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3. 광대들의 활동을 돌아보며
  • 중앙의 산대희와 나례희
  • 궁궐의 나례희
손태도

연말 나례는 한 해가 바뀌기 전 잡귀와 잡신을 몰아내고 길(吉)한 것을 받아들이려는 벽사 진경(辟邪進慶)의 의식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周)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적어도 1040년(정종 6)부터는 연말 나례를 하고 있었다.224)『고려사』 권64, 지18, 예11, 정종 6년 11월 무인. “연말의 나례에 다섯 마리의 닭을 잡아 찢어서 역기(疫氣)를 쫓으니, 짐은 심히 애통함을 느낀다. 다른 물건으로 대신할 수 있겠는가?”

고려시대 궁궐의 나례 의식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이색이 지은 한시 ‘구나행(驅儺行)’이다.225)이혜구, 「목은 선생의 구나행(驅儺行)」(1955), 『(정보) 한국 음악 연구』, 민속원, 1996.

(9) 충의가 넘쳐 병장방(屛障房)226)앞서 나례를 위해 궁중에 ‘병장방(屛障房)’을 설치한다 하였다.을 대신하고 / 忠義所激代屛障

(10) 묵은 기괴한 것들 물리치자 뭇 악공이 나오네 / 畢陳怪詭趨群伶

(11) 오방귀(五方鬼) 춤추고, 백택(白澤)이 뛰어나오며 / 舞五方鬼踊白澤

(12) 불을 토하고 칼을 삼키네 / 吐出回祿呑靑萍

(13) 서천(西天)의 정령인 고월(古月)이 있어 / 金天之精有古月

(14) 흑색 가면, 황색 가면, 눈은 파랗도다 / 或黑或黃目靑熒

(15) 그 중 노인이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길어 / 其中老者傴而長

(16) 사람들이 ‘남극성’이라며 놀라네 / 衆共驚嗟南極星

(17) 강남서 온 상인들이 두런대며 / 江南賈客語侏離

(18) 진퇴하는 것이 바람 속 반딧불처럼 빠르네 / 進退輕捷風中螢

(19) 신라의 처용이 머리에 칠보(七寶)를 이었는데 / 新羅處容帶七寶

(20) 꽃가지 머리 눌러 향기로운 이슬 방울 짓네 / 花枝壓頭香露零

(21) 긴 소매 낮게 돌리며 태평시대를 춤추고 / 低回長袖舞太平

(22) 취한 붉은 얼굴 아직 술이 덜 깨었네 / 醉瞼爛赤猶未醒

(23) 누런 개 방아 찧고, 용은 여의주를 다투고 / 黃犬踏確龍爭珠

(24) 가득찬 백수무(百獸舞) 요임금의 뜰이구나 / 蹌蹌百獸如堯庭

모두 24구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1∼10구까지는 창수(唱帥)와 진자(辰子) 등에 의한 구나 의식을 다루고, 그 이하는 구나 다음의 나희(儺戲)와 나기(儺技), 태평성대의 조짐 등을 읊었다. 나희는 사람들이 구나적 존재로 분장하여 놀이를 함으로써 구나적 존재들을 즐겁게 하는 것인데, 시에서 오방귀, 백택, 서천의 정령, 남극 노인 등으로 표현한 것이 구나적 존재들이다. 나기는 구나적 존재들이 초인적 모습을 과시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불 토하기, 칼 삼키기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태평성대의 조짐은 이러한 나례 의식을 통해 상서롭지 못한 것을 모두 제거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요임금 때는 궁궐에서 온갖 짐승이 춤을 추었다는 고사를 형상화한 ‘백수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들어온 나례 의식에는 원래의 구나적 요소 외에 나희·나기 등도 있었기에 그것들 자체에 이미 백희와 같은 요소가 어느 정도 들어 있었다. 여기다 연말의 축제 분위기는 연말 나례 의식에서의 백희 요소를 더욱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다음 기사가 잘 말해 준다.

예종 11년(1116) 12월 기축일에 대나(大儺)를 하기로 되었다. 이보다 앞서 환관들이 좌우 두 패로 갈라 맡고 서로 이기겠다고 하는데, 왕은 친왕을 주장으로 패를 갈라 맡겼다. 그리하여 모든 광대와 여러 재주꾼 이외에 지방에서 놀음바치 기생들까지 모조리 불러들이고, 원근에서 구경꾼이 모여들어 깃발이 길에 연달았으며 궁중에 빼곡히 찰 지경이었다. …… 왕이 구경을 하려 할 때, 좌우 양편에서 제각기 먼저 재주를 보이려고 서두는 통에 질서가 아주 문란하였다. 그래서 다시 400여 명을 축출하였다.227)『고려사』 권64, 지18, 예6.

