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1. 무당의 직능과 원형
  • 사제자, 의사, 예언자, 연희자으로서의 무당
임학성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자신이 오래전에 경험한 남자 무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을 남겼다.

수십 년 전에 한 남자 무당(男巫)이 있었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고왔다. 그는 여복(女服)으로 변장하고 사대부 집에 출입하여 부녀의 방에서 혼숙을 하였는데, (부녀들이) 서로 천거하여 그의 자취가 서울 안에 두루 미쳤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의 자색(姿色)을 좋아하여 강제로 가까이한 자가 있었는데, 비로소 거짓이 발각되어 그 남자 무당은 마침내 사형에 처해졌고 이로 인해 추한 소문이 많이 전파되었다. …… 악한 사람이 남을 속이는 일은 끝이 없으므로 삼가 방지하지 않으면 교묘한 꾀에 빠지기 쉽다. 법도를 지키는 집에서는 무릇 무당(巫覡)이나 여승(尼婆), 그리고 색다른 종류(異色之類)들은 절대로 접근하지 말도록 다시 경계를 거듭하여야 할 것이다.118)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3, 인사문(人事門), 남무여복(男巫女服).

이익은 무당을 ‘남을 속이는 악한 사람’이니 ‘법도를 지키는 집에서는 절대로 접촉하지 말고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매우 좋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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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신무(巫女神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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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익이 묘사하고 있는 남자 무당의 모습이나 행적은 근래 장안의 화제가 된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인 공길(孔吉)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왕실 내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한 『조선 왕조 실록』은 우인(優人)인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연희(演戲)를 하면서 불경한 말을 하여 곤장을 맞고 유배형에 처해진 정도만을 간략하게 전할 뿐이다.119)『연산군일기』 권60, 연산군 11년 12월 기묘. 천한 신분의 예인(藝人) 공길이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불려가 임금 앞에서 한바탕 신나게 공연을 하고, 유배형에 처해지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가치관은 그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이처럼 단 한 줄로만 적는 아량(?)을 베풀 뿐이었다. 조선시대의 무당은 ‘기록되지 않는 역사’, ‘기록할 수 없는 역사’의 주연들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고대 무당의 직능을 사제자(司祭, priest), 의사(醫師, medicine man), 예언자(豫言者, prophet)의 세 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120)최남선, 「살만교차기(薩滿敎箚記)」, 『계명(啓明)』 19호, 계명 구락부, 1927, 8쪽. 그에 따르면, 무당은 제례 의식을 주관하고 그럼으로써 신(神)의 의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의례 전문가(사제자)일 뿐 아니라, 질병을 앓는 사람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치병(治病) 전문가(의사)이며, 신으로부터 받은 직감과 예지로 인간의 길흉을 판단하고 일깨워 주는 점복(占卜) 전문가(예언자)이다.

무당의 이러한 직능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림이 없겠는데, 당시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초자연적, 초인간적인 힘이 작용한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힘과 통교하는 능력을 지녔거나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던 무당은 존경자 및 만능자, 권력자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자로서의 직능을 지닌 무당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사정자(司政者), 즉 부족장 및 왕의 역할을 겸하게 된다. 통치를 잘하려면 만사에 능해야 함은 물론이고, 신과도 통하여 신의 뜻(神意)을 받아 백성에게 전달하고, 또 반대로 백성의 뜻(民意)을 신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런 능력을 지닌 자가 바로 무당이었던 것이다. 무당(사제자)이 왕(사정자)이 되었던 기록은 동아시아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우리나라는 단군(檀君)과 신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시 및 고대인들이 인식한 질병관(疾病觀)은 귀신이 인체에 침범하여 발생한 것이며 이를 치료하려면 외부에서 몸속으로 들어온 귀신을 내쫓는 것이었다. 따라서 질병에 걸리면 귀신과 접촉할 수 있는 무당에게 치료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무의(巫醫)’ 혹은 ‘의무(醫巫)’의 직종이 생겨난 것이다. 의사를 표현하는 한자가 ‘의(醫)’인데, 이 글자의 아랫부분에 ‘유(酉, 술을 뜻함)’ 자 대신 무당 ‘무(巫)’ 자를 집어넣은 ‘의(毉)’ 자로 써도 마찬가지임은 최초의 의사가 무당이었음을 살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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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독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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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무당이 질병을 치료한 사례가 확인된다.

