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3. 무당의 호칭과 종류
  • 호적 자료에 나타나는 무당의 다양한 명칭
임학성

조선시대 무당, 특히 남무에 대한 명칭이 다채롭게 발견되는 자료는 호적이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그 명칭이 지니는 용례와 의미를 살펴보겠다.

먼저 남무를 ‘무부’로 호칭한 예는 조선 후기 호적 자료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1786년(정조 10)에 작성된 『단성 호적(丹城戶籍)』을 보면, 현내면 대방촌 3통 1호에 거주한 호수(戶首, 호적에 등재된 개별 호의 구성원 중 처음 등장하는 사람) ○장원(56세)과 그의 두 아들이 모두 ‘무부’를 직역(職役)으로 기재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남무였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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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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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거리(大巨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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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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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부, 즉 남무는 군역(軍役)을 지기도 하였는데 주로 ‘군뢰’(軍牢, 군영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직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1759년(영조 35)에 작성된 『단성 호적』에 따르면, 원당면 입석촌 10통 3호의 호수 ○득선(40세)이 ‘순영 무부 군뢰(巡營巫夫軍牢)’를 직역으로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호적에는 그의 처(34세) 또한 ‘무녀’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은 호적 자료에 드물게 나타나는 명칭들을 살펴보겠다. 1729년(영조 5)에 작성된 『단성 호적』을 보면, 북동면 월명상촌 2통 1호에 거주하는 호수 ○원대(48세)가 ‘화랑(花郞)’이란 직역으로 나타난다. 화랑(화랭이)은 경기 이남 지역에서 흔히 쓰던 남무의 명칭이었다. 그의 아들(18세) 역시 남무의 또 다른 명칭인 ‘취타수(吹打手)’를 직역으로 기재하고 있다.

취타수란 관아나 병영에 소속되어 악기를 불고 두드리는 사람의 직역이다. 남부 지역에서 굿을 행할 때 남무가 맡은 역할이 주로 무악(巫樂)을 반주하는 것이었다. 이로 본다면 무당 집안의 남자들을 취타수로 충당하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단성 호적』을 보게 되면 무부로 직역을 기재하기 이전에 취타수로 기재하는 무당 집안의 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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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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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타수가 무당과 관련된 명칭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경우가 1717년(숙종 43)에 작성된 『단성 호적』에 나오는 도산면 벽계촌 6통 5호의 자료이다. 호수 ○귀학(52세)이 ‘병영(兵營) 취타수’를 직역으로 기재하였는데, 그의 전처는 물론 후처 모두 ‘무녀’로 기재되어 있다. 그의 아들(16세)도 직역을 취타수로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남무인 아버지와 아들이 병영의 취타수로 차출된 것을 알 수 있다.

‘광대(廣大)’ 또한 남무의 명칭 가운데 하나였다. 광대는 무당과 구분할 때 연희적(演戲的) 요소가 많은 계층으로 특화되기도 하나 그 뿌리는 무당에 두고 있었다. 1759년(영조 35)의 『단성 호적』에서 광대가 확인되는데, 북동면 월명하촌 1통 5호의 호수 ○만재(51세)가 직역을 ‘광대’로 기재하고 있다.

그런데 『단성 호적』의 다른 자료를 보면, ‘광대장(廣大匠·狂大匠)’을 직역으로 기재한 사례도 발견된다. 광대장은 광대가 연희를 할 때 쓰는 가면(假面)을 제작하는 장인을 말하는데, 이들 장인 역시 남무였다고 여겨진다.