고려시대에도 이미 연말 나례 의식이 성대한 축제로서의 면모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팔관회와 연등회가 폐지되고 연말 나례희만 남게 되자, 연말 나례희에 가무백희가 베풀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연말 행사가 열렸다. 세조 때에 왕비는 연말 행사에 앞서 “24일에 해가 바뀌니 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격봉(擊棒)하고, 26일에 관나(觀儺)하고, 27일에 풍정(豊呈)하고, 28일에 관나축역(觀儺逐疫)을 하고, 29일에 격봉(擊棒) 소연(小宴)하며 관화(觀火)하겠다.”228)『세조실록』 권40, 세조 10년 12월 계묘.는 글을 내렸다. 연말 행사에는 대비 이하 궁(宮) 내외의 부인들과 종친들도 참석하는 관례가 있기에, 왕비가 그 일자를 적어 내린 것이다.

여기서 ‘관나’는 백희만을 보는 것이고, ‘관나축역’은 구나 의식을 본 뒤 백희도 보는 것이다. ‘관화’는 화산대(火山臺)를 만들어 놓고 불꽃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방상씨(方相氏), 진자(侲子), 고각군(鼓角軍) 등으로 구성된 구나패가 섣달 그믐날 새벽에 궁궐을 시작으로 궁궐의 네 문을 지나 도성의 사대문(四大門)에까지 이르러 마치는 대나 의식이 더 있었다.

그런데 이중 가장 중요한 행사는 가무백희를 보는 ‘관나’나 ‘관나축역’이었다. 이때 관객은 임금을 비롯하여 대비들과 중전, 종친, 2품 이상의 재상들, 초청받은 내외의 부인들에 이르기까지 궁궐을 중심으로 한 상당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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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씨
방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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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편복(便服)으로 인양전(仁陽殿) 처마 밑에 나아가고, 두 대비(大妃)는 발을 드리우고 어전(御殿)서 나례를 구경하였고, 전(殿) 옆의 조금 북쪽에 장막을 쳤다. 또 그 북쪽 긴 회랑에 발을 드리워서 초청받은 내외(內外)의 부인들이 나례를 구경할 곳을 만들고, 종친과 재상 2품 이상과 입직한 여러 장수, 승지, 주서(注書), 사관(史官) 등이 입시하였다.229)『성종실록』 권235, 성종 20년 12월 임자.

나례를 구경하는 시정(市井)의 여자가 대궐 뜰 옆에 빽빽이 섰으니, …… 나례를 볼 때에는 군(君)들의 부인과 옹주(翁主)의 안친척 및 외명부(外命婦)가 궁에 들어올 때 거느리는 비자(婢子)를 한정하여 들여보내는데, 거느리는 비자 가운데에 시정의 여자가 혹 있을는지 알 수 없으나……230)『중종실록』 권83, 중종 32년 1월 23일.

연말의 나례 의식은 원래의 구나적 의식을 떠나 성대한 축제 행사로서의 면모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관나에 대해 성현(成俔, 1439∼1504)은 ‘관나시(觀儺詩)’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궁궐이라 봄빛 들어 채붕은 일렁이고 / 秘殿春光泛綵棚

붉은 옷, 누런 옷 광대들이 어지러이 오고 가네 / 朱衣黃袴亂縱橫

농환(弄丸) 놀이는 진실로 의료(宜僚)231)‘의료’(宜僚)는 중국 춘추시대의 이름난 광대로 공중에 항상 여덟 개의 구슬이 있었다 한다.의 솜씨요 / 弄丸眞似宜僚巧

줄을 타며 도는 것 나는 제비처럼 가볍네 / 步索環同飛燕輕

네 벽 두른 작은 방에는 꼭두각시극 하고 / 小室四旁藏傀儡

백 척 솟대 위에선 술병과 술잔 들고 춤추네 / 長竿百尺舞壺觥

임금님께서야 창우(倡優) 놀이 즐기시랴만 / 君王不樂倡優戲

다만 뭇 신하들과 태평 시절 즐기심일세 / 要與君臣享太平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산대를 만들어 놓은 궁궐 안에서 구슬 던져 받기인 농환, 줄타기, 인형극, 솟대타기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산대희 때의 가무백희를 보는 것이다.

