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3. 광대들의 활동을 돌아보며
  • 지방의 산대희와 나례희
  • 지방 관아의 나례희
손태도

고려시대 중국의 연말 구나 의식이 들어온 이래 중앙의 궁궐에서는 거의 매년 연말 구나 의식이 행해졌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모두 중앙 집권적 성격이 강해서 지방의 정치 제도는 대개 중앙의 정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러므로 지방 관아에서도 궁궐에서와 유사한 구나 의식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중앙에서는 인조 즉위 이후 나례희가 점차 열리지 않게 되고, 1694(숙종 20년)에는 『주례(周禮)』에 입각한 방상씨 등에 의한 구나 자체도 정파되어 공공연한 구나 의식은 많이 약화되었지만, 지방 관아에서는 오히려 조선시대 말까지 구나가 상당히 왕성하게 전승되고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오횡묵(吳宖默, 1834∼?)은 자신이 수령을 지낸 여러 지역에서 지방관으로서 적은 일기를 『총쇄록(叢瑣錄)』이란 이름으로 여러 권 남겼다. 현재 2층 에서 강원도 정선군, 경북 자인현, 경남 함안군, 경남 고성부, 전남 지도(智島) 등 다섯 권이 전해지고 있다.246)오횡묵(吳宖默) 저, 여강 출판사 영인, 『한국 지방사 자료 총서 일성록(日錄篇)』 2, 1987. 그런데 자인, 함안, 고성, 지도247)지도(智島)에서는 연말 구나 의식으로 대포만 쏘고 있다. 네 곳 관아에서 모두 연말 구나 의식이 행해지고 있다.

(1888년 12월) 29일 병오. …… 이날 초저녁 무부(巫夫)·관노배(官奴輩)들이 축사매괴(逐邪埋怪)라고 이르며 징, 북, 바라 등의 악기를 난타하며 들어와 두루 돌다 외아(外衙)를 한 바퀴 돈 후, 내아(內衙)를 들어가 한 바퀴 돌고 용약(踴躍)하며 놀이를 하였다.248)『자인총쇄록(慈仁叢瑣錄)』.

(1889년 12월) 30일 신축. …… 갑자기 북·피리·징·생황의 소리가 있더니 아이들 30명이 호응(呼應)하며 들어왔다. 이어 장정 10여 명이 각기 소장(所長)의 악기를 잡고 넓은 뜰에서 음악을 베풀었는데, 금(金)·혁(革)으로 된 악기를 서로 요란히 울리며 뛰고 앉곤 하였다. 먼저 나아오는 사람들 중 한 대한(大漢)이 있어 얼굴에 가면을 쓰고 동쪽에서 번듯 서쪽에서 번듯 고개를 젖혔다 들었다 하였다.249)『함안총쇄록(咸安叢瑣錄)』.

(1893년 12월) 30일 무인. …… 때가 저녁 무렵이 되었을까 나희배(儺戲輩)가 꽹가리를 울리고 북을 치며 용약하며 시끄럽게 모두 관아의 마당으로 들어왔다. 월전(月顚)과 대면(大面), 노고우(老姑優)와 양반창(兩班倡)의 기이하고 괴상한 모양의 무리들이 순서대로 번갈아 가며 나와 서로 바라보며 희롱하고 혹은 미쳐 날뛰며 소란스럽게 떠들거나 혹은 천천히 춤을 춘다. 이같이 하기를 오랫동안 하고 그쳤다.250)『고성총쇄록(固城叢瑣錄)』.

한편 황해도 봉산 관아에서도 “섣달 그믐날 밤에 ‘광대’를 불러다 ‘매귀’를 한다. …… 이날 밤 동헌(東軒) 마당에는 얼음 기둥 두 개를 좌우에 세운다.”251)김일출, 앞의 글, 61쪽.고 하여 ‘빙등(氷燈)’이라는 연말 구나 의식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서 이러한 빙등 의식은 함경도와 평안도에서도 한다고 하였다.

조선과 같은 중앙 집권 국가에서는 지방 관아의 여러 일이 대체로 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횡묵이 수령으로 재직한 고을 대부분에서 이러한 지방 관아의 나례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오횡묵의 기록과 비슷한 지방 관아의 나례 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매순(金邁淳)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819)에서 지방 관아의 나례 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반적 언술로 말하고 있다.

대궐 안 궁전 근처에서는 각각 대포를 놓아 세 번 소리를 낸다.

그리고 지방 관부(官府)에서는 우인(優人)들이 가면(假面)을 쓰고, 징을 울리고 막대기를 두드리며 호령을 하고 무엇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두루 몇 바퀴를 돌다가 나간다. 그것은 나례에서 끼쳐진 법이다.252)김매순(金邁淳),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정월 원일(元日).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조선 말기까지도 대개의 지방 관아에서는 구나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구나 의식은 잡귀가 무서워하는 가면을 쓰고 타악기를 두들기는 것이기에, 궁궐의 구나 의식에도 그러하였듯이 지방 관아에서도 그 역할을 악공 집단인 광대 집단이 맡아하였으며, 가면을 쓰고 하는 구나 의식이 탈놀이로도 발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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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잡귀와 잡신을 물리치기 위해 가면을 쓰고 타악기를 두들기면서 이루어지는 관아의 구나 의식에서 타악기를 두들기는 것이 중심이 되면 정초 집돌이 농악이 될 수 있다. 이럴 경우 타악기를 두들기는 사람은 농악의 치배가 되고, 가면을 쓴 사람은 농악의 잡색 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지방 관아에서 구나 의식을 한 광대들이 그것의 연장으로 정초에 민간에까지 돌면 그것은 광대들이 하는 정초 집돌이 농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승되는 정초 집돌이 농악은 정초 광대들의 집돌이 농악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게 된다.

반면 가면을 쓰고 타악기를 두들기는 것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중심이 되면 탈놀이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중앙의 본산대 탈놀이와 다른 계통의 탈놀이인 강릉 관노 가면극이나 경남 지역 오광대 탈놀이들은 어느 정도 이런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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