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2. 광대 집단의 존재와 역사를 알아보며
  • 광대 집단의 성립과 역사
손태도

대규모의 광대들이 동원되는 관청의 대표적 행사는 산대희라 할 수 있다. 거대한 산 모양의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위와 아래에서 이른바 ‘가무백희’를 벌이는 이러한 행사에는 ‘수백 명’의 광대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산대희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은 신라 진흥왕 때의 팔관회 기사로 볼 수 있다.

전사(戰死)한 사졸(士卒)들을 위해 궁궐 밖의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베풀었는데, 7일간 하였다.167)『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진흥왕 33년 10월 20일.

신라 진흥왕 때의 팔관회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고려 초의 기사로 신라에서 해마다 이루어지고 있던 팔관회에서의 산대희를 짐작할 수 있다.

태조 원년 11월에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전주(前主)는 매해 중동(仲冬) 에 크게 팔관회를 설하여 복을 빌었사오니 빌건대 그 제도를 따르소서.”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드디어 구정(毬庭)에 윤등(輪燈) 일좌(一座)를 두고 향등(香燈)을 사방에 나열하였으며, 또 채붕(綵棚) 둘을 맺었는데 각각 높이가 다섯 길이 넘고, 백희가무를 앞에서 보였는데 그 사선악부(四仙樂府)와 용(龍), 봉(鳳), 상(象), 마(馬), 거(車), 선(船)은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 백관이 포홀(抱笏)로 행례(行禮)하니 보는 자가 도성(都城)을 기울였고, 왕이 위봉루에 출어(出御)하여 이를 보았으며, 해마다 상례(常禮)로 하였다.168)『고려사』 권23, 지(志)23, 예11.

신라의 팔관회는 고려에 이어졌으며, 고려의 팔관회에서는 높이가 5장(丈, 15m) 정도 되는 좌우 채붕, 곧 산대를 설치하고 그 앞에서 가무백희를 벌였다. 그리고 이것을 매년 상례로 하였다. 또 고려 태조가 훈요 10조에서, “짐(朕)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에 있다.”169)『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6년. 고 하였듯이 정월에 열린 연등회에서도 역시 이러한 산대희가 수반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다음과 같은 의례 규정에 잘 나타나 있다.

소회(小會)…… 협률랑(協律郞)이 휘(麾)를 들어 태악령(太樂令)이 백희협장(百戲協場)을 판주(板奏)하면 백희가 함께 행해지고, 잠시 후 협률랑이 휘를 내리면 백희가 모두 퇴장한다. : 중동팔관회의(仲冬八關會儀)170)『고려사』 권69, 지23, 예11, 가례잡의(嘉禮雜儀).

소회일(小會日)…… 다음 백희잡기(百戲雜伎)가 차례로 전정(殿庭)에 들어가 연달아 연기(演技)하기를 마치면 물러나 나간다. :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171)『고려사』 권69, 지23, 예11, 가례잡의.

국가적 축제 의식으로서의 산대희는 국내의 큰 경사 외에 중국 사신이 올 때도 행해졌다. 이러한 가무백희의 광대들에 대해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서 “백희를 하는 수백 명은 듣건대 매우 민첩하다 한다.”172)서긍(徐兢), 『고려도경(高麗圖經)』 권40, 악률(樂律). 라는 기록을 남겼다.

고려시대에 이미 수백 명의 광대가 이러한 산대희에 동원되고 있었던 것이다. 1040년(정종 6)에는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던 중국의 연말 나례(儺禮) 의식에도 가무백희가 동원되고는 하였다. 연말 나례는 한 해가 오기 전에 섣달 그믐날께 잡귀와 잡신들을 몰아내고 새해를 맞으려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의례의 하나이지만, 연말의 축제 분위기 속에 원래의 구나적(驅儺的) 요소 외에 성대한 가무백희도 이루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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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도 중의 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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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시대에는 958년(광종 9)에 과거제가 실시된 이래 과거 급제자를 축하하고자 궁궐에서의 은영연(恩榮宴), 길거리에서의 유가(遊街), 지방 관아에서의 영친의(榮親儀) 등이 베풀어졌는데, 이러한 행사에도 광대들이 동원되었다.

