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4. 사례로 본 무당의 생활 모습
  • ‘화랑’ ○진명 일가의 사례
임학성

1678년(숙종 4)에 작성된 『단성 호적』에서 ‘양인 화랑(良人花郞)’의 신분과 직역을 지니고 있었던 ○진명(44세)이란 무당이 발견된다. 그의 후손은 현손(玄孫) 춘화(52세)가 ‘무부’로 등재된 1828년도(순조 28) 호적까지 확인된다. 호적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당들 가운데 ○진명 일가처럼 장장 150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가계(家系)가 확인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가계도를 통해 ‘화랑’ ○진명 일가의 가계도와 무업 세습 양상을 살펴보면 <가계도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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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1> ‘화랑’ ○진명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가계도 1> ‘화랑’ ○진명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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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도(숙종 4) 호적을 보면, ○진명에게는 양녀로 보이는 전처 소생(前妻所生)의 호걸(22세)과 노비 신분인 후처 소생의 승학(16세) 두 아들이 있었다. 호걸의 직역은 경별대 보인(京別隊保人)이었고, 승학의 직역은 사노(私奴)였다. 따라서 일단 무업(巫業) 세습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1717년도(숙종 43) 호적에는 호걸의 직역을 ‘무부 양인(巫夫良人)’으로 기재하고 있어 아버지를 이어 무업을 세습하였음이 확인된다. 바로 호걸계(系)가 단성현 최대의 무당 일가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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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굿
무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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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717년도 이후의 호적을 보면, 호걸의 아들인 월학·명학·원창·선창·학창 등이 무업을 세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두 사노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호걸이 단성현 내 최고 양반 가문 가운데 하나인 성주 이씨(星州李氏) 소유의 사비(금이)와 혼인하였고, 이에 그 자식들 모두 모친의 신분을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분은 노비지만 직업은 무당인 운명을 지녔던 것이다.

호걸의 손자 대에 이르면, 세공과 귀철처럼 여전히 노비와 무당 직역을 동시에 지닌 후손들도 있으나, 귀배·장원·명재 등처럼 ‘사노’라는 표기 없이 처음부터 ‘무부’로만 직역을 기재한 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버지 대에서 모두 양인 신분의 ‘무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데에 따른 변화였다.

호걸의 증손 대에 이르면, 이들 무당계의 후손인 세귀와 용검·태성·춘화 등 가운데, 서원(書院)에 속한 여종(院婢)인 모친(막내)의 신분을 쫓아 원노(院奴)가 된 세귀 외에는 노비를 직역으로 표기한 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무당계 후손들은 호걸의 증손 대에 이르러 거의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한편, 이들 일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1828년도(순조 28) 호적에서 무부 춘화의 맏아들 광철이 분가하여 나갔다(別戶去). 그리하여 그 다음 대에서의 무업 세습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춘화와 같이 살고 있던 다른 두 아들 명철(22세)과 학철(15세)은 직역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역시 무업 세습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정황으로 보아 이들 광철 형제도 계속 무업을 이어 나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진명 일가는 6대에 걸쳐 무업을 세습한 사례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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