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경상도 단성현 호적에 나타난 무당의 세습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세습무(世襲巫)들은 이른바 ‘단골판’이라 하여 일정한 지역에 대한 무업권(巫業權)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무당들 사이에서 매매가 될 정도로 철저하게 그 권리가 지켜졌다고 한다.164)유동식,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 연세 대학교 출판부, 1992, 280∼281쪽 ; 박일영, 「무교의 공동체관에 대한 연구」, 『종교 연구』 23, 한국 종교학회, 2001, 27∼28쪽 ; 이경엽, 앞의 글, 192∼195쪽 ; 이용범, 「근현대 한국 무속의 역사적 변화」, 『종교 연구』 30, 한국 종교학회, 2003, 144∼148쪽.
또한 단골판을 형성한 ‘단골무당’은 일정한 수의 사람이나 가문과 지속적인 관계 즉, 이른바 ‘단골’ 관계를 맺고 있었다.165)무당이 특정 사람·가문과 ‘단골’ 관계를 맺은 사례는 16세기 사족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문건 집안은 무녀 추월(秋月) 및 점술인 김자수(金自粹) 등과 단골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이복규, 「조선 전기 사대부가의 무속-이문건의 『묵재일기』를 중심으로-」, 『한국 민속학보』 9, 한국 민속 학회, 1998 ; 최선혜, 「조선 전기 재지 품관의 제사와 기복 민속 의식」, 『조선시대사 학보』 29, 조선시대사 학회, 2004 등 참조). 그리고 단골무당은 단골 관계를 맺은 가정에서 행하는 정기적인 의례(굿)뿐 아니라, 출산·혼인·치병·사망·우환 등과 같은 일이 생겼을 때도 그 가정을 위해 종교적 의례를 행하였다.
단성현 호적을 통하여 단골판의 형성 여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사례로 언급한 ‘화랑’ ○진명 일가는 1678년(숙종 4) ○진명이 도산면 고읍대촌에서 거주한 이래, 그 후손들은 3개 면(북동·생비량·신등)을 제외한 5개 면, 11개 촌에서 거주하고 있다. 즉, 무당 ○진명 일가의 거주 지역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역 시기 |
원당면 | 현내면 | 북동면 | 오동면 | 도산면 | 생비량면 | 신등면 | 법물야면 | ||
1678 | - | - | - | - | 고읍대(진명) | - | - | - | ||
1717 | - | 대방(호걸) | - | 상정태<신> (명학) |
- | - | - | - | ||
1732 | 사산<가> (학창) |
대방 (원창·선창) |
- | - | 도전<신>(명학) | - | - | - | ||
1735 | - | 대방<가> (원창) |
- | - | 도전<신>(명학) | - | - | 이교<신> (귀철) |
||
1759 | - | 남산<별> (장원) |
- | - | 원산서변(귀철) | - | - | 가술 (학창) |
율현 (귀화) |
|
1762 | - | 남산(장원) | - | - | 원산서변 (귀철) |
오리동 (선창) |
- | - | 가술 (학창) |
율현 (귀화) |
1783 | - | 대방(장원) | - | - | - | - | - | - | ||
1786 | - | 대방(장원) | - | - | - | - | - | |||
1825 | - | 대방(춘화) | - | - | - | - | - | |||
✽비고 : ① 표기 내용 ‘고읍대(진명)’에서 고읍대는 촌명이며, 진명은 호수를 말함. ② <신>은 신호(新戶), <가>은 가호(加戶), 그리고 <별>은 별호(別戶)로 등재된 것을 뜻함. |
특히, 이들 일가의 거주 양태에서 주목되는 점은 ○진명의 아들 호걸이 1678∼1717년 사이에 현내면 대방촌에 정착한 이래 19세기까지 후손들 가운데 일부는 거의 이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진명의 후손들이 단성현 내 여러 지역에 분산 거주하면서 무업을 행하는 데 있어서 대방촌이 일종의 ‘본부(本堂)’으로서의 기능과 구실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또한, 여러 지역에 나뉘어 거주하는 이들 일가는 무의(巫儀, 굿)를 행할 때 협력하였을 것이다.
한편, 다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부모와 동거하던 아들 부부가 새로운 촌락으로 분가하고 이사해 나가는 양상은 바로 부모로부터 무업을 전습(傳習)한 아들 무당 부부가 독자적인 ‘단골판’을 이루어 나갔음을 엿보게 해준다. 즉, 세습무의 경우 ‘성무(成巫) → 분가 → 이사 → 단골판 형성’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1717년 : 현내면 대방촌에서 부친과 동거하던 사노 명학(35세), 무녀 예정(33세) 부부가 오동면 상정태촌으로 이사함.
1729년 : 현내면 대방촌에서 부친과 동거하던 취타수 원창(45세), ○조이(35세) 부부가 법물야면 이교촌으로 이사함.
1732년 : 현내면 대방촌에서 부친과 동거하던 취타수 학창(33세), 무녀 건리개(29세) 부부가 원당면 사산촌으로 이사함.
1735년 : 현내면 대방촌에서 부친과 동거하던 취타수 귀철(22세), ○조이(25세) 부부가 법물야면 이교촌으로 이사함.
1759년 : 도산면 원산서변촌에서 부친과 동거하던 무부 귀배(26세), ○조이(26세) 부부가 법물야면 율현촌으로 이사함.
1762년 : 도산면 오리동촌에서 부친과 동거하던 무부 장원(32세), 무녀 ○조이(29세) 부부가 현내면 남산촌으로 이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