이 가졌던 예인으로서의 기능을 온전하게 이어받아 악기 연주와 노래와 춤의 공연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예술인으로의 변모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기생이 가졌던 성적 접대를 포함한 접대의 기능을 이어받아 접대와 매춘에 주로 종사하는 모습으로의 변화이다.

1908년 관기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기생들은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기생들이 관청 소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유사한 영업에 종사하던 이들과의 명확한 구별점 하나가 사라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예술 기예를 소지하였는지 여부로만 기생인지 아니지를 구별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느슨한 구별점은 그 경계를 점차 모호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인 구분도 한시적이어서 기존의 관기에 속하였던 이들은 늙어서 사라져 갔고, 새롭게 충원되는 이들은 이미 이전의 기생과는 출발점부터 성격이 다른 존재였다. 기생들이 관청의 소속에서 벗어나게 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기생 사회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관기가 전통적으로 행하였던 의무에서 해방됨으로써 개인의 선 택에 따라 기예와 매음을 모두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기예만을 중점적으로 하는 층과 거기에 매음까지도 적절히 겸하는 층으로 나누어졌다. 기생과 주변의 유사 부류에 대한 용어 규정과 개념 정립에도 여러 가지 혼란과 혼선이 초래되어 새로운 규정이 마련되어야 했다. 예컨대 조선조에서는 기생과 창기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이 시기에 오면 기생과 창기는 구별되어 인식된 듯하다. 기생은 가무 등 기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인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창기는 매춘의 의미가 한층 강한 매음녀를 지칭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창기라고 하더라도 전혀 가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그중에는 가무나 잡가를 하는 부류도 나타나게 되고, 기생 중에도 대중을 의식한 상업적인 잡가를 하거나 매음을 하는 층도 있게 됨으로써 점차 구별이 모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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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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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1908년 기생에 대한 관리가 궁내부(宮內府) 장악과(掌樂課)에서 통감부(統監府) 경시청(警視廳)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여악의 전통이 사라지고, 관기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였다.108)권도희, 「20세기 기생의 음악 사회사적 연구」, 『한국 음악 연구』 29, 한국 국악 학회, 2001, 322쪽. 같은 해 경시청은 기생에 대한 단속령과 창기에 대한 단속령을 동시에 내렸다. 이 단속령에 따르면 기생이나 창기 영업을 하려는 자는 경시청의 인가를 받아야 하며, 조합을 결성하고 규약을 정하여 역시 경시청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를 어기고 영업을 하는 기생이나 창기는 구류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기생업과 매춘업은 경시청의 관할하에서 여러 가지 통제와 규제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109)송연옥, 「대한제국기의 ‘기생 단속령’‘창기 단속령’」, 『한국사론』 40,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98.

셋째, 기생을 결속시키는 새로운 조직이 조합이라는 형태로 결성되었다. 이는 통감부 경시청의 기생 단속령 및 창기 단속령에 의해 예견된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가장 먼저 결정된 기생 조합은 1908년의 한도 유녀 조합(漢都遊女組合)이었다. 원래 경시청에 조합 설립을 청원할 때는 한도 예창기 조합(漢都藝娼妓組合)으로 청원하였으나 일본 관리가 예창기를 유녀로 수정 함으로써 한도 유녀 조합으로 되었다. 이 조합은 이듬해에 한성 창기 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신문에서는 한성 창기 조합이라는 명칭 대신에 한성 기생 조합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110)송방송, 「한성 기생 조합소의 예술 사회사적 조명」, 『한국학보』 113, 일지사, 2003, 15∼16쪽.

1912년경에 한성 기생 조합소는 광교(廣橋) 기생 조합으로 바뀌면서 유부기(有夫妓) 조합으로 불렸다. 비슷한 시기 모 백작이 평양의 기생을 중심으로 다동(茶洞) 기생 조합을 결성하면서 이는 무부기(無夫妓) 조합이라 불렸다.111)이능화, 이재곤 옮김, 앞의 책, 439쪽. 1914년에는 모 자작이 삼패(三牌) 출신의 유녀들을 모아 신창(新彰) 조합을 만들고 기생이라 자칭하면서 구별이 모호해졌다.112)이능화, 이재곤 옮김, 앞의 책, 439∼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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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권번 기생 양성소
기성 권번 기생 양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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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15년 이후 일제가 조합이라는 명칭 대신 권번(券番)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때 명칭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운영 방식도 일본의 방식을 따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광교 조합은 한성 권번으로, 다동 조합은 대정(大正) 권번으로, 신창 조합은 경화(京和) 권번으로 각각 개명한 가운데, 1918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 한남 권번이 설립되었다. 1923년에는 경화 권번이 조선 권번으로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1924년경에는 한성·한남·대정·조선 권번이 4대 권번으로 번성하였다. 대정 권번에서 일부가 분리되어 창립된 대동 권번은 1920년대 말부터 급성장하여 1932년경에는 한성, 한남, 조선과 더불어 4대 권번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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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학교의 수업
기생 학교의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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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이후로는 새로 창설된 종로 권번이 번성하는 가운데 한성과 조선 권번이 3대 권번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세 개의 권번 역시 1940년대에는 종로 권번을 중심으로 삼화(三和) 권번으로 통합되었다. 한편, 지방 도시에도 권번이 결성되어 기생 영업과 기생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대구, 김천, 동래, 진주, 창원, 광주, 평양, 진남포, 수원, 개성, 인천, 안성, 연기 등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넷째, 기생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장악원이나 교방에서 권번이나 기생 학교로 바뀌었다. 특히 평양의 기생 학교가 유명하였는데, 원래의 정식 명칭은 평양 기성 권번 기생 양성소였다.113)평양 기생 학교와 관련한 내용은 신현규, 『파란만장한 일제 강점기 기생 인물 생활사, 꽃을 잡고』, 경덕 출판사, 2005, 83∼86쪽에 의거하였다. 3년제로 매년 60명이 입학하여 전교생이 약 200명 정도였다. 졸업한 후에는 평양, 서울, 대구, 의주 등지로 흩어져 가서 평양 기생 학교의 명성을 드날렸다. 평양 기생 학교는 소장 한 명을 위시하여 학과 교사, 가무 교사, 잡가 교사, 음악 교사, 서화 교사, 일본창 교사가 각 한 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학비는 1학년은 매월 2원, 2학년은 매월 2원 50전, 3학년은 매월 3원이었다. 1930년경 쌀 한 가마의 가격이 1원 50전이었으니 학비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1939년 당시 평양 기생 학교 3학년 수업 시간표를 보면 그들이 배운 내 용과 시간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내용은 표 ‘평양 기생 학교 3학년 수업 시간표’와 같다.