한편, 남무는 ‘재인(才人)’으로도 불렸다.153)이두현, 「조선시대의 재인과 광대」, 『한국사』 35 조선 후기의 문화, 국사 편찬 위원회, 1998, 619∼625쪽 ; 손태도, 『광대의 가창 문화』, 집문당, 2003, 86∼93쪽. 1852년(철종 3)에 작성된 평안도의 『중화부 호적(中和府戶籍)』을 보면, 고생양면 일리 대창 7통 2호가 재인을 세습한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호수 ○천은(71세)은 물론 그의 4조(四祖,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가 모두 재인을 직역으로 기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례는 이북 지역에서의 무당(재인) 세습 양상을 실증한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다음에 소개하는 두 사례는 무세와 관련된 남무의 명칭이 되겠다. 하나는 1786년(정조 10)에 작성된 『단성 호적』에 나타나는데, 법물야면 장천촌 1통 1호의 호수 ○명구(29세)가 직역을 ‘무포군(巫布軍)’으로 기재한 것이다. 이는 무세를 포목(布木)으로 내는 데에서 생겨난 이름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1825년(순조 25)에 작성된 경상도의 『안의현 호적(安義縣戶籍)』에 나타나는 사례이다. 서상동면 옥산촌 12통 1호에 거주하는 호수 ○천세(70세)의 두 아들이 ‘무세(巫稅)’를 직역으로 기재하였다.154)이 사례는 山內民博, 「19世紀 朝鮮の巫夫と巫女」, 『資料學硏究』 2, 2005에서 확인한 것이다. 이 직역은 남무의 일반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세를 납부하는 자’임을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무당의 직역을 이처럼 ‘무세’로 기재한 경우는 『안의현 호적』이 유일하지 않나 여겨진다.

1678년(숙종 4)에 작성된 『단성 호적』에는 남무를 ‘무공(巫工)’이라 한 사례도 발견된다. 법물야면 철수촌 1통 4호의 호수 ○운(39세)이 ‘무공 양인(良人)’을 직역으로 기재한 것이다. 처(32세)는 직역이 ‘무양녀(巫良女)’였다. 남무를 ‘무공’이라고 표현한 용어는 매우 독특한 경우이다. 남무가 간혹 중앙과 지방의 공공 행사에 ‘악공(樂工)’으로 차출되어 악기를 연주하였다는 사실155)김동욱, 『한국 가요의 연구』, 을유 문화사, 1961, 294쪽 ; 손태도, 앞의 책, 89∼93쪽.과 아울러 무당과 야장(冶匠)의 연원과 관련된 명칭이 아닌가 생각할 따름이다.

1893년 강원도 통천군에서 작성한 『관노안(官奴案)』156)서울 대학교 규장각 소장 자료(소장 번호 : 일사 고 351.2-T613g).을 보면 무녀안(巫女案)과 함께 악공안(樂工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수록된 악공들 가운데 상당수는 무당 집안의 자식, 즉 남무로 추정된다. 악공안에 기재된 12 명은 오(吳)씨가 5명, 최(崔)씨가 6명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씨 중 4명과 최씨 중 3명은 이름의 항렬(行列)이 일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들은 악공직을 세습하는 집안의 인물들이었다고 여겨지며, 이에 무당 집안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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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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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무를 ‘업중(業中)’이라고 호칭한 사례도 나타나는데, 이는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32년(영조 8)에 작성된 『단성 호적』에서 단 한 차례 확인되는데, 생비량면 법평촌 9통 7호에 거주하는 호수 ○연학(54세)의 아들이 ‘속오(束伍) 업중’을 직역으로 기재한 것이다.

‘업중’이 남무를 일컫는 명칭이었음은 조선 중기의 학자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확인된다.

충혜왕 때 민환(閔渙)이 악소(惡少)들을 나누어 보내 업중에게 공포(貢布)를 거두어들이니 사람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지금의 남자 무당이다.157)권문해(權文海),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 상평성(上平聲) 1 동(東), 중(中).

공포(貢布)를 바친 업중을 지금의 남자 무당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처럼 남무를 ‘업중’으로 기재한 사례는 조선 전기의 실록 자료에서도 일부 찾을 수 있다.

