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2. 성리학자들의 무당 인식과 억압
  • 요망하고 음탕한 존재, 무당
임학성

성리학으로 이념적 무장을 한 조선시대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에게 있어서 무당은 음사(淫祀)를 일으키는 자였기에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악(惡)이었다. 어찌 보면 ‘군자유’에 그 근원을 둔 조선 성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소인유’에 근원을 둔 무당과 동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무당 인식을 보면, 그들이 무당을 어느 정도로 멸시하였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먼저 1426년(세종 8) 사간원에서 임금께 아뢴 실록 기사를 보자.

사간원(司諫院)에서 임금께 아뢰었다. “…… 백성들이 옛 습속에 오래 젖어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조가 오히려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무당과 박수의 요망하고 남을 속이는 말을 맹신하여 생사와 화복이 모두 귀신의 소치(所致)라고 하고, 음사를 숭상해서 집에서나 들에서 행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 심지어 예(禮)에 어긋나고 분수를 어기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 가히 이 유행의 폐단이 염려됩니다.”132)『세종실록』 권34, 세종 8년 11월 병신.

귀신을 숭상하는 백성들의 오랜 습속과 유행을 염려하는 내용인데, 이러한 폐단은 무당(여무)과 박수(남무)의 요망한 거짓말을 백성들이 맹목적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 글은 1513년(중종 8) 전라도 관찰사 권홍(權弘, 1467∼1516)이 법으로 금해야 할 도내의 그릇된 풍속을 임금께 아뢴 내용이다.

전라도 관찰사 권홍이 서면으로 임금께 보고하였다. “우리 도의 폐풍(弊風)을 보건대, 거사(居士)라는 남자들과 회사(回寺, 절을 돌아다니며 붙여 사는 여인)라는 여인들은 모두 농업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며 횡행하여 풍속을 그르치니, 법으로 금해야 합니다. 그 중에도 더욱 심한 것으로는 양중(兩中, 남자 무당)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무릇 백성의 집에서 귀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 여자 무당이 많이 있는데도 반드시 양중이 주석(主席)이 되게 하여, 주인집과 거기 모인 사람들이 공손하게 맞이하여 위로하고, 밤낮으로 노래하고 춤추어 귀신을 즐겁게 합니다. 또한 남녀가 서로 섞여 정욕(情慾) 이야기와 외설(猥褻)한 짓을 무엇이든 다 하여 사람들이 손뼉 치며 웃으며 이것을 쾌락으로 여깁니다. (양중 가운데) 간혹 수염이 없는 젊은 자가 있으면, 여자의 옷으로 변장하고 분을 발라 화장을 하고 남의 집에 드나들며 밤에 여자 무당과 함께 방에 섞여 앉아서 틈을 엿보아 남의 부녀를 간음하나, 행적이 은밀하여 적발하기 어렵습니다. 혹 사족(士族)의 집에서도 이렇게 된다면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133)『중종실록』 권19, 중종 8년 10월 정유.

권홍이 금하려고 한 것은 남녀의 ‘음탕한 짓’이었는데, 특히 양중, 즉 남자 무당이 주동하여 벌이는 짓이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양반과 일반 백성 간의 합치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제사를 지내면서 밤낮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남녀가 서로 섞여 음담패설(淫談悖說)과 외설적 행위(performance)를 함으로써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신명나게 하는 ‘짓’은 1970∼1980년대 대학가에 유행한 탈춤 내지 민중극의 장면을 보는 듯하다. 피지배층의 처지에서는 그동안 억눌리고 막혔던 심정을 풀어 주고 뚫어 주는 연희가 당시 성리학자에게는 법으로 막아야 할 음탕한 짓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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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굿
무당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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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라도 관찰사 권홍은 남자 무당이 여자로 변장하거나 분장하고 부녀자들과 간음하는 행위까지 저지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여자 무당도 함께 등장하는데, 흡사 뚜쟁이의 역할이 연상된다. 늦은 밤에 남자 무당이 여장을 하고 무녀와 함께 부녀의 방에 출입하였다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비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리학자 권홍은 그 속내를 보지 못하고, 아니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오로지 남자 무당을 ‘남의 부녀를 간음’한 악인으로 몰아세운 것은 아닐까.

