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1. 무당의 직능과 원형
  • 임금, 대장장이, 유자(儒者) 또한 무당의 원형
임학성

우리 민족사의 첫 임금 명칭은 ‘단군(檀君)’이다. 한자명을 그대로 풀이하면 ‘박달나무(檀) 임금(君)’으로 풀이되는데, 이는 우리 고유의 호칭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 원음은 ‘텡그리 → …… → 당굴·단골’의 변화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시베리아계의 하늘 또는 제사장(무당)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에서 원형을 찾는 것이다.126)최남선,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조선 급 조선 민족(朝鮮及朝鮮民族)』, 1927, 『육당 최남선 전집』 2, 현암사, 1973, 60쪽. 지금도 호남 지방에서 무당(세습무)을 ‘단골’ 혹은 ‘단굴’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단군과 무당의 동질성을 잘 드러내 주는 잔영(殘影)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단군은 신인(神人) 또는 무당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대 왕이 종교적 직능자(職能者)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127)서영대, 「한국 고대의 종교 직능자」, 『한국 고대사 연구』 12, 한국 고대사 학회, 1997, 215∼216쪽.

무당이 왕의 역할을 맡았던 사실은 신라의 제2대 왕 남해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즉, 『삼국사기』에 왕명 차차웅이 무당을 일컫는 말이었음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남해차차웅이 즉위하였다. 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자충은) 방언(方言)으로 무당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위하고 제사를 숭상하는 까닭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자충’이라 하였다.128)『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한편, 중국의 설화 중에는 고대 성인 정치가로 추앙받는 우(禹)임금이 ‘청동 솥을 만든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청동 솥을 만들었다면 바로 대장장이(冶匠)가 되는데, 고대에는 대장장이를 ‘불의 지배자’로 간주하여 권능을 지닌 자로 존중하였다.

시베리아 야쿠트 족(Yakut族)의 속담 중에는 “대장장이와 샤먼은 같은 둥지에서 나왔다.”거나 “최초의 대장장이와 최초의 샤먼은 피를 나눈 형제였다. 대장장이가 맏형이고 샤먼은 동생이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129)미르치아 엘리아데, 이재실 옮김,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문학 동네, 1999, 83쪽. 샤먼(shaman, 무당)이 대장장이의 동생이라는 인식은 존장자로서의 무당의 권능과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무당이 대장장이를 겸하는 경우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한다.130)미르치아 엘리아데, 이재실 옮김, 앞의 책, 100쪽.

이렇듯 대장장이와 무당, 특히 국왕의 연관성은 신라의 제4대 왕 탈해(脫解)의 설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탈해가 호공(瓠公)의 집이 길지(吉地)임을 알아보고 이를 빼앗으려고 몰래 호공의 집 옆에 숫돌과 숯을 파묻은 다음, 자신이 대장장이의 후손이며 이 집이 자신의 할아버지 때 집이라고 우겨 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이다.131)『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2, 제4 탈해왕.

한자 ‘유(儒)’ 자를 낱낱이 쪼개 보면 사람(人), 비(雨), 제단(而)의 세 글자가 합쳐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는 ‘제단을 차려 놓고 기우(祈雨)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글자인 것이다. 이에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유’의 의미를 술사(術士), 즉 장례나 의례를 집행하는 직능자로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는 원래 무당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 ‘유’가 무당 계통의 ‘소인유(小人儒)’와 학자 계통의 ‘군자유(君子儒)’로 분화되면서 군자유가 유의 정통을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본래 시작은 하나였으나 그것이 분화되어 다툰 후 어느 하나가 정통을 획득하면서 그렇지 못한 상대를 억압하고 멸시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한 과정을 겪은 대표적인 계층의 하나가 바로 무당이라 하겠다. 한국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무당의 위상이 약해지고 천시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시기는 성리학적 통치 질서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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