한편, 1876년(고종 13)에 작성된 전라도 『청산진 호적(靑山鎭戶籍)』에서 볼 수 있듯이 ‘무(巫)’로만 간단히 기재한 경우도 나타난다. 도청리 5통 5호의 호수 ○원백(52세)이 직역을 ‘무(巫)’로만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경상도 단성현을 비롯한 기타 지역의 호적 자료 들에서 확인되는 남무 명칭은 ‘무부’·‘화랑’·‘취타수’·‘광대’·‘재인’·‘무포군’·‘무세’·‘무공’·‘업중’·‘무’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17∼19세기 『단성 호적』에 등재된 무당의 명칭(직역) 분포는 어떠하였을까? 표 ‘『단성 호적』에 보이는 무당의 명칭 분포’는 그 양상을 정리한 것이다.

<표> 『단성 호적』에 보이는 무당의 명칭 분포
단위 : 호(戶)
직역
연도
무부 광대 취타수 화랑 기타 무녀 직역
연도
무부 광대 취타수 화랑 기타 무녀
1678 6 - - - 3 공 : 1 2 1828 11 11 - - - - -
1717 6 3 1 - - - 2 1831 4 4 - - - - -
1720 11 8 2 - - - 1 1834 4 4 - - - - -
1729 15 10 2 2 1 - - 1837 5 5 - - - - -
1732 14 10 1 1 - 업 : 1 1 1840 3 3 - - - - -
1735 16 12 - 2 - - 2 1843 5 5 - - - - -
1750 6 6 - - - - - 1846 3 3 - - - - -
1759 17 14 1 - - - 2 1849 6 6 - - - - -
1762 19 17 1 - - - 1 1858 4 4 - - - - -
1780 14 13 - - - 포 : 1 - 1861 1 1 - - - - -
1783 21 19 - - - 포 : 1 1 1867 3 3 - - - - -
1786 21 20 - - - 포 : 1 - 1870 2 2 - - - - -
1789 16 16 - - - - - 1879 4 4 - - - - -
1825 13 12 - - - - 1 250 215 8 5 4 5 13
✽비고 : ① 기타에서 ‘공(工)’은 무공, ‘업(業)’은 업중, ‘포(布)’는 무포군 등으로 기재된 자를 말함.
         ② 광대는 ‘광대장(廣大匠·狂大匠)’ 등으로 표기된 자도 포함시킴.
         ③ 화랑은 ‘화랑(化郞)’으로 표기된 자도 포함시킴.

조선 후기 남무가 지닌 직역의 빈도를 살펴보면, 무부가 86%(250호 중 215호)로 압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광대가 3.2%(8호), 취타 수가 2.0%(5호), 이 밖에 화랑(1.6%·4호), 무포군(1.2%·3호), 무공·업중(이상, 0.4%·1호씩) 등이 1%대이나 그 이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표 ‘『단성 호적』에 보이는 무당의 명칭 분포’에 따르면, 호적 자료에서 남무의 직역을 기재하는 방식이 시기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었다. 즉, 18세기 중엽까지는 비교적 남무의 직역이 다양하게 나타났으나, 그 이후로는 오직 ‘무부’로만 기재된 것이다. 이는 경상도 내의 단성현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호적 자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렇듯 남무의 직역을 ‘무부’로 단일하게 기재한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 호적상의 직역 파악과 기재 방식을 균일화하려는 시책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호적 기재와 달리 남무의 실제 명칭과 그에 걸맞은 역할은 여전히 다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본 표 ‘무당의 여러 가지 이칭’ 중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현지 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남무와 관련한 다양한 명칭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무당, 숫무당, 박수(박사, 박시, 반수), 봉사, 화랑, 재인, 광대, 무동, 미동, 복술, 경쟁이(經匠), 홑에비 등이 그것이다. 곧 18세기 중엽 이전의 호적에 보였던 다양한 명칭이 일제 강점기까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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