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3. 광대들의 활동을 돌아보며
  • 중앙의 산대희와 나례희
  • 중앙의 산대희
손태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축제 행사는 거대한 산 모양의 구조물을 좌우에 갖추어 놓고 그 위와 아래에서 가무백희를 하는 이른바 산대희라 할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동해(東海)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라는 삼신산(山神山)이 있고, 이를 큰 거북이가 떠받치고 있다고 하는데, 나라가 태평하면 그 거북이가 춤을 춘다고 한다. 산대희는 그렇게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춤을 춘다는 거북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 사회에서 국내에 큰 경사가 있거나 중국 사신이 올 때는 이러한 산대희를 베풀어 당시가 말 그대로 태평성대임을 구가(謳歌)하고자 했다.

산대희는 멀리 신라 진흥왕 때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진흥왕 때에 팔관회를 베풀었는데, 그 법은 매년 중동(仲冬)에 승도(僧徒)를 대궐 뜰에 모으고, 윤등(輪燈) 일좌(一座)를 놓고, 향등을 사방에 벌여 놓으며, 또 두 채붕을 매고, 백희가무를 올려 복을 비는 것이었다.205)『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 산악(散樂).

신라의 팔관회는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태조 왕건은 “전주(前主)는 매해 중동(仲冬)에 크게 팔관회를 설하여 복을 빌었사오니 그 제도를 따르소서.”라는 유사(有司)의 요청에 따라 각각 높이가 다섯 길이 넘는 채붕 둘을 맺어, 백희가무를 앞에서 베풀었는데, 이때 사선악부와 용(龍), 봉(鳳), 상(象), 마(馬), 거(車), 선(船)은 모두 신라의 고사에 따랐다.206)『고려사』 권69, 지23, 예11.

팔관회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들 계통인 천령, 오악, 명산대천, 용신을 즐겁게 하여 복을 비는 것이기에 사실상 팔관회의 가무백희는 원래 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종교적 의식이었다. 여기서 가무백희를 사선악부, 곧 신라 화랑 계통의 사람들이 담당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라 화랑에게는 정치적·군사적 요소 외에도 우리의 고유 신앙을 담당하던 종교적 요소와 가무와 악기 연주를 담당한 예술적 요소도 있었는데, 신라 화랑의 종교적·예술적 요소가 고려시대 팔관회의 가무백희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11월의 팔관회 외에도 정월마다 부처를 위한 연등회를 크게 열었는데, 이때도 산대희를 행하였다. 그리고 연례적인 팔관회와 연등회 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원나라로부터 왕의 귀국, 개선 장군의 환영식 등에도 산대희가 이루어졌다. 당시 산대희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 이색(李穡, 1328∼1396)의 ‘산대잡극(山臺雜劇)’이라는 한시이다.

산대를 맺은 것이 봉래산(蓬萊山)과 같은데 / 山臺結綴似蓬萊

선인(仙人)은 바다를 건너 과일을 드린다 / 獻果仙人海上來

여러 무리들의 북과 징 소리는 땅을 뒤흔들고 / 雜客鼓鉦轟地動

처용의 소맷자락은 바람에 휘날린다 / 處容衫袖逐風廻

솟대 타는 광대는 평지처럼 재주를 부리고 / 長竿倚漢如平地

하늘에 폭발하는 불꽃은 천둥처럼 울린다 / 瀑火衝天似疾雷

태평의 참 모습 그리고자 하나 / 欲寫太平眞氣像

늙은 신하 재주 없음이 부끄럽기만 하네207)이색(李穡), 『목은집(牧隱集)』 권33, 산대잡극(山臺雜劇). 老臣簪筆愧非才

산대의 모양이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과 같다 하였고, 이러한 선산(仙山)과 관계될 수 있는 기생들의 정재(呈才)인 헌선도(獻仙桃), 신라 이래의 처용무, 광대들의 솟대타기, 축제 분위기를 위한 불꽃놀이 등을 읊은 것이다.