새로 급제한 한 사람이 주(州)에 들어오는 날, 그 주의 주관(州官)은 먼저 장교(將校)와 영인(伶人)들을 주의 지경(地境) 근처까지 보낸 후, 주관도 주의 아전들을 대동하고 5리정(五里亭)까지 나가…… 급제자의 부모도 주관과 급제자를 따라 관사(館舍)의 남청(南廳)에 간다. …… 주관이 친히 급제자의 부모에게 술을 올리고 주식(酒食)을 올리며 악(樂)을 주(奏)하고 잡기(雜技)를 베푼다. 파연(罷宴)에 미쳐 새로 급제한 사람이 감사의 재배(再拜)를 한다.173)『고려사』 권68, 지22, 예10, 신급제 진사 영친의(新及第進士榮親儀).

급제자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면 그 주의 지경에까지 영인, 곧 악공들을 보내 사실상 거기서부터 다시 유가를 하게 하고, 수령도 급제자를 맞이해 급제자와 급제자의 부모를 관아에 오게 하여 영친의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러한 의식에 ‘잡기’가 동원된 것이다. 여기에서의 ‘잡기’는 광대 놀음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적어도 고려시대 이래로 광대들을 동원하는 관청의 공식적인 행사가 지속적으로 있었기에,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광대의 역(役)을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이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매년 하는 것이고 고려 정종(923∼949) 이후에는 여기에 연말 나례희까지 추가되었다. 그렇게 많은 광대가 동원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급제자의 행사도 958년(광종 9) 이래 3년마다 정기적으로 있었다. 더구나 이들 행사는 팔관회나 연등희 등에서의 산대희처럼 때로는 수백 명의 광대가 동원되는 큰 규모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사들을 보다 원만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치러 내려면 광대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광대’라는 하나의 신분 집단이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광대 집단으로 알려진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음의 기록과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악공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대개 우리들이 맡은 것은 나라에서 칙사 시(勅使時)에 조산위희(造山爲戲)하는 것이며 저 사람들에게 영합하여 청(廳)에 든 후 순번대로 관가의 공역(公役)에 응하는 것이며, 사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섬겨 자신을 살찌우니…… 갑진 이후에 조산의 규칙이 깨지자 우리 무리들도 곧 한산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여전히 관가의 공역에 응하고, 또 청 내에 규칙을 세웠으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하고 태만하겠는가?174)경기도 창재 도청안(京畿道唱才都廳案, 1836)  ; 赤松智城·秋葉隆, 심우성 옮김, 『조선 무속의 연구』 상·하, 동문선, 1937·1938 : 1991, 하, 282쪽.

경기도의 무부들이 가지고 있던 1830년대의 문서에서 ‘칙사 시에 조산위희’는 중앙의 산대희에 광대로 참가하는 것을 말하고, ‘순번대로 관가의 공역에 응하는 것’은 평상시에 악공으로 관청에 동원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1950년대 경기 이북의 재인촌에 대한 현장 조사 기록으로 광대 혹은 재인인 이들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악공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광대’는 가창리 ‘재인’ 등이다. …… 이곳이 현재 천덕리의 한 개 부락인 가창이다. 협동조합 관리 위원장의 소개로 곧 김선진, 연상순, 방순근 등 환갑 전후가 된 노인들을 만났다. 이분들은 모두가 세업(世業)을 전승한 우수한 악공들로서 탈놀이의 ‘육재비(피리 둘, 북, 장구, 해금, 저, 대)’를 담당하여 왔다.175)김일출, 「봉산 탈놀이의 옛모습을 찾아서」, 『문화 유산』 3, 과학원 출판사, 1957, 61∼63쪽.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은 세습 무당 집안의 남자들로 민간에서 활동할 때는 악공, 재인, 광대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반면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은 재인촌 혹은 광대촌이라 불린 특수 마을들에서 악공, 재인, 광대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전자는 무속 집안의 사람이고 후자는 무속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악공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하면서 광대의 역할도 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공 집단과 광대 집단의 관계를 밝힐 수 있다면, 광대 집단에 대한 좀 더 제도적인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악공 집단은 관청에서 항상 필요한 집단이기에, 이미 고려 중기부터 신분 세습의 제도를 마련해 놓았다. 이른바 악공의 아들은 악공이 되는 악공 집단의 세습제이다. 곧 “악공으로서 세 아들 또는 네 아들이 있는 자는 그 한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계승한다.”176)『고려사』 권75, 지31, 선거(選擧)3, 문종 7년 10월. 라는 조항이 그것이다.