<표> 평양 기생 학교 3학년 수업 시간표
요일
교시
1교시 국어 국어 작문 회화 사해 사해
2교시 서화 서화 서화 서화 서화 서화
3교시 가곡 가곡 가곡 가곡 가곡 가곡
4교시 내지패 내지패 내지패 내지패 내지패 회화
5교시 잡가 작법 잡가 작법 잡가  
6교시 가복습 음악 가복습 성악 가복습  

일주일 총 34시간에 서화와 가곡이 가장 많아 매일 한 시간씩 각각 여섯 시간, 내지패(內地唄) 다섯 시간, 잡가와 가복습(歌復習)이 각 세 시간, 국어·사해(詞解)·작법(作法)·회화(會話)가 각 두 시간, 그 밖에 작문·성악·음악이 각 한 시간이었다. 내지패(內地唄)는 일본의 창을 가리킨다. 회화 시간에는 서비스 방법이나 손님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다섯째, 상업적인 활동이 가능해지고 능력에 따라 부를 축적할 기회를 잡을 수 있어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공연 예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생의 공연 종목은 가곡·가사·시조 같은 실내악은 왕실의 특수한 연회, 유성기 음반, 사랑 노름 등에서 주요한 종목이었으나 대중적 흥행을 염두에 둔 극장에서는 공연되지 못하였다. 그 대신 극장에서는 잡가·판소리·창민요와 같은 통속 예술이 주로 공연되었다.114)권도희, 앞의 글, 331∼332쪽.

1910년대에 성업하던 상설 극장으로는 원각사(圓覺社)·광무대(光武臺)·연홍사(演興社)·장안사(長安社)·단성사(團成社) 등이 유명하였고, 이 극장을 무대로 하는 전속 기생이 있어 각종 공연을 대중들의 취향에 맞게 발전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기생 조합 소속의 기생까지 가세함으로써 극장을 중심으로 한 대중 공연은 새로운 모습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1914년 『매 일신보(每日新報)』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이라는 연재물에 소개된 예술인 98명 중 8명을 제외한 90명이 모두 기생이었다는 사실은 신문사의 볼거리 제공이라는 홍보 전략을 고려하더라도 기생이 당시 예술계에 얼마나 큰 대중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115)오현화, 「예단일백인을 통해 본 1910년대 기생 집단의 성격」, 『어문 논집』 49, 민족 어문 학회, 2004.

1920년대 말 이후에는 방송이 새로운 매체로 등장하면서 공연 부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방송은 극장 공연보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전기 녹음이 시작되면서 다량의 물량, 다양한 레퍼토리, 좋은 음질의 음반(音盤)이 대중을 선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전통 무용과 음악만을 전수하던 기생은 음악 기생, 무용 기생, 문학 기생, 극단 여배우, 대중가요 가수, 화초 기생 등으로 분화되었다. 이는 기생이 단순히 전통 가무 계승자에 머물지 않고 대중 예술인으로 변화·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116)권도희, 앞의 글, 334쪽.

20세기 기생은 19세기 관기의 지속으로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삼패류의 계승자로만 볼 수도 없다. 20세기 기생의 본질은 관기의 해체와 삼패류의 성장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때에 참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곧 20세기 기생은 여악의 계승과 단절, 풍류방 해체, 기생 계급 질서의 붕괴, 삼패류와 기생 전통의 통합, 이에 따른 레퍼토리의 혼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117)권도희, 앞의 글, 325쪽.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생업은 일제로부터 제재를 당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매춘이 금지되고 폐창 운동이 전개되면서 권번을 중심으로 한 기생업은 매춘업이 아닌데도 함께 해체되었다. 이후 권번은 사설 기예 학원으로 그 기능이 옮겨 가서 영업 기능은 마비된 채 학습 기능 중심으로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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