조선시대가 되면 다소 불교적 요소가 있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폐지되고, 중국 사신이 오거나 왕의 궐 밖 거둥, 선왕(先王)을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 등 국중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산대희가 열렸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국 사신맞이 산대희라 할 수 있다.

중국 사신이 오게 되면 조선시대에는 사신이 오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던 평양, 황주, 개성 등지에서 산대희를 열었고, 서울의 광화문 앞에서도 더욱 성대한 산대희를 베풀었다. 조선 전기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사람 예겸(倪謙)의 『조선기사(朝鮮紀事)』(1450)에 이러한 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서경인 평양에 이르렀는데 해당 관리가 십여 리 밖에까지 광대 놀음을 보내 마중하였고, 근교에서는 향정(香亭), 용정(龍亭), 의장(儀仗), 고악(鼓樂)을 나열하고 관료들을 거느리고 조서(詔書)를 맞이하였다. …… 백희를 베풀고 주위를 둘러싸서 백수(百獸)들이 춤추는 모양을 하였다. 튼튼하거나 약한 번기(幡旗)나 당기(幢旗)를 든 네 명이 글을 올렸다.

“만국(萬國)이 같이 기뻐 모두 춤을 추는데, 양의(兩儀)는 상대하여 스스로 이루어내도다. 천하가 태평하매 공수(拱手)하여 서 있을 뿐이고, 해동은 무사하여 우물 파고 밭가는 중이도다.”

환영하고 전도(前導)하여 대동관에 이르니 문밖 동남 두 곳에 각기 오산(鰲山) 채사붕(綵絲棚)을 세워 놓고, 산붕 위아래에서 광대와 기생이 나열해 여러 놀음을 벌였다.

황해도 황주에 이르니 관찰사 신구(申句)가 글을 바치고 삼가 관속(官屬) 을 거느려 조서를 맞이하였다. 향정, 용정, 황의장(黃儀仗), 고악, 잡희(雜戲) 및 오산 채사붕은 모두 서경과 같았다. ……

개성부에 이르니 경기도 관찰사 박중림이 관속을 거느리고 조서를 맞이하였다. 향정, 용정, 황의장, 고악, 잡희 및 오산 채사붕은 모두 황해도와 같았다. ……

모화관에 이르니 종친들과 백관들이 향정, 용정, 황의장, 고악, 잡희를 갖추어서 조서를 맞이하였다. 길을 따라 성으로 들어와 경복궁에 이르니 문의 동남 두 곳에 성대히 오산을 맺어 놓고 무기(舞妓)들이 나아왔다.208)예겸(倪謙), 『조선기사(朝鮮記事)』.

우선 사신 일행이 평양에 도착할 무렵이면 십여 리 밖에까지 나아가 마중을 하였다. 이때 광대들의 잡희도 베풀어지는데 이 중 백수무(百獸舞)도 있었다. 백수무는 태평시대였던 요임금 때 음악을 울리면 온갖 짐승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 고사(『서경』, 익직(益稷) “내가 돌을 두드리면 모든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에 입각한 것이기에, 태평시대를 구가하는 산대희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이어 당시가 태평성대란 것을 글로 적어 올렸다. 그리고 마중 나온 무리의 전도 속에 평양의 대동문(大同門)에 이르면 문밖 동남 두 곳에 산대들을 설치하고 그 위와 아래에서 광대와 기생들이 늘어서서 여러 놀음을 벌이는 것이다. 사신을 마중 나가 벌이는 잡희와 성문 밖의 산대희는 황주, 개성, 서울에까지 거듭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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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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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신맞이 산대희에 대해 역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도 『조선부(朝鮮賦)』(1488)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는 어룡(魚龍) 유희가 나오네

이하의 글에서는 모두 백희를 베풀어 조신을 맞이하는 광경을 말하였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래와 영주의 바다 해를 끼고 있고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자리의 오산(鰲山)을 벌렸는데, 높이가 광화문과 같고 극히 공교롭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무산협(巫山峽)의 물을 마시네