한편, 가무백희를 보는 관나 외에도 제석(除夕) 전날 저녁에는 으레 궁궐에서 일종의 구나 의식이 이루어지고는 하였다. 이를 이어 제석날 새벽에는 방상씨를 앞세운 구나패가 궁궐의 네 문에서 출발하여 도성의 사대문에 이르는 이른바 대나를 하였다. 이러한 제석 전날 저녁의 구나 의식에 대해 성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구나의 일은 관상감(觀象監)에서 주관하는 것인데, 제석 하루 전날 밤에 창덕궁과 창경궁의 뜰에서 한다. 그 규제(規制)는 붉은 옷에 가면을 쓴 악공 한 명은 창수(唱帥)가 되고, 황금 사목(黃金四目)에 곰 가죽을 뒤집어쓴 방상씨 네 명은 창을 잡고 서로 친다. 지군(指軍) 다섯 명은 붉은 옷과 가면에 화립(畵笠)을 쓰며, 판관(判官) 다섯 명은 초록색 옷에 가면과 화립을 쓴다. 조왕신(竈王神) 네 명은 푸른 도포를 입고 복건(幞頭)을 쓰고 목홀(木笏)을 쥐고 가면을 썼으며, 소매(小梅) 몇 사람은 여자 적삼을 입고 가면을 썼는데, 저고리와 치마는 모두 붉은색과 초록색이고 손에 당간(幢竿)을 잡 는다. 십이신(十二神)은 모두 귀신의 가면을 쓰는데, 예를 들면 자신(子神)은 쥐 모양의 가면을 쓰고, 축신(丑神)은 소 모양의 가면을 쓴다. 또 악공 십여 명은 복숭아 나뭇가지를 들고 이를 따른다. 아이들 수십 명을 모아 붉은 옷에 붉은 두건을 씌워 진자(侲子)로 삼는다.232)성현(成俔),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판관, 조왕신, 소매 등의 가면을 쓴 인물이다. 중국에서도 송나라 때가 되면 방상씨, 진자 등과 같은 주나라 때의 구나적 인물 대신 판관, 종규(鍾馗), 조군(竈君) 등 민간의 여러 신이 연말의 구나적 인물로 광범위하게 등장하게 된다.233)김학주, 『한·중 두 나라의 가무와 잡희』, 서울 대학교 출판부, 1994, 12∼13쪽. 우리나라에서도 성현이 산 조선 전기에 전래의 방상씨나 진자 외에도 판관이나 소매 같은 인물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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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씨탈
방상씨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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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판관들은 오늘날의 탈놀이에서 볼 수 있는 양반일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여자인 소매는 유득공(柳得恭, 1749∼?)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나타나고 있다. 곧 “연극에는 산희(山戲)와 야희(野戲) 양부(兩部)가 있는데, 모두 나례도감(儺禮都監)에 속한다. 산희는 …… 야희에서는 당녀(唐女)와 소매로 분장하여 춤을 춘다.”234)유득공(柳得恭), 『경도잡지(京都雜志)』 권1, 성기(聲伎).는 것이다. 유득공 당대의 본산대 탈놀이의 ‘소매’는 오늘날 본산대 탈놀이 계통 탈놀이의 ‘소무’와 강릉 관노 가면극의 ‘소매각시’로 바로 이어질 수 있다. 나례에서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오늘날의 탈놀이로 이어질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또한, 궁궐의 대나 때에는 방상씨를 앞세우고 악공들이 북, 징 등의 타악기를 울렸다. 잡귀와 잡신이 무서워할 가면을 쓰고 타악기를 두들기면서 이루어지는 궁궐의 나례 의식은 민간에서는 ‘매구’ 혹은 ‘매귀(埋鬼)’라고 하여 정초에 농악패가 가면을 쓴 잡색을 앞세우고 농악기를 치며 하는 집돌이 농악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다. 조선시대 궁궐 나례 의식에서 의 판관과 소매는 정초 집돌이 농악에서의 포수, 양반, 각시 중에서 양반과 각시로 바로 연결될 수 있겠다. 이러한 관련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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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화극 공연
길거리의 화극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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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나라의 전통극에는 화극(話劇), 가면극, 인형극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화극은 가면을 쓰지 않고, 한두 명의 광대가 시정(市井)의 여러 가지 일을 꾸며서 연기하는 것이다. 연말 나례 때의 가무백희 중에는 한두 명의 광대가 중심이 되어 당대의 시사적(時事的) 내용을 흉내를 내거나 재담으로 풀어내는 화극이 주요한 공연물 중의 하나였다.

