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4. 사례로 본 무당의 생활 모습
  • ‘취타수’ ○어선 일가의 사례
임학성

1717년(숙종 43) 호적에서 ‘사노 병영 취타수(私奴兵營吹打手)’의 신분과 직역을 지니고 있었던 남무 ○어선은 손자인 ‘무부’ 평상과 현손인 ‘무부’ 철경이 호수로 등재된 1828년(순조 28) 호적까지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들 일가의 무업 세습 양상은 110여 년 동안 파악이 가능하다.

1717년 호적을 보면, ○어선(34세)이 사비 신분인 해임(34세)과 혼인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자녀 모두 어머니 신분을 따라 사노와 사비로 신분이 귀속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노와 사비 신분으로는 무업을 세습하거나 영위해 나가는 것이 평민 신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이들은 ○진명 일가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양녀를 처로 취한다든가 속량 면천(贖良免賤) 등의 방법을 통하여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려 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국가나 사회 공동체로부터 천대를 받았으나, 무업(巫業)은 일정 규모의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적합한 직종이었음이 분명하다. 정부와 무당 간의 무세 징수와 납부 체제가 커다란 마찰 없이 조선 말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160)임학성, 「조선시대 무세 제도와 그 실태」, 『역사 민속학』 3, 한국 역사 민속학회, 1993. 이면에는 바로 이와 같은 사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1750년(영조 26) 호적을 보면, 1735년(영조 11)까지 사비로 기재되던 ○어선의 처 해임이 ‘○조이(召史)’로 기재되어 나타난다. 아울러 본관도 기재하고 있었다. 즉 ‘양녀(良女)’로 신분을 상승시킨 것이다. ○어선 역시 ‘사노’를 떼어 버리고 ‘병영 취타수’로만 기재되었다. 이는 아들들의 직역 기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735년까지 ‘사노’로 기재되다가 1750년부터는 직역상에 ‘사노’ 기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들 가족이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상전에게 속전(贖錢)을 바쳤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 가능성은 ○어선의 막내아들 선공에게서 엿볼 수 있다. 즉, 1735년까지 향교(鄕校) 소속의 ‘교노(校奴)’로 있다가 1750년에 속량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선 후손의 무업 세습 양상을 살펴보자.

○어선 부부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선학만이 부친의 ‘취타수’역을 승계하다가 18세기 중엽부터 ‘무부’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처럼 『단성 호적』에는 취타수의 자제가 후에 ‘무부’로 나타나거나, 무당 집안의 자제 가운데 상당수가 ‘무부’ 기재 이전에 ‘취타수’라 기재한 것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취타수라는 예능직 군역은 성격상 무당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선 일가의 5대에 걸친 무업 세습 양상은 바로 선학의 후손들, 곧 아들 상우와 평상, 손자 대총, 증손자 철경 등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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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4> ‘취타수’ ○어선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가계도 4> ‘취타수’ ○어선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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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들 선공은 향교에 소속된 교노(鄕校仰屬奴)로 지내다가 1750년 호적에서 ‘속량(贖良)’으로 나타난다. 곧 18세기 중엽에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선공의 처(○조이) 역시 1750년 호적에서 ‘속량’으로 나타난다. 호적에 기재된 처의 4조를 살펴보면, 바로 ○진명 집안의 딸이었 다. 단성현 내 최대 무당 집안의 사위였다는 점에서 속량 이후 선공의 무업 세습 여부가 주목되었으나,161)○선공 부부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처가의 노력, 특히 경제적 도움도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쉽게도 이후 호적에서는 그의 가족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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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4-1> 선공 처 ○조이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가계도 4-1> 선공 처 ○조이 일가의 가계 및 무업 세습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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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어선의 막내아들 선재는 ‘사노’로 나타난다. 사비였던 모친의 신분을 쫓았던 것 같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은 이들 일가에게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노비 신분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무업 세습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선재 역시 1735년까지 ‘사노’로 기재되다가 1750년 호적에서는 ‘사노’가 사라지고 ‘순영 군뢰’로만 기재되고 있었다.

‘군뢰’ 역시 취타수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무당이나 그 자제에게 부과된 군역의 일종이었다. 실제 단성현뿐만 아니라 대구·언양 등의 호적에서 무당의 자제가 ‘(순영) 무부 군뢰’라는 직역을 지닌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선재 역시 무업을 세습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하겠으나, 그의 가족이 1750년 무렵 진주로 이사하였기에 더 이상 그의 모습을 추적할 수 없다.

끝으로, 선학의 아들 중 득관은 ‘일수(日守)’, ‘사령(使令)’ 등의 직역을 지니고 있다. 일수와 사령은 모두 지방 관아에 딸린 하인 및 심부름꾼을 일컫는 호칭이기에 언뜻 보기에는 무업과는 전혀 무관한 직역이다. 그러나 경 상도 언양현(彦陽縣)의 18세기 말 호적 대장에서 확인되는 사례를 보면, 무당 및 그 자제가 경우에 따라 관아의 하인 역할도 수행하였음이 확인된다.

『언양 호적』, 1795년 상북면 송북리 13통 3호

: 所書員(소서원) ○之平(지평)(29세). 妻(처) ○召史(소사)(29세)

『언양 호적』, 1798년 상북면 남부리 12통 3호

: 巫夫(무부) ○之平(32세). 妻 ○召史(32세)

『언양 호적』, 1798년 상북면 송북리 10통 3호

: 鰥夫(환부) 巫夫 ○德三(덕삼)(64세). 子(자) 使令(사령) 元己(원기)(22세)

즉 『언양 호적』을 보면 ‘무부’인 ○지평이 ‘소서원(所書員, 향소의 서원)’이라는 직역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798년 호적에 ‘무부’인 ○덕삼의 아들 원기(元己)가 ‘사령(使令)’이라는 직역을 각기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무당 또는 무당의 자식이 관아의 하급 일을 맡기도 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무당이 갖는 또 다른 양상을 엿보게 해주는 사례가 되겠다.162)조선시대에는 기생(妓生)이 사령 집안에서 나왔고, 또 기생의 아들이 사령과 같은 하급 관속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손태도, 앞의 책, 147쪽의 주 252). 따라서 무당의 경우도 그 양상이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이 구체화되려면 좀 더 많은 사례가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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