사람의 두 어깨에 두 어린아이를 세우고 춤을 춘다

근두(筋斗, 땅재주)를 뒤치매 상국(相國)의 곰은 비교할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울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기마(驥馬)가 있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리매 가볍기는 신선과 같고

솟대를 타기 위해 뛰어오르매 양산귀(梁山鬼)인가 놀라 보노라

장식한 사자와 코끼리는 모두 말가죽을 벗겨 만든 것이고

춤추는 봉황새와 난새는 크고 작은 꿩 꼬리로 만든 것이네

대개 황해도와 서경에서 솔무(率舞)를 베푸는 것을 두 번 보았으나, 모두 이처럼 좋고 아름답지 못하다. 평양이나 황주에서도 모두 오산붕(鰲山棚)을 시설하고, 백희를 베풀어 조신(朝臣)을 맞이하였지만, 유독 왕경(王京)의 것이 가장 뛰어났다.209)동월(董越), 『조선부(朝鮮賦)』.

평양과 황주에서도 산대희를 보았지만 서울의 것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산대희의 공연 종목은 어룡 유희, 무동타기, 땅재주, 마상재(馬上才), 외줄타기·쌍줄타기 등의 줄타기, 솟대타기 등과 백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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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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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도성 10여 리 밖에서 이루어졌던 잡 희의 한 모습은 1724년(경종 4)에 사신으로 왔던 청나라 사람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 20폭 중 7폭에 생생히 그려져 있다.210)阿克敦 著, 黃有福·千和淑 校註, 『奉使圖』, 沈陽 : 遼寧民族出版社, 1999. 끌고 다니며 사신 일행을 전도(前導)할 수 있는 이른바 예산대(曳山臺)가 동원되었고, 광대들의 줄타기, 땅재주, 탈놀이 등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국내의 큰 경사와 관계된 중앙의 산대희는 부묘 때의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편이다. 부묘란 왕이 붕어하였을 때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시는 것을 말하는데, 선왕(先王)이 이제 새로운 조상신이 되었다는 점에서 경사스런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부묘 때도 다음과 같은 산대희가 이루어졌다.

북이 삼엄(三嚴)을 울리면 노산군(魯山君)이 원유관과 강사포를 갖추고 연(輦)을 타고 나가고 백관이 모두 국궁(鞠躬)하고 연이 지나가서야 몸을 바로 한다. 고취(鼓吹)가 요란하게 울리고, 예산붕(曳山棚)이 앞에서 인도한다. 잡희도 갖추어서 전개된다. 대가가 종루 아래에 이르자 성균 생원 김유부 등이 가요(歌謠)를 바치니 …… 연이 혜정교(惠政橋)에 이르니 여기(女妓) 담화지 등이 침향산붕(沈香山棚)을 만들고 가요를 바쳤다. …… 임금의 연이 도관(都官) 앞에 이르니 기로(耆老)인 전 상호군 이형 등이 가요를 바쳤다. …… 연이 광화문 밖에 이르니 좌우의 채붕에서 온갖 희롱을 다 지었으며 여기와 우인(優人)도 함께 근정전 뜰로 들어갔다.211)『단종실록』 권11, 단종 2년 7월 을축.

