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3. 광대들의 활동을 돌아보며
  • 민간의 축제
  • 고을굿·마을굿
손태도

전통 사회에서 마을굿은 마을 단위로 광범위하게 있었다. 그리고 마을 단위를 넘어 일정한 지역 사회에서도 정기적으로 있었던 고을굿은 원래의 종교적 요소 외에도 그 지역민들에게는 하나의 축제 행사였다. 그래서 이러한 굿에는 굿을 주재하는 사제 집단 외에도 남사당패와 같은 떠돌이 집단도 한몫 보려고 현장에 몰려들었다. 또한 한편으로 무부이기도 한 경기 이남의 광대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마을굿에서, 사제자로서의 기능 외에도 광대로서의 기량도 유감없이 발휘하였을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마을굿에서 원래의 마을굿과는 관계없는 광대 놀음 중의 하나이다.

오후 4시쯤 되었을가, 동내 어구 가까이 닿을 적에, 한 양복(洋服) 입은 청년(靑年)이 오늘 당(堂)에서 줄탄다고 대답하면서 부리나케 달음질쳐 가는 쪽을 논길에 서서 바라보니 약 500m 떨어진 산 위에 송림 사이로 흰옷 입은 사람이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는 것이 보여서 벌써 줄타는 것이 시작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284)이혜구, 『무악(巫樂) 연구』(1955), 앞의 책, 164쪽.

1944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청담리(청수골, 현재의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었던 도당굿을 조사 나갔던 조사자가 도당굿 앞에 벌어진 줄타기 놀음을 본 것에 대한 보고이다. 전통 사회에서 마을굿은 종교적 요소 외에도 지역 축제적 성격이 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州), 부(府), 군(郡), 현(縣)처럼 일정 행정 지역 단위의 성황제 같은 고을굿에는 공식적으로 그 의식의 일부로 광대 놀음을 갖추기도 하였 다. 다음은 지역 단위의 고을굿이라 할 수 있는 성황제에 대한 조선시대의 기록들이다.

길안(吉安, 현 안동 지역) 석성(石城)은 현(縣)의 동쪽 2리쯤 있는데 둘레가 700보이다. 지금은 허물어졌다. 성 위에 성황당이 있어 촌민들이 매년 입춘 때에는 재를 올리고 백희를 바치며 풍년을 기원하는데, 이를 어구(御溝) 향도(香徒)라 한다.285)『영가지(永嘉志)』 권6, 고적(古跡).

고성(固城) 성황사(城隍祠)는 고을의 서쪽 2리에 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항상 5월 1일부터 5일까지 그곳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신상(神像)을 싣고 채기(綵旗)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사람들은 다투어 술과 찬을 갖추어 여기에 제사 지내며, 광대들이 백희를 베풀었다.286)『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고성현(固城縣).

양양(洋洋)이 강신(降神)하시니 엄숙히 영신(迎神)하는도다. 자못 배우(俳優)의 잡희들이 좋고, 무격(巫覡)의 시끄럽게 떠듦에 응하시도다.287)경북 영풍 ; 이기태, 『읍치 성황제 주제 집단의 변화와 제의 전통의 창출』, 민속원, 1997, 189쪽.

성황(城隍) 신앙은 원래 중국의 성(城) 수호신 신앙에서 성립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996년(고려 성종 15)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288)박호원, 『한국 공동체 신앙의 역사적 연구-동제의 형성 및 전승과 관련하여-』,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1997, 191∼199쪽. 성황신에 대한 성황제는 고려 전기 중앙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져 지방의 행정 지역에도 전파된 뒤,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관(官)의 공식적인 관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황제는 토착 신앙과의 결합으로 상당 부분 무속 집단에 의해 관리되었고, 형식상의 제사 주체는 지방관이지만 실질적인 제사 주체는 그 지역의 향리 집단 등 토착 세력이었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는 제례의 명분론에 입각해 유교식 제례를 중앙 정부에서 강요하기도 했으나, 고유 신앙과 결합된 민속 신앙 의식이 유지된 곳이 많았다. 그래서 앞의 기록들에서처럼 간단한 유교 제례를 벗어나 대규모의 지역 신앙 의식이 행해진 곳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간 신앙화된 성황제에서도 관의 관여는 있었기에, 관에 속해 있었던 광대 집단들이 공식적으로 동원되는 것은 또한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성황신을 ‘성황대왕’으로 부르는 등, 성황신은 종교적 대왕이기에, 실제 현실에서 왕이 궐 밖으로 거둥하면 산대희와 같은 광대 놀음을 갖추었듯이 이러한 종교적 대왕의 출현에도 여러 광대 놀음들이 공식적으로 갖추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 전승되는 경기 도당굿 같은 마을굿에서도 남아 있다. 경기도 장말 도당굿의 경우, 마을신인 군웅님이 내려오시면 그 신을 모시고 ‘돌돌이’라고 해서 동네의 장승들과 공동 우물을 비롯해서 마을을 한 바퀴 돈 뒤 굿당에 들어오면, 그 군웅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장문잡기’라 해서 다음처럼 광대들이 여러 가지 놀이를 바치고 있다.

