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3장 광대, 자유로운 예술을 위한 길에 서서
  • 4. 광대 집단의 문화를 돌아보며
손태도

우리나라에서 광대 집단의 문화사적 의의는 한 마디로 이 집단이 적어도 고려 중기부터 전통적인 신분 제도가 철폐된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우리나라의 민속 예능을 공식적으로 담당하였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광대 집단과 같은 하나의 신분 집단이 성립·유지된 데에는 신라 이래 팔관회에서의 산대희와 같은 수많은 광대가 동원되는 국가 행사로서의 산대희가 조선시대 말까지도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행사로서의 산대희 문화가 있었던 나라들로 현재 확인된 곳은 중국과 우리나라 정도이다. 베트남, 유구(琉球), 일본 등지에도 이러한 산대희 문화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지금까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들이 올 때 태평성대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커다란 산 모양의 구조물을 좌우에 설치하고 그 위와 아래에서 광대와 기생들이 가무백희를 하는 산대희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민간에 많은 광대가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이들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산대희에 동원할 만한 민간의 광대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민간의 연예 집단은 조선 전기 불교에 대한 탄압으 로 사찰 계통에서 나온 사당패 정도가 있었을 뿐 그 밖에는 뚜렷한 집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산대희 문화를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수백 명 이상의 광대들이 요구되는 산대희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광대 집단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라 진흥왕 때의 팔관회 이후 고려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행사들이 매년 이루어졌다. 이들 행사에는 산대희가 수반되었으며, 국가 행사로서의 산대희에는 고려시대에는 수백 명, 조선 중기에는 600명 정도의 아주 기량이 뛰어난 광대들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이러한 행사들을 원만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치러 내는 과정에서 광대의 역을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을 성립시킨 것이다.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의 광대 집단은 이미 확보된 악공 집단이 광대 역할도 겸하게 하는 것을 통해 제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악공이 광대 역할을 겸하는 것은 『대명률』에도 나와 있는 중국의 방식인데, 우리나라도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사실상 관에서는 악공은 항상 필요하지만 광대는 일이 있을 때에만 필요하기에, 악공 집단이 광대 역할도 겸하게 함으로써 국가는 광대 집단을 별도로 두지 않아도 되었다.

악공은 특수 기능 집단이었기 때문에 고려 중기에 이미 악공의 아들은 악공이 되는 세습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악공 집단이 광대 집단이기도 하였으므로 그러한 세습 제도는 광대 집단에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고려 중기부터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서 광대 집단이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광대 집단은 전통 사회의 신분 세습 방식이 그렇듯이 계급 내 혼인을 통해 그 수가 늘어나 경기도 창재 도청안이 이루어진 1836년(헌종 2)경에는 경기도에만 4만 명 정도의 광대가 있었다. 이렇게 광대 수가 많은 것은 이들이 단순히 기능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 신분 집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분 제도가 철폐된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와서야 비로소 ‘창우(倡優)’, 곧 ‘광대’ 신분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 고대나 중세 국가에서 임금 주변에 어느 정도의 광대 집단이 있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무렵인 1894년까지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수많은 광대 집단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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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민속 예능사는 이러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악공의 세습이 제도화된 고려 중기부터 악공=광대 집단의 사람들은 광대로서의 역할을 세습해 왔다. 천민 계통인 이들은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토지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악기 연주나 광대 노릇과 같은 예능 분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전승되는 판소리, 가면극, 줄타기, 농악 등 우리나라의 민속 예능이 세계적으로도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이들 광대 집단이 담당한 예능은 각종 전문적 기악(器樂) 연주, 고사 소리·통속 민요 계통의 타령·재담소리·판소리 등의 소리, 화극·가면극·인형극 등의 전통극, 줄타기·땅재주·솟대타기 등의 기예, 전문적 농악 등이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나라 민속 예능의 주요한 종목은 대부분 이들 광대 집단에 의해 전승·발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말까지도 여러 예능을 하나의 신분 집단으로 공식적으로 담당한 이들 광대 집단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속 예능사의 중심 집단이며, 우리나라 민속 예능 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려놓은 진정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신분 사회가 유지된 전통 사회에서 광대 집단 사람들은 천민 신분으로 일반 평민들과 같이 살지도 못하였다. 경기 이북의 광대 집단인 재인촌 사람들은 재인촌 혹은 광대촌이라 불린 특수 마을에서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했고,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인 세습무 집안의 남자들인 화랑이 집단은 마을 앞 개울가나 마을 뒷산 자락에 외따로 떨어져 살았다. 이들은 심지어 1970∼1980년대까지도 그 지역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반말을 듣는 생활을 했어야만 했다.

오늘날에는 전통 사회 광대 집단이 남긴 예능들 대부분이 소중한 민족 예능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광대 집단 계통의 사람들도 전문적 예능인으로 남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 광대 집단 사람들은 천민 예인 집단으로 차별받았으며, 지역 사회에서 여러 가지 생활상의 제한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이들은 ‘광대’라는 하나의 신분 집단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러나 광대 집단의 사람들은 이후에도 상당 기간 이러한 예능 영역 쪽에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악 연주, 판소리, 줄타기, 농악 등의 대가는 대부분 이러한 광대 집단 계통의 사람으로 알려졌다. 오늘날까지도 전통 사회 광대 집단의 문화사적 의의는 상당 부분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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