종묘로 가는 임금의 행차에 광대들의 잡희가 수반된 예산대가 전도하였다. 도중에 기생들이 침향산을 설치하고 정재를 베풀고 가요를 바쳤으며, 유생, 노인 등의 대표들이 곳곳에 모여 서 있다가 가요를 바쳤다. 궁궐로 돌아올 때는 광화문 밖에 좌우 산대가 맺어져 광대들의 백희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유생, 기생, 노인 등의 대표들이 임금에게 직접 가요를 지어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사신이 왔을 때 당시가 태평성대임을 말하는 시를 지어 올린 것과 같은 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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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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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중심의 유교적 이상 국가를 목표로 하는 조선 왕조는 그 정책의 방향상 태평시대의 구가라는 왕조 송도(頌禱)나 군주 송도의 노래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왕조 송도나 군주 송도의 노래는 궁중에서는 악장(樂章)의 형식으로 가창(歌唱)되었다. 그렇지만, 왕조 송도 및 군주 송도의 노래는 성격상 민간에서 불려야 본래 의미가 갖추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임금이 궁 밖에 나오면 여러 대표 집단들이 ‘가요’를 바쳤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집단의 ‘헌가요(獻歌謠)’보다 더욱 대중적인 형태는 역시 광대에 의한 구가(謳歌)이다. 광대에 의한 왕조 송도 및 군주 송도의 노래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송도 노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설(辭說)의 내용이 다음과 같은 진국명산(鎭國名山) 같은 노래를 광대들이 이러한 산대희 때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진국명산 만장봉이요. 청천삭출금부용과 거벽은 흘립하여 북주로 삼각이요. 기암은 두기 남안잠두로다. 좌룡낙산 우호인왕 서색은 반공 응상궐인데 숙기종영 출인걸이라. 미재라 동방 산하지고여 성대태평 의관문물 만만세지금탕이라. 연풍코 국태민안허여 구추황국 단풍지절에 인유이봉무하고 면악등림하여 취포반환하오며 감격군은하오리다. 남산송백 울울창창 한강유수난 호호양양 주상전하는 차산수하 같이 산붕수갈토록 성수무강하사 천천만만세를 태평으로만 누리소서. 우리도 일민이 되어 강구연월의 격양가를 부르리라.212)뿌리 깊은 나무 편, 『판소리 다섯 마당』,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 1982, 236쪽.

오늘날 판소리 단가(短歌)로 전승되고 있는 진국명산은 우선 노랫말이 서울의 삼각산과 한강을 다루며 국가의 태평을 구가하는 전형적인 왕조 송도 혹은 군주 송도의 노래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원래 고려 말까지 올라가는 12가사(歌詞)의 6박 도드리 장단 계통의 6박 엇중모리 장단으로 불린 노래다. 그러므로 이런 노래는 판소리가 성립된 17∼18세기 이전부터 산대희와 같은 상층(上層)을 상대로 한 공간에서 주요한 광대 소리로 불리다가 판소리 성립 이후에는 판소리에 앞서 부르는 판소리 단가로도 활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창부 타령, 성주풀이 같은 통속 민요 계통의 다른 광대 소리에서도 왕조 송도나 군주 송도의 노랫말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런 후렴이 있는 통속 민요조의 노래가 아니라 긴 송도의 말을 상층도 즐긴 12가사의 6박 도드리 장단 계통의 6박 엇중모리로 불린 진국명산류의 노래는 사설 내용이나 음악적 방식 면에서 특히 이런 산대희에서 광대들이 부른 주된 소리 갈래였을 것이다. 왕조 송도나 군주 송도의 진국명산류의 노래는 진국명산 외에도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남긴 판소리 단가 사설들에서 대관강산(大觀江山), 역대가(歷代歌), 역려가(逆旅歌), 고금가(古今歌) 등을 더 찾을 수 있다.

산대희는 좌우 산대를 만들어 놓고 좌우 소속 광대들이 좌우 산대의 위아래에서 가무백희를 경쟁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므로 산대의 모양과 광대들의 가무백희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발전하는 면이 있었다.

산대의 높이는 고려 초기에 5장(丈), 곧 15m 정도였으나 조선 전기에는 이미 20m 정도가 되었다. “산대의 높이는 상세한 규정이 없어서, 산대를 맺을 적마다 좌우편이 서로 높게 하려고 하므로, 바람이 심하면 혹 기울어져 쓰러질 위험성이 있다. 지금부터는 산대의 기둥이 땅에서부터 60척 이상을 더 올리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자.”213)『세종실록』 권31, 세종 8년 2월 임진. 라는 병조의 건의는 산대가 상당한 높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산대희가 가장 발전한 조선 중기에는 산대의 높이가 25m 정도 되었으며, 또 좌우에 각기 봄·여름·가을·겨울의 산을 갖추기에 규모도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 양쪽이 각기 춘산(春山), 하산(夏山), 추산(秋山), 설산(雪山)을 만드는데, 산마다 상죽(上竹) 세 개, 차죽(次竹)214)여기서 ‘상죽(上竹)’, ‘차죽(次竹)’ 등은 ‘높다란 기둥’의 표현이다. 실제로는 아름드리나무 기둥이다. 여섯 개가 필요하고, 상죽은 길이가 각기 90척, 차죽은 각각 80척이어야 한다.215)『광해군일기』 권156, 광해군 12년 9월 정축.