(고구려) 유리왕 19년 8월,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한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에게 쫓게 하였는데, 장옥택(長屋澤)에서 붙잡아 칼로 돼지의 다리 힘줄을 끊어 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 지낼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하였느냐.” 하고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에 왕이 병환으로 괴로워하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의 원혼이 붙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왕이 무당을 시켜 사과하니 병환이 바로 나았다.121)『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신라) 미추왕 3년 때, 성국 공주(成國公主)가 질병에 걸렸다. 무의(巫醫)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왕이) 사방에서 의원(醫)을 구하라고 명하였다. (아도) 법사가 급히 대궐에 이르러 그 병을 고치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122)『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 아도기라(阿道基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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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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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기사는 무당의 치병 능력이 대조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전자는 유리왕의 발병이 그에게 살해당한 귀신(원혼)이 달라붙었기 때문이었기에 무당의 치료가 효과를 보았지만, 후자는 무당이 질병 치료에 실패하여 사방에서 의사를 구하고 있다. 성국 공주의 발병 원인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설명이 없으나 귀신이 들어선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무당의 치료가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아마도 의약으로 치료하는 전문의를 구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두 기록은 시간적으로 260여 년이라는 긴 차이가 있다. 유리왕 19년은 기원전 1년이며, 미추왕 3년은 서기 264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치병자(治病者)로서의 무당의 능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축소되고 분화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3세기경에는 무당과 의사가 분화되어 초자연적인 치료는 무당이 맡고, 자연적인 치료는 전문 의사가 맡는 양상으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점복으로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는 행위 또한 무당의 직능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무당이 신의(神意)를 탐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 기록에서는 무당이 점복 예언자로 행동한 사실을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사례 하나만을 인용해 본다.

(고구려) 산상왕 13년 9월에 주통촌의 여자가 남자아이를 낳으니 왕이 기뻐하여 …… 아이 이름을 교체(郊彘)라 하고 그 어미를 소후(小后)라 하였다. 처음 소후의 어미가 임신하여 해산하기 전에 무당에게 점을 쳤는데 (무당이) 이르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다.” 하였다. 어미가 기뻐하였고 딸을 낳자 이름을 후녀(后女)라 하였다.123)『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무당이 점을 쳐서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장차 왕후가 되리라 예언하였고, 그 점이 적중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후녀는 평민이었다. 하루는 하늘에 제사 지내려 한 돼지가 달아나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그녀가 붙잡아 쫓아간 관리에게 넘겼다고 한다. 산상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밤에 그녀 집에 찾아가 관계를 맺고 궁궐로 돌아왔다. 왕자가 없어 고민이 많던 차에 후녀가 자신의 아들을 낳은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궁궐로 모자를 불려 들여 왕자와 소후로 삼았다. 산상왕과 소후가 만난 것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郊) 돼지(彘)가 인연이 되었기에 왕자의 이름도 ‘교체’라 하였던 것이다. 후에 교체가 왕위를 이으니, 고구려 제11대 동천왕(東川王)이다.

그런데 ‘무당의 예언 → 천제용(天祭用) 돼지의 도주 → 돼지가 후녀에게 붙잡힘 → 아들이 없던 왕과의 만남 → 아들 생산 → 무당 예언의 적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점을 쳐 준 이 무당은 하늘신과의 통교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자였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굳이 따지자면 맞아도 그만, 맞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 점이나 예언이다. 어떤 경우에는 점으로 인하여 무당이 목숨을 잃는 일도 없지 않았으나,124)『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 차대왕(次大王) 3년 7월과 백제 의자왕(義慈王) 20년 6월의 기사 내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점괘가 맞지 않은 때문이 아니라 점괘로 나타난 내용이 임금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점괘의 적중 여부 와 관계없이 무당은 예언자로서의 직능을 끊임없이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무당은 사정자 및 질병 치료자로서의 직능이 오래전에 소멸한 것과 달리 지금까지도 점복자(占卜者)의 직능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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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걸전(邪堂乞錢)
사당걸전(邪堂乞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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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핀 무당의 세 가지 직능 외에 추가시킬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연희자(演戲者)로서의 직능이다. ‘무(巫)’라는 글자의 태생 자체가 연희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따르면, 무당은 춤을 통하여 신과 접하기 때문에 신들이 사는 천상(天上) 세계와 인간들이 사는 지상(地上) 세계를 잇는 ‘공(工)’ 자의 양옆에서 두 사람이 춤을 추는 형상을 취해 만든 글자가 ‘무(巫)’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무당은 춤과 떨어질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희자로서의 무당의 직능은 19세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남녀 무당이 북(鼓)을 치고, 주 문을 재잘거리며 춤을 추면서 귀신을 내쫓고 신을 부른다고 설명한 부분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북소리와 노래(呪言), 그리고 춤이 어우러진 가무(歌舞, 굿)를 행하는 무당은 ‘종합 엔터테이너(entertainer)’라고 부를 만하다. 이런 까닭에 예능(藝能)을 주된 생계 수단으로 삼았던 사당(社堂)이나 기녀(妓女) 또한 무당이 전업(轉業)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실제로 1932년에 조사된 보고에 따르면,125)秋葉陸, 「朝鮮巫家の母系的 傾向」, 『小田先生頌壽紀念 朝鮮論集』, 1934:심우성·박해순 옮김, 『춤추는 무당과 춤추지 않는 무당』, 한울, 2000. 전라도 광주의 기녀 21명 중 6명, 남원의 기녀 10명 중 4명이 무당 집안의 출신자였다고 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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