그러면 고려 중기에 세습제가 마련된 악공 집단과 광대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중국 『대명률』에 있는 한 규정 속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무릇 악인(樂人)이 잡극(雜劇), 희문(戲文)을 만들어 할 때, 역대 제왕, 후비(后妃), 충신, 열사, 선성(先聖), 선현(先賢)의 신상(神像)으로 분장하면 장 100에 처한다. 관민(官民)의 가(家)에서 용납해 분장하게 한 자도 죄가 같다. 신선도(神仙道)로 분장하거나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 순손(順孫)으로 분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선(善)하게 하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177)『대명률(大明律)』, 형률(刑律), 잡범(雜犯), 반주잡극(搬做雜劇).

이것은 악인이 잡극, 희문과 같은 연극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대명률』은 비록 중국의 법전이지만, 조선 건국 초에 태조 즉위 교서에서 “공사 범죄의 판결은 『대명률』을 적용한다.”는 원칙을 발표한 이래 사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현행법·보통법으로 적용한 것인 만큼 우리나라의 생활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법전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명률』에 악인, 곧 악공이 잡극, 희문 등과 같은 연극을 하는 것에 대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조선의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1395)는 다음과 같다.

무릇 악공들이 잡극을 만들어 하되, 역대 제왕, 후비, 충신, 열사, 선성, 선현의 신상으로 장식하여 희롱하면 장 100이다. 관민의 가에서 짐짓 금지하지 않고 시킨 자도 죄가 같다. 신선도의 상이나 의부, 절부, 효자, 순손으로 장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선하게 하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178)『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형률, 잡범, 반주잡극.

역시 악공이 잡극과 같은 연극, 곧 광대 놀음을 하는 것을 적어 놓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명률』에도 나와 있는, 악공이 광대의 역할도 겸하는 중국의 제도를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악공이 광대의 역할도 겸하게 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사실 악공 집단은 관청에서 항상 필요로 하지만, 광대는 유사시에만 필요하기에, 이미 확보된 악공 집단에게 광대의 역도 겸하게 하는 것은 사실 관(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식이었을 것이다.

악공이 광대의 역할도 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고려사』의 기사들을 이해하게 해 준다.

상춘정에서 잔치를 하는데 영관(伶官)들로 하여금 악곡을 연주하고 잡희를 하게 하였다.179)『고려사』 권17, 세가17, 의종 1년 3월 을묘.

국왕이 몽고에서 돌아오는 길에…… 3품 이상의 관원들은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으며, 팔방상(八坊廂)과 양부(兩部)는 악곡을 연주하고 백희를 다투어 바쳤다. 왕은 채붕 앞에 연(輦)을 멈추고 음악을 보다가 저물어 환궁하였다.180)『고려사』 권27, 세가27, 원종 5년 12월 임술.

여기서 ‘영관’은 악기만 연주하는 다른 용례도 있어181)『고려사』 권34, 세가34, 충숙왕 즉위년 10월 병자. “영관으로 하여금 악곡을 연주하게 하고 선승(禪僧) 충탄(冲坦)과 교승(敎僧) 효정(孝楨)을 맞아다가 설법하게 한 연후에……” 원래 악곡을 연주하는 사람이고, ‘팔방상’도 ‘팔방상 공인(八坊廂工人)’182)『고려사』 권129, 열전42, 최충헌. “팔방상 공인(工人) 1350여 명이 모두 성대하게 차려입고 궁정에 들어와 곡을 연주하였다.”이란 용례로 보아 악공이다. 이들은 모두 음악을 담당하는 사람들인데, 여기서는 악곡 연주 외에도 광대처럼 ‘잡희’나 ‘백희’를 바쳤다.