간사하고 범람(犯濫)한 짓을 하는 것은 재물이 모자라는 데에서 생기고 재물이 모자라는 것은 농사를 힘쓰지 않는 데에서 생긴다. 농사를 힘쓰지 않는 자 중에 그 좀 벌레(蠹)가 여섯 종류가 있다. …… 첫째가 노비(奴婢) 요, 둘째가 과업(科業)이요, 셋째가 벌열(閥閱)이요, 넷째가 기교(技巧)요, 다섯째가 승니(僧尼)요, 여섯째가 게으름뱅이(遊惰)들이다. …… 기교란 것은 한갓 구경거리의 집기(什器)뿐이 아니라, 무릇 방술(方術)로써 사람을 속이거나 미혼(迷魂)케 하는 종류도 다 그러한 것에 속하는데, 그 중에도 창우(倡優, 광대)와 무당 따위가 더욱 해로운 것이다.134)이익,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육두(六蠹).

내가 보건대, 시골 무당이 노래와 춤으로 죽은 자의 혼(亡魂)을 불러 망혼의 말을 흉내 내면서 어리석은 세속 사람을 유혹하여 재물을 사취(詐取)하니, 마땅히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여 없애야 할 것이다. …… 기도하고 제사하여 혹시 감응을 얻었다는 것도 전혀 희마(戲魔)의 농락에 불과한 것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속은 것이다. 밝고 지혜 있는 자는 스스로 알아야 한다.135)이익, 『성호사설』 권13, 인사문, 하양망혼(下禓亡魂).

앞의 기사는 성호 이익의 글 두 편이다. 전자는 농사에 힘쓰지 않는 좀(蠹) 같은 여섯 종류의 부류를 비판한 내용이다. 실학자답게 과거를 준비하는 자(科業)와 함께, 나라에 공훈이 많거나 벼슬아치를 많이 배출한 일족(閥閱)을 좀에 포함시키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그런데 집기와 방술로 사람을 속이는 기교 집단 또한 좀으로 분류하고, 기교 가운데서도 광대와 무당이 더 해롭다고 평가하였다.

후자는 무당이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재물을 취하는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이익은 무당이 제사 때 노래와 춤으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고 그의 말을 흉내 내는 행위는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여 재물을 얻으려는 ‘희마의 농락’에 불과하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물론 이익의 관점에서 보면 이 속임수는 마땅히 국법으로 금지하여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무당 및 그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는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은 18세기 후반에 활약한 실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에 이르러 구체적인 근절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서울로부터 팔도에 이르기까지 무당의 성함이 옛날 중국의 남쪽 초(楚) 지방보다 심한 것은 부녀자들과 어리석은 백성이 정성껏 믿고 섬기는 탓이다. 재물을 소모하고 풍속을 허물어뜨리고 나라의 기강을 경멸하고 여염(閭閻)이 시끄럽고 혼잡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고을 수령 중에는 혹 그것을 심히 싫어하는 자가 있어 핍박하여 내쫓고 철저히 금하고자 하나, 해마다 무당에게 무포(巫布)를 받는 이익이 있으므로 그것을 탐내고 아까워하여 감히 다스리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조정에서 마땅히 법령을 세워 팔도에 유시(諭示)를 반포하여 영원히 근절시키되 백성 중에 범하는 자가 있으면 중한 벌을 주고 많은 벌금을 받고, 무당은 모두 목을 벨 수 없으니 노비를 만들어 그 역을 무겁게 하고, 그들이 입고 있던 비단과 깃발은 회수하고, 수령으로서 금하지 못 하는 자는 벌을 주어 발본색원(拔本塞源)함이 옳다.136)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조선 고서 간행회본) 9집.

이긍익이 제시한 방안은 첫째, 무당을 믿고 섬기는 백성은 중벌에 처하고 벌금을 받는다. 둘째, 무당은 모두 노비로 만들고 그들이 입는 옷과 깃발을 회수한다. 셋째, 무당 및 음사를 금지하지 못하는 수령 또한 벌을 주어야 한다는 등이다. 재야 지식인에 불과하였던 이긍익의 개인적인 주장은 정부 정책에 곧바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무당을 노비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무당과 그 행위를 근절시키지 못한 큰 이유는 이긍익이 우려하였듯이 해마다 무당에게 무포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이익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 더욱 컸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시대를 일관하여 성리학자와 지식인들은 무당을 요망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백성을 현혹시켜 재물을 사취할 뿐 아니라,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간악하고 음탕한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도의(道義)에 따르면, 무당은 반드시 억압하여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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