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4. 사례로 본 무당의 생활 모습
  • ‘무공’ ○운 일가의 사례
임학성

1678년(숙종 4)에 작성된 『단성 호적』에서 ‘무공 양인(巫工良人)’의 신분과 직역을 지니고 있었던 ○운(39세) 일가는 그의 손자 득선(81세)이 ‘무부’로 등재된 1789년도(정조 13) 호적까지 그 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득선의 형 ‘순영 무부(巡營巫夫)’ 석지(59세)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1762년도(영조 38) 호적에서 아들 삼이(19세)가 ‘무부’로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운 일가의 무업 세습은 증손자 대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공’ ○운 일가의 가계도는 <가계도 2>와 같다.

그런데 이들 ○운 일가는 앞의 ‘화랑’ ○진명 일가와 달리 다소 복잡한 양상이 발견된다.159)무업 세습 양상도 그러하지만, 본관(羅州→慶州·槐州·完山 ; 文化→昌原·居昌 등), 성(崔→羅 ; 兪→柳·劉 등), 이름 등도 수시로 바뀌었다. 우선 1717년도(숙종 43) 호적에서 호수(戶首)로 등장하는 ○운의 두 아들 가소리(44세)와 아기(岳只, 31세)가 무업과 관련이 없는 ‘취반군(炊飯軍)’을 직역으로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세 딸 모두 역리(驛吏)·수보(水保)·보보(步保) 등을 직역으로 지닌 자와 혼인하여 역시 무업과 무관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확대보기
<가계도 2> ‘무공 양인’ ○운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가계도 2> ‘무공 양인’ ○운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팝업창 닫기

그렇지만 1720년도(숙종 46) 호적에서는 가소리와 아기 모두 ‘취타수’로 나타났다. 1717년 이전에 이들 형제가 어떤 직역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720년도 호적에 따르면 이들이 뒤늦게 가업을 이어 무당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시집간 세 딸의 가족에게서는 무업에 종사한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1729년도(영조 5) 호적을 보면 가소리는 사망한 듯하고, 아기는 계속 ‘취타수’를 직역으로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가소리의 아들 필재(28세)가 호수로 등재되면서 직역을 ‘병영 모군(兵營募軍)’으로 기재하였다. 그리고 출가한 가소리 딸 가족도 확인되는데, 남편은 ‘시장(匙匠)’ 즉, 숟가락이나 열쇠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필재는 1732년도(영조 8) 호적까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전히 병영 모군을 직역으로 기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필재의 무업 세습 양상은 살필 수 없었다.

아기는 1732년 이후 취타수 대신 ‘무학(武學)’을 직역으로 기재하게 된다. 따라서 ○운 일가의 무업 세습은 아들 대에서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긴 것으로 보였으나, 1759년도(영조 35) 호적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가소리의 또 다른 아들 석지(57세)와 득선(40세)이 나타나면서 무업이 세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형제가 ‘순영 무부’와 ‘무부’를 직역으로 기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석지는 1762년(영조 38)까지, 그리고 득선은 1789년(정조 13)까지 호적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변함없이 ‘무부’를 직역으로 지니고 있었다. 다만, 득선에게 장성한 아들이 세 명(수삼·수정·귀금)이나 있었으나, 모두 직역을 기재하지 않아 무업 세습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한편, 처음에 언급하였듯이 1762년도 호적을 통하여 석지의 아들 삼이는 무업을 세습하였음이 확인되었으나 이후 호적에서는 삼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소리의 사위는 ○운의 여손 중에 유일하게 무업에 종사한 인물로 나타난다. 그의 가계도는 <가계도 2-1>과 같다.

확대보기
<가계도 2-1> 가소리의 사위 ○한우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가계도 2-1> 가소리의 사위 ○한우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팝업창 닫기

사위 ○한우(36세)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729년도 호적인데, 이때 그 의 직역은 ‘시장’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운의 다른 여손과 마찬가지로 무업과 무관한 생활을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1735년도 호적에도 ○한우는 숟가락(또는 열쇠)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1759년도(영조 35) 호적에서 ○한우(66세)의 직역이 갑자기 ‘무부’로 바뀌었다. 이전까지 숟가락 만드는 일밖에 몰랐을 그가 느지막이 남무가 된 데에는 호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면사(裏面史)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혹시 무업을 배워 소위 전업(轉業)을 한 것일까? 사정이야 여하튼 ○한우가 무당 집안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점과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바로 무당 집단의 질긴 인연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 이해될 뿐이다.

한편, 1759년도 호적에는 ○한우의 아들 덕기(25세) 역시 ‘무부’를 직역으로 하여 독립 가호를 이루고 있다. 이후 덕기는 1789년도 호적까지 발견되는데, 계속 직역을 ‘무부’로 기재하였다.

1678년도(숙종 4) 호적에서 처음 확인된 ‘무공 양인’ ○운 일가의 110여 년간에 걸친 무업 세습 양상을 살펴보면, 자손 중 무업을 이어 나간 자도 있으나, 일부는 무업을 버리고 다른 생계를 찾아 나가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손의 대부분은 무업과 무관한 집안과 결혼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즉 대대로 무업은 세습되고 있었지만, 강고한 세습성은 발견할 수 없는 사례라 하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