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2. 성리학자들의 무당 인식과 억압
  • 무당 억압책과 무세 징수의 양면성
임학성

1472년(성종 3) 사헌부에서 무당을 억압하기 위한 시행 규칙을 만들어 국왕의 허락을 받았는데,137)『성종실록』 권14, 성종 3년 1월 신축. 금음사절목(禁淫祀節目). 그 규칙 중에는 “상(喪)을 당한 자가 무당집에 가서 음사를 행하면 그 가장(家長)은 물론 무녀도 형벌에 처한다.”는 내용이 있다. 무당을 억압하기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무당에 대한 탄압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도성 안에 있는 무당을 모두 색출하여 죄로 다스리도록 하는 규정도 두었던 것이다.138)『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권5, 형전(刑典), 금제(禁制). 더군다나 이 규정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도성 안의 무당을 검거하지 않는 관원은 파직시킨다.”139)『전율통보(典律通補)』 권5, 형전, 금제.는 특단의 조치도 마련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도성이 아닌 지방에 거주하며 여전히 음사를 행하는 무당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에 있었다. 도성에서 무당을 추방한 방식대로 전국의 무당들을 국외로 추방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봉책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무세 제도(巫稅制度)’이다. 이는 무당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이다. 명분은 무당에게 경제적 억압을 주어 스스로 그 짓을 그만두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140)임학성, 「조선시대의 무세(巫稅) 제도와 그 실태」, 『역사 민속학』 3, 한국 역사 민속학회, 1993.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남자 종(奴)을 제외한 모든 남정(男丁, 16∼60세에 해당하는 남자)은 부역(賦役)의 의무가 있었고, 16세기경 이후에는 부역이 준(準)세금으로 바뀌어 포(布)를 징수하는 것으로 고정화되었다. 이 때문에 남자 무당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그다지 큰 억압이 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문제는 납세의 대상이 아니었던 여성에게 무녀라는 이유로 세금을 징수하는 데에 있었다. 세정사(稅政史)에 있어서 무세 제도의 배경과 본질은 무당의 억압·근절과 국가 세수(稅收)의 신설·신장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무당에게 무세를 징수한 사례는 조선 초기부터 발견된다. 1415년(태종 15) 남녀 무당에게 저화(楮貨)로 세금을 징수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141)『태종실록』 권30, 태종 15년 7월 기유. 그리고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서는 무세 징수 규정을 볼 수 있다.

지방의 무녀는 장부에 등록하고 세금을 거둔다. 이 경우 한 명마다 목면(木棉) 1필씩을 거둔다.142)『속대전』 권2, 호전(戶典), 잡세(雜稅).

조선 후기에 목면 1필은 돈으로 환산하면 3냥 5전에 해당되었다. 곧 목면 1필 혹은 3냥 5전을 걷도록 규정되었으나, 군현에 따라서는 5냥을 징수한 곳도 있었다. 무세는 정액 외에도 각종 명목의 잡비(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드는 인건비와 운반비 등)가 관행으로 부가되었기에 무당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원래 세금으로 내는 3냥 5전의 40%가량이 잡비의 명목으로 추가 징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794년(정조 18)경에 조사 작성된 『부역실총(賦役實摠)』에 따르면 충청도 결성현(結城縣)에서는 무당 1명당 무려 8냥씩을 징수하고 있었다. 곧 목면 1필에 해당하는 3냥 5전에 잡비 4냥 5전이 더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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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현의 무세액
결성현의 무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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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선 정부는 기우제(祈雨祭)를 올려 효력이 발생하거나, 백성의 질병을 많이 치료한 무당에게 세금을 감해 주었다. 또한 흉년이 든 지역에 사는 무당에게는 세금을 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였다. 조선 정부가 무풍 음사(巫風淫祀)를 근절시키려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에 편승하여 지방 수령 및 아전들의 수탈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 문학서인 『패관잡기(稗官雜記)』는 무당에게 가해진 억압과 수탈이 적지 않았음을 엿보게 해준다.