조선시대의 기록은 직접적으로 악공들이 광대담(廣大談)과 창우(倡優)의 여러 놀음을 하는 것을 말해 준다.

악공을 시켜 북, 피리, 필률(觱篥)을 연주하게 하니 노래를 불러 서로 맞추었고, 동자(童子)는 채색 적삼을 입고 마주 서서 춤을 추는데, 춤추는 것이 궁녀와 같았다. …… 악곡 연주가 끝나자 여러 악공이 북을 치며 광대담과 창우의 여러 놀음을 하니 보는 사람들이 즉각 웃으며 절도(絶倒)하자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183)신유한(申維翰), 『해유록(海遊錄)』(1718). 민족 문화 추진회, 『해행총재(海行摠載)』 Ⅰ, 1974, 418쪽, 55쪽.

또 근대 무렵 서양인의 기록도 악공이 광대의 역할도 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화창한 아침, 우리는 유럽식으로 지내는 데 필요한 짐들을 꾸려 하인에게 들리고, 몇몇 기생들과 악사들, 광대들을 대동하고 몇 필의 말과 더불어 길을 떠났다. …… 악사들이 앞에서 원을 그리고 앉아 저마다 악기들을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잠시 후면 배우 역할도 겸할 터이다. …… 곧이어 연극이 이어졌다.

조선의 연극은 몇몇 특징을 모아 놓은 장면들로만 이루어진다. 거의 다 한 사람의 배우가 내뱉는 독백들로 채워지는데, 간혹 한두 명 더 조연으로 나서는 경우에도 오로지 하나의 별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어둠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184)샤를 바라, 성귀수 옮김, ‘조선 종단기(1888∼1889)’, 『조선 기행』, 눈빛, 2001, 168∼170쪽.

이렇게 첫째, 『대명률』에도 나와 있듯 중국에서 악공이 광대의 역할도 한 것을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둘째, 우리나라 문헌에도 악공이 광대의 역할을 한 기록이 많다는 것, 셋째, 오늘날 광대 집단으로 알려진 경기 이남의 화랑이 집단과 경기 이북의 재인촌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악공 집단이기도 하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도 악공 집단이 광대 집단의 역을 담당하였다는 것은 이제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악공 집단은 고려 중기부터 이미 세습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던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악공 집단이 광대 집단의 역도 겸하므로 사실상 이 규정은 광대 집단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악공 집단은 고려 중기부터 이미 세습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따라 광대 집단도 적어도 이때부터 세습 제도가 마련되었다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전대의 팔관회나 연등회는 폐지되었지만,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해마다 열린 궁궐의 나례희에 전대의 가무백희 전통이 이어졌다. 매년 있었던 이 궁궐의 나례희에 전대의 가무백희가 집결하는 양상이 있었던 것이다. 또 중국 사신이 오거나 국내에 큰 경사가 있을 때 대규모로 열리는 산대희에도 이러한 전대의 가무백희가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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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궁궐의 나례희나 국내의 큰 경사와 관계된 국내용 산대희는 대체로 열리지 않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국가의 재정이 많이 피폐하였고, 여기에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즉위하던 해(年)에 “침향산(沈香山)을 도성의 네거리에 끌고 나가 불을 질러 버렸다.”185)『인조실록』 권1, 인조 원년 3월 기묘. 광해군 때의 잦은 산대희와 관련되는 기생들의 침향산을 길거리에 내어다 불태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조 이후로 많은 광대가 동원되는 궁궐의 나례희나 국내적인 일과 관계되는 대규모는 산대희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중국 사신이 올 때 여는 산대희는 국제적인 관례상 국내 사정을 이유로 폐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말까지도 공식적으로 이루 어졌어야만 했다. 중국 사신 맞이 산대희는 조선 중기에 600명 정도의 우수한 광대들이 동원되는 대규모의 행사였기에, 이를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광대 집단의 존재는 여전히 국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래서 1824년(순조 24)에도 팔도의 광대 대표들이 중앙에 모여 행방(行房) 회의를 한 뒤 다음과 같은 중앙의 산대희와 관련되는 문서를 작성하여 관의 허가를 받았다.