좌우 산대에 각기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개 산을 갖추어 좌우가 경쟁하는 매우 큰 규모의 산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산대희에는 600명 정도의 광대가 동원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노리개 짓하는 희자(戲子)들을 전적으로 전라도에 책임 지운 것은 그 수효가 무려 600명이나 되기 때문”216)『광해군일기』 권169, 광해군 13년 9월 계묘.이라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1626년(인조 4)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이루어진 산대희 중 좌산대도감(左山臺都監)의 기록인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에 286명의 광대 이름이 적 힌 것과도 들어맞는다. 산대희는 좌우 산대가 나뉘어서 하는 것이기에, 좌산대도감에 286명의 광대가 소속되어 있었다면, 경쟁하는 우산대도감(右山臺都監)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수의 광대가 속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대희에는 이미 고려 우왕 때에 “육도(六道)의 창우(倡優)를 뽑아서 동강에서 백희를 베풀었다.”217)『고려사』 권133, 열전46, 신우(辛禑) 13년 8월.는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기본적으로 전국의 광대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음을 “천사(天使)가 올 때에…… 먼 곳의 재인을 모두 모이게 하면 오고 갈 때에 민간의 재물을 훔치니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경기 안에 사는 재주 있는 자들을 뽑아서 쓰라.”218)『중종실록』 권92, 중종 34년 2월 계묘.는 중종 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전국의 광대들을 동원할 수 있으나 편의상 경기 안의 광대만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으로는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대체로 경기 지역까지의 광대들만 동원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가 되면 고려시대의 팔관회와 연등회는 폐지되고 오직 남은 연례행사인 연말 나례희에 전대의 가무백희들이 집결되는 양상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 있던 산대희는 매년 있던 연말 나례희의 확대·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산대희의 가무백희를 흔히 ‘나례’란 말로 대신하였다. 산대희의 내용이 사실상 연말 나례희 때의 가무백희와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나례 때는 경기도 지역까지의 광대들만 동원하는 것이 관례였다.

