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2장 조선시대 무당의 생활 모습
  • 4. 사례로 본 무당의 생활 모습
  • 무당의 생활 형편
임학성

조선시대 무당들의 생활 형편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기로 하자. 우선 무당은 가장 천대받는 계층 집단이었기에 사회적인 형편은 거의 최저 수준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경제적 형편은 사회적 형편과는 반드시 들어맞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굿을 하거나 점을 쳐주는 등의 무업을 행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代價)를 받았을 뿐 아니라, ‘단골판’을 이룬 무당은 이것을 다른 무당에게 팔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무당이 조선시대 500년 동안 ‘무세(巫稅)’라는 세금을 낼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러한 실정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물론 무당도 그 능력이 각양각색이듯이 그에 따른 수입 또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특히 궁중에 출입하는 무당이거나, 양반가에 ‘단골’로 출입하는 무당은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차이 때문인지 지방 관아에서는 무세를 거둘 때 차등을 두기도 하였다. 즉, 경상도 신녕(新寧)에서는 무녀를 상·중·하로 나누어 각기 3냥·2냥·1냥씩을 징수하였으며, 전라도 함평(咸平)에서는 무녀를 원(元)무녀와 반(半)무녀로 구분하여 각기 2냥 2전과 1냥 1전씩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전라도 흥양(興陽)에서는 원무녀와 가(假)무녀로 구분하여 각기 3냥과 1냥 5전씩을 징수한 사례들도 나타난다.166)임학성, 「조선시대의 무세 제도와 그 실태」, 『역사 민속학』 3, 한국 역사 민속학회, 1993, 105쪽.

현재 조선시대 무당이 대략 어느 정도의 수입을 올렸는지, 그래서 그들의 경제 수준이 어떠하였는지를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호적과 ‘가호안(家戶案)’ 등의 자료에서 확인되는 내용을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먼저 호적에 기재된 내용을 살펴보자. 경상도의 『언양현(彦陽縣) 호적』을 보면 다음과 같은 사례가 확인된다.

『언양 호적』, 1798년 삼동면 왕방리 8통 1호

: 禁衛軍(금위군) 金致云(김치운)(23세). 新率挾人(신솔협인) 巫夫(무부) ○守永(수영)(42세). 挾人(협인) 妻(처) 巫女(무녀) ○召史(소사)(42세)

『언양 호적』, 1813년 삼동면 왕방리 3통 1호

: 禁衛軍 金致雲(김치운)(40세). 挾人 巫夫 ○守永(수영)(57세). 挾人 妻 ○召史(58세). 挾人 子 岳只(악지)(12세). 挾人 女 召史(8세)

18세기 말 경상도 언양현에 거주한 무당 부부(무부(巫夫)와 무녀(巫女))의 호적 자료이다. 이들은 ‘협인(挾人)’으로 기재되어 자신의 집이 아닌 타인의 집에 끼어 살고 있었다. 특히 1798년 처음 협거(挾居)한 이래 십 수 년이 지난 1813년까지 그 생활을 계속 지속시키고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집을 가지지 못할 만큼 경제 사정이 좋지 못하였던 무당 가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

다음 사례는 ‘가호안’ 자료로 1895년(고종 32) 4월 전라도 구례군 토지면(吐旨面)에서 작성한 『을미 4월 일 토지면가좌책(乙未四月日 吐旨面家座冊)』이다. 이 자료를 통해 가옥(형태와 크기)·전답(소유 또는 병작)·소유 농우(農牛)·솥(鼎) 등에 관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다. 자료에서 확인된 무당 가호는 총 8호(戶)였다.

이들 무당의 가옥 형태는 초가(草家) 1호, 초사(草舍) 4호, 초막(草幕) 3호 등이었으며, 크기는 모두 2칸 또는 3칸이었다. 초막 1호는 칸 수를 기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쇠솥(鐵鼎)을 소유한 무당 가호는 2호였으며, 토기솥(土鼎)을 소유한 가호는 3호였다. 나머지 3호는 솥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지 않았는데, 모두 초막에서 거주한 자들이었다. 제대로 가옥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이른바 ‘막집’에서 생활하였기에 솥도 지니지 못하고 아궁이 시설도 갖추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를 통해 보면, 토지면에서 거주한 무당들은 일반민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하거나 비슷한 경제 형편 에 처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표> 1895년 구례 토지면의 무당 가호
동리 직역 성명 나이 가옥 비고
용두 무부 ○기운(己云) 50 초사(草舍) 3칸 철정(鐵鼎) 1좌 -
원내 무부 ○희도(希道) 58 초가(草家) 3칸 철정 2좌 병답(竝畓) 8두락(斗落), 농우(農牛) 1척(隻)
단산 무부 ○태성(太成) 29 초사 3칸 토정(土鼎) 2좌 무농(無農)
내죽 무녀 ○소사(召史) 60 초사 2칸 토정 2좌 -
외동 무부 ○창갑(昌甲) 21 초사 3칸 토정 2좌 -
평도 무부 ○영도(永道) 42 초막(草幕) 2칸 없음 -
무부 ○흥백(興白) 56 초막 2칸 없음 -
무부 ○태진(泰振) 32 초막 없음 -

그렇지만, 일반민보다 경제 형편이 나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무당도 있다. 용두리에 거주한 무부 ○희도(58세)의 경우가 되겠는데, 그는 초가 3칸에 쇠솥 2좌, 그리고 비록 소작(竝畓)이지만 8마지기(斗落只)의 논과 농우(農牛) 1마리(隻)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1789년(정조 13) 7월 20일자 『일성록(日省錄)』에 ‘재인(才人)’과 ‘취수(吹手)’의 가옥 사정을 알려주는 내용이 나온다. 정조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을 수원(水原)으로 옮기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된 244호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가운데 재인 5호와 취수 6호가 포함된 것이다.

먼저, 5명의 재인이 거주한 가옥 형태는 모두 초가였으며, 그 크기는 3∼6.5칸까지 분포하여 평균 4.80칸을 나타냈다. 이주 대상 244호의 전체 평균이 7.35칸이었던 점에 비하면 18세기 말엽 수원에 거주하였던 재인 가옥은 상대적으로 그 크기가 다소 작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 6명의 취수가 거주한 가옥 형태 또한 모두 초가였으며, 그 크기 는 3∼5.5칸까지 분포하고 있었다. 평균 칸수는 재인의 경우보다 1칸 정도가 작은 3.83칸으로 나타났다.

<표> 1789년 수원 거주 재인·취수의 가옥 실상
직역 성명 가옥 직역 성명 가옥
재인 ○춘복(春福) 초가 4칸 취수 ○노미(老味) 초가 4칸
○윤기(允己) 초가 6칸 ○귀봉(貴奉) 초가 3칸
○일태(一太) 초가 3칸 ○태노미(太老味) 초가 5칸 반
○사읍사리(沙邑士里) 초가 4칸 반 ○금산(今山) 초가 3칸 반
○덕흥(德興) 초가 6칸 반 ○부흥(夫興) 초가 3칸
평균   4.80칸 ○복지(卜只) 초가 4칸
      평균   3.83칸

결국, 조선시대에 살았던 무당들의 일반적인 경제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설령 능력이 있거나 기회가 닿아 일반민을 능가하는 부를 축적한 무당도 일부 있었을 것이나, 예나 지금이나 그 부를 관리하고 경영할 재주가 없다는 점이 무당의 한계가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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