완문(完文) 등장(等狀) 팔도 재인(八道才人)

오른쪽 완문은 거행하는 일의 갖추어진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팔도 재인 등은 병자년 이후로 칙행(勅行)을 위해 당연히 좌우 산대를 설치하고 거행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 지난 갑진 이후 좌우 산대가 설행되지 않았으나, 전례(前例)에 기록되어 있는 칙행 때에 나누어 맡긴 것들이 있어 각도 재인들이 그 도(道) 소임(所任)의 청에 대기하고 있은즉……186)갑신완문(甲申完文).

조선시대 말까지도 중앙의 산대희를 위해 광대 집단은 여전히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광대 집단을 성립·유지시킨 가장 중요한 문화적 기반은 수백 명 이상의 광대들이 동원된 중앙의 산대희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 광대 집단이 조선시대 말까지도 유지됨으로 인해, 적어도 고려 중기부터 신분 세습 제도가 마련된 이들 광대 집단의 사람들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차 수가 많아졌다. 그 결과 1836년(현종 2)경에는 경기도에만 하더라도 그들의 수가 4만 명이라 하고 있다.

아! 우리 계원 4만 명은 어찌 스스로 서로를 멸시하고 규약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대개 우리들이 맡은 것은 나라에서 중국의 칙사가 올 때 산대희를 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 아! 오직 우리 계원들만도 경기도에 대략 4만 명이니 모두 재인청의 훈계를 따르고 우리의 약속을 좇는다.187)赤松智城·秋葉隆, 심우성 옮김, 앞의 책, 하, 282쪽.

또 동학 농민 운동 때에는 전라도 지역에서는 김개남(金開男), 손화중(孫華仲) 등의 두령들이 재인·광대만으로 편성된 1,000여 명 이상의 부대를 편성하여 이들을 동학군의 주력 부대로 삼을 정도로 광대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처음에 김개남은 도내의 창우(倡優)·재인(才人) 천여 명으로 일 군(一軍)을 만들어 그들을 두터이 예우해서 그들의 사력(死力)을 얻음을 도모하였다. …… 처음에 손화중은 도내의 재인을 뽑아 일포(一布)를 조직하고 홍낙관으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홍낙관은 고창의 재인으로서 손화중에 속하여 그 부하 수천 명이 민첩하고 정예병이었으므로 손화중이 비록 전봉준, 김개남과 정족지세(鼎足之勢)에 있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손화중의 무리가 최강이었다.188)황현(黃玹), 『오하기문(梧下記聞)』, 제3필, 23쪽, 25쪽.

이들 광대 집단은 단순히 민속 예능을 담당하는 기능 집단일 뿐만 아니라 민속 예능을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 집단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신분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1894년 갑오개혁 때, ‘창우’, 곧 ‘광대’라는 그들의 신분에서 공식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역졸(驛卒), 창우, 백정(白丁) 들에게 모두 천인의 신분을 면해 줄 것을 제의 안건으로 올려 모두 승인한 것이다.189)『고종실록』 권31, 고종 31년 7월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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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혼례도병(回婚禮圖屛)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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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집단 사람들은 갑오개혁으로 ‘광대’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이후에도 상당수는 여전히 악기 연주, 판소리, 줄타기 등 그들이 해 온 민속 예능 영역에 머물렀다. 전통 사회에서 천민이 대개 그러하였듯이 광대 집단의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토지를 가지지 못하고 오직 민속 예능 영역 쪽의 일에만 종사하였기에 생계를 유지하려면 같은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신분이 사라진 지 오래된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은 어느 정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각종 기악 연주, 판소리, 줄타기, 전문적 농악 등 종래 광대들이 담당하였던 예능 영역 쪽에 이들 광대 집단의 후손들이 여전히 주도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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