근래 흉년이 들어서 나례 때에 정재(呈才)하는 사람을 경중(京中)에 사는 자만으로 하였으나, 올해에는 곡식이 조금 잘되었으니 조종조(祖宗朝)의 전례에 따라 경기의 각 고을과 경중의 정재하는 사람을 아울러서 하라.219)『중종실록』 권63, 중종 23년 10월 계미.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경중에 사는 사람들’만으로 나례를 치르기도 하였으나, 조종조의 전례는 경기의 각 고을과 경중의 정재하는 사람을 동원 하는 것이 원칙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까지는 대체로 경기도 지역까지의 광대들을 중앙의 산대희에 동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국내의 큰 경사와 관계된 대규모 산대희는 사실상 열리지 않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쇠잔해진 면도 있지만, 인조가 침향산을 네거리에 끌고나가 불질러 버리는 등 산대희에 대한 부정적 의지를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대한 가무백희가 수반되는 궁궐의 나례희도 인조 이후에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고, 원래의 구나적 수준에서 열던 궁궐 나례도 1694년(숙종 20)에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사신이 올 때의 산대희는 국제적인 관례였기에 인조 이후에도 여전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중국 사신맞이 산대희에는 팔도의 광대들을 모두 동원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산대희에는 600명 정도의 아주 뛰어난 기량을 지닌 광대가 필요하였는데, 전란 중에 광대들이 많이 흩어져서 종래와 같이 경기도 지역 광대들만으로는 충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팔도의 광대들을 동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화(戰禍)를 다른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입었던 전라도 지역 소속의 광대들을 대규모로 동원하였다. 1626년(인조 4)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산대희의 좌산대도감 소속 광대 286명을 지역상으로 보면 경기도 30명, 충청도 52명, 경상도 33명, 전라도 171명으로 전라도 광대들의 수가 단연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노리개 짓하는 희자들을 전적으로 전라도에서 책임을 지게 한 것은 그 수효가 무려 600명이나 되기 때문”이라는 『광해군일기』의 기사에도 이미 나와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중앙 산대희의 주된 광대 집단은 전라도 광대들이었다. 광대 집단이 전라도 광대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중앙의 산대희 뿐 아니라 과거 급제자의 행사와 같은 서울 지역의 다른 행사들에 전라도 광대들이 주도적으로 참가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성립된 판소리를 이들 전라도 광대들이 중심이 되어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 민 족의 대표적 민속 예술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사신이 올 때 행하는 산대희도 1784년(정조 8) 이후에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220)갑신완문(甲申完文). “지난 갑진년(1784) 이후 좌우 산대가 설행되지 않았다.” 하고, “갑진 이후에 조산의 규칙이 깨지자 우리 무리도 곧 한산해지게 되었다.”221)경기도 창재 도청안(京畿道唱才道廳案).는 내용은 큰 규모의 산대희가 1784년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1784년 이후 중앙의 대규모 산대희는 열리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말까지도 중국 사신이 올 때는 산대희를 해야 한다는 관례는 유지되었다. 그래서 1824년(순조 24)에도 전국의 광대들이 모여 행방 회의를 한 뒤 중국 사신이 올 때의 산대희와 관련된 광대들의 조직을 정비하여 관의 허가를 받았던 것이다.

완문(完文) 등장(等狀) 팔도 재인

오른쪽 완문은 거행하는 일의 갖추어진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팔도 재인 등은 병자년(丙子年) 이후로 칙행(勅行)을 위해 당연히 좌우 산대를 설치하고 거행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 지난 갑진(甲辰) 이후 좌우 산대가 설행되지 않았으나, 전례(前例)에 기록되어 있는 칙행 때에 나누어 맡긴 것들이 있어 각도 재인들이 그 도 소임의 청에 대기하고 있은즉 …… 공청도 재인 중 팔도 도산주 겸 도대방·경기 재인 중 팔도 우산주 겸 도집강·전라도 재인 중 팔도 좌산주 겸 도집강·경상도 재인 중 팔도 도공원 겸 본도 대방·강원도 재인 중 팔도 도공원 겸 본도 대방·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는 도당무, 도색장에 각각 본도 대방 들의 소임을 갖게 하고자 합니다.222)갑신완문.

그리고 1784년 이후에도 나라의 행사와 관계된 산대희류의 연행은 계속 이루어져 근대에까지 이어졌다. 다음은 1890년 전후에 행해진 궁중의 환영회에서 행해진 산대희 계통의 놀이다.

만찬이 끝나고 노천 무대가 마련된 연회장에서 유흥이 시작되었다. 무대 주위에서 약 30여 명으로 구성된 궁중 악대가 장구나 거문고 등의 여러 악기를 앉아서 연주하였다. …… 연주에 이어 호랑이와 사자로 분장한 두 사람이 장단에 맞추어 껑충껑충 뛰면서 춤을 추었다. 머리 부분을 연신 흔들면서 때로는 동물 소리를 내며 한바탕 휘젓고 지나갔다. 그리고 갖가지 화려한 치장을 한 무녀들의 춤으로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223)백성현·이한우,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새날, 1999, 252쪽.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미국 총영사를 지낸 샤이에 롱(Challe-Long)의 목격담이다. 규모는 작지만 외국 손님을 접대할 때에 산대희 같은 행사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나름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근대 무렵까지도 중앙의 산대희는 광대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활동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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