임금이 중궁(中宮)과 더불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나례를 구경하니, 왕세자가 입시하고, 종친, 재추(宰樞), 승지(承旨) 등도 또한 입시하였다. 술자리를 베풀어 왕세자가 술을 올리고 종친, 재추도 차례로 술을 올렸다. 잡희가 함께 시작되어 밤 2고(鼓)에 축역(逐疫)한 우인(優人)들이 잡희를 통하여 스스로 서로 문답하면서 관리의 탐오하고 청렴한 모양과 여리(閭里)의 더럽고 잗다란 일까지 들추어 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235)『세조실록』 권34, 세조 10년 12월 정미.

연말 나례희에서 광대가 화극을 하는 이유는 정치의 잘잘못과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임금이 구중궁궐에 거처하므로 정치의 잘잘못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잘못된 것을 들을 수 없어서 비록 광대의 말이라도 혹 풍자하는 뜻이 있으면 채용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것이 나례를 행하는 이유이다.”236)『명종실록』 권27, 명종 16년 12월 갑신.는 『명종실록』의 기록은 화극의 정치적 목적을 나타낸다. 임금이 궁궐에 거처하여 시정의 일을 잘 모르므로 나례 때 광대들이 시정의 일을 꾸며 연극으로나마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연말 나례 의식에는 원래의 구나 요소와 더불어 산대희의 가무백희 요소들이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현의 ‘관나시’의 첫 구절 “궁궐이라 봄빛 들어 채붕은 일렁이고”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연말 나례희 때에는 궁궐에 산대가 갖추어졌다.

전교하기를, “정월 초하룻날 나례를 볼 때, 경회루에 채붕을 세우되, 승지를 좌우로 나눠 그 일을 감독하라. 이긴 쪽에 상을 주겠다. 또 앞으로 매년 정월 초하룻날 채붕을 세우는 것을 상례로 삼겠다.” 하였다. 이에 승지 한순(韓恂)이 군인 수천 명을 이끌고 경복궁 후원에서 산대를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기교(技巧)하게 만들기에 힘써 밤낮으로 쉬지 않으므로 군인들이 얼고 굶주려 많이 죽었다.237)『연산군일기』 권60, 세조 11년 12월 임술.

조선시대 연말 나례희는 사실상 거의 산대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산대희의 가무백희를 하는 것’을 흔히 ‘나례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조선시대에 가끔 열린 산대희는 매년 있었던 연말 나례희의 확대·연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연말 나례 때의 ‘화산대(火山臺)’도 연말에 궁중에 세운 산대 위에서 행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 궁궐의 나례희는 “예전부터 내려온 관례로는 나례는 기일 전 2개월 동안 미리 연습하였는데, 왕은 미리 연습할 필 요가 없다고 하여, 12월 15일부터 연습을 시작하도록 명하였다.”238)『연산군일기』 권47, 연산군 8년 11월 임신.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길게는 2개월 가까운 연습 기간이 있었다.

그리고 연말 나례에는 경기도 지역까지의 광대들만 동원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례는 조종조 때부터 행한 것이니, 경솔히 할 수 없다. 우인(優人)들은 본래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양식을 구걸하여 먹고살며, 또 먼 곳의 사람들이 아니라 경기에 거주하는, 이틀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다.239)『세종실록』 권52, 세종 13년 6월 정사.

그런데 인조 이후에는 산대희와 함께 대규모 가무백희가 동원되는 연말 나례희도 더는 열리지 않게 된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인조 원년에 나례를 드디어 정지하였는데, 1692년(숙종 18)에 명하여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설행하도록 하였다.”240)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권12, 속절잡희(俗節雜戲).라고 한다. 그나마 숙종 때 부활한 『오례의』에 입각한 구나적 대나 의식도 1694년(숙종 20)에 완전히 정파(定罷)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궁궐의 나례희가 완전히 폐지된 숙종 이후 궁궐에서는 연종포(年終砲)를 쏘고 간단한 타악기를 울리는 구나 의식 정도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궐 안에서는 제석 전날에 대포를 쏘는데 이를 연종포라 한다. 화전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은 곧 대나의 역질 귀신 쫓는 행사의 남은 제도이다.241)『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 12월 제석(除夕).

이렇게 1694년 궁궐의 나례희가 폐지됨으로써 해마다 수많은 광대가 임금을 주 관객으로 가무백희를 하는 일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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