속세에 전하기를, “관아에서 무당에게 세포(稅布)를 너무 많이 걷어 들였으므로, 매번 관원이 문에 이르러 외치면서 들이닥치면 ……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기한을 늦추어 달라고 애걸하였다.” 하였다. 이런 일이 하루걸러 있거나 연일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143)어숙권(魚叔權), 『패관잡기(稗官雜記)』 권2, 『대동야승(大東野乘)』.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를 너무 심하게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매번 세금을 걷는 관리가 오면 무당의 집에서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며 납세 기한을 늦추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러한 폐단이 매우 심하였는데, 광대가 설날에 대궐 뜰에서 이 이야기를 임금에게 놀이로 보여 준 이후로 무세가 면제되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무세 징수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였다. 영조 때에 역비(驛婢)의 공물(貢物)과 사비(寺婢)의 공물을 탕감하여 주면서 무녀에게 받는 베(布) 역시 특별히 감하도록 명한 적이 있지만, 정조 때에 다시 이전처럼 신포(身布)를 거두도록 하였다. 당시 관료 대부분이 주장한 것은 무녀에게 신포를 거두는 것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을 징계하려는 뜻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녀에게 세금 징수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그러한 인식을 보여 준다.

무녀포(巫女布)란 것은 형조에서 잡신의 제를 지내는 것을 금하는 바이므로, 다른 요역(徭役)은 줄이는 것이 좋지만 이 무녀포만은 증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세 집만 사는 마을에도 무당이 하나씩 있어서 요사한 일을 만들고 현혹한 짓을 부채질하여 멋대로 화복(禍福)을 점쳐 남의 옷상자와 쌀독을 비게 하면서 자신은 비단만 입고 생선과 젓갈만 먹으니 이들은 당연히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무녀포의 원액(原額) 외에 그 액 수를 증가하되, 큰 고을은 혹 200필로 한정하고 중간 고을은 혹 100필로 한정시켜…… 해마다 무녀포를 징수하여 그 악습을 벌준다면 아마도 무당의 풍습이 다소 뜸해질 것이다.144)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牧民心書)』 호전육조(戶典六條), 제5 평부(平賦) 상.

무녀들이 요사스러운 짓을 하면서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만든다고 하며, 무녀포를 더 늘려 악습을 벌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약용의 인식은 무당에게 취한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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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무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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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정의 이러한 정책과는 달리 무당은 없어지거나 수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무당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는 무당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또 무당 스스로도 그 업(業)을 세습·전승시키려는 숙명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당이 도성 안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한 것 또한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모든 길흉을 모두 무당과 박수에게 물어보는데 이것이 어찌 된 풍속인가. 성종 대왕이 이 폐해를 깊이 아시고 법사(法司)로 하여금 무당·박수를 죄다 문밖으로 내쫓게 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금지하는 법망이 점점 성기어져서, 도성 안팎에서 부인들을 속여 유인하여 술과 음식에 막대한 비용을 소비하고, 취해 노래하고 항상 춤추는 것이 거리에 끊이지 않는다. 비록 거가 대족(巨家大族)의 집에서라도 서로 다투어 맞아들여서, 제사할 귀신이 아닌 잡귀를 아첨해 섬기면서 태연히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145)『중종실록』 권12, 중종 5년 12월 신축.

1510년(중종 5)에 성균관의 생원 이경(李敬) 등이 이단 배척을 요구하며 올린 상소이다. 이들은 무당과 박수를 먼 변방으로 내쫓아 잡귀에 아첨하는 풍습을 근절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성종 때에 무당과 박수를 성 밖으로 내치도록 한 지 5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성 안에 무당과 박수들이 활개치고 다녔던 것이다.

무세는 갑오개혁에 의해 1895년(고종 32)부터 잡세(雜稅) 징수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 지속되었다. 무당을 억압하여 근절시키려고 마련한 무세 제도는 오히려 무당을 공인(公認)하는 것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무세가 존속한 이유는 중앙 및 지방 관아의 재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기에 쉽게 없앨 수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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