장문잡기

돌돌이를 마치고 굿당에 오면 군웅마나님이 쌀섬 위에 정좌해 계신다.

화랭이는 관가의 위엄을 차려 군웅마나님께 대취타(大吹打) 연주와 가야금 뜯는 흉내, 각도 소리 등 온갖 재주를 보임으로써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인데, 굿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장기(長技) 자랑이면서도 여흥인 듯하다.289)황루시 외, 『경기도 도당굿』, 열화당, 1983, 100쪽.

당시 조사자는 종교적 의식과 관계없는 광대 놀음이 아닌가 하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마을의 주신인 군웅님을 모시고 난 뒤, 그 앞에서 펼치는 일종의 산대희적 성격의 의식이기에 공식적인 종교 의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역 단위의 신앙 의식인 성황제에서 광대 등의 백희가 수반되는 것도, 성황신을 모시고 난 뒤 벌이는 일종의 산대희적 성격의 행사이기에 사실상 반드시 갖추어야 될 공식적인 종교 행사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공식적 행사로서의 광대 놀음 외에도 마을굿은 종교적 의식 외에 축제적 성격도 강하였다. 앞서 청담동 도당굿에서 굿에 앞선 광대 줄타기를 보았듯이 굿의 전후와 과정에서도 광대들의 여러 기량이 과시되곤 하 였다. 경기 이남의 경우 무부 집단은 곧 광대 집단이기도 하기에 이러한 무속 의식에 그들의 광대로서의 기능도 상황에 따라 발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남해안 별신굿 보유자 정영만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어릴 때만 하더라도 별신굿을 하면 전라도 쪽의 무부들도 많이 와서 굿의 진행에 참가해서 한몫씩 하여 갔고, 굿의 진행과 관계없는 남사당패 집단도 와서 한몫씩 하여 갔다고 한다.290)일시 : 2000. 3. 27. 장소 : 경남 통영 ‘국악 연구소’ 충남 홍성 출생으로 줄타기도 하고 춤도 잘 췄던 한성준도 1930년대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정월달에는 초하루부터 15일까지 사방에서 당굿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안면도(安眠島)에 가서 잘 놀았는데, 피리 불고 춤추고 재주하는 사람들이 가서 오래 묵으며 놀고 오기도 했습니다.291)장사훈 편저, 앞의 책,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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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굿 여흥
도당굿 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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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1930년대 아키바 다카시(秋葉隆)도 경기도 덕물산에서의 도당굿에서 굿중패, 남사당패 집단 등이 와서 논 것을 보고하고 있다.292)赤松智城·秋葉隆, 심우성 옮김, 앞의 책, 하 207쪽. 굿 의식과는 관계없는 남사당패 등의 집단도 마을굿 현장에 와서 한몫 보려고 논 것은 마을굿이 종교적 요소 외에도 지역 축제의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관민(官民)이 함께하는 성황제 같은 지역 대제이든 마을 주민들만 하는 굿이든 간에 이러한 행사들은 일반 민간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자신들의 행사이기도 하기에 관심도 높고 참여도 적극적이어서 종교적 성격 외에도 정기적인 지역 축제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마을굿에서도 축제 분위기와 관련된 광대들의 여러 놀음이 과시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광범위하면서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던 고을굿·마을굿도 광대 집단의 민간 활동에서 중요한 활동 장소의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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