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1. 불교와 유랑 예인, 비승비속의 세계
  • 조선 전기, 거사에서 사당으로
주강현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유산을 이어받아 여전히 많은 숫자를 자랑하던 조선 초기의 승려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모두 환속하여 단순 속인이 되었을까. ‘강제 환속’은 하였건만 절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절로 되돌아갈 수도 없던 많은 ‘잉여 인력’이 존재하였다. 그 ‘잉여 인력’은 민중 속에서 거사(居士)로 자리 잡게 된다. 거사는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하였으며, 조선시대 불교사의 그늘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다양한 문화를 일으켜 왔다.

거사란 ‘거사지명(居士之名)·거재지사(居在之士)’의 준말로 불가에서는 출가하지 않고 가정에 있으면서 불교에 귀의한 남자를 거사라고 한다(在家之佛道者).308)일반적으로 학식과 도덕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거사라 한다. 거사는 또 당호(堂號)나 법명(法名) 아래에 붙이는 칭호로도 쓰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 일도 아니 하고 놀고 지내는 사람을 가리킬 때도 있다. 이에 비하여 속가(俗家)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는 사당(社堂)이라고 하였다.309)20세기에 들어와 사당을 제일 먼저 주목한 이는 아마 일제 강점기의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일 것이다(宋錫夏, 「社堂考」, 『朝鮮民俗』 3號, 朝鮮民俗學會, 1940, 日文 참조).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비구승(比丘僧)·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憂婆夷)는 사중(四衆)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우바새를 거사, 우바이를 사당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우바새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까지도 널리 쓰였던 것 같다.

18세기 중엽에 그린 감로탱화를 보면, 염주를 들고 보살 옷을 입은 우바새가 춤을 추고 있다. 탈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에 그린 것이 확실한 이 감로탱화 속의 춤꾼 옆에 우바새라고 분명히 적혀 있어 민간에서 거사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었지만 우바새 역시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걸사(乞士)란 머리를 깎지 않은 중을 말한다. 우리나라 말에 이를 거사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걸사의 아내는 우바니라고 하는데, 방언으로는 이를 사당이라고 이른다.”라고 하였다.310)정약용, 『아언각비(雅言覺非)』. 즉, 정약용은 걸사와 거사를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비구(중)란 걸사이다. 그 윗사람은 법을 빌고(乞法), 아랫사람은 밥을 빈다(乞食).”라고 하여 역할이 걸법과 걸식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강제적 유출로 말미암아 갑자기 성행하게 된 유랑 예인 집단으로서의 거사는 한국 사회에만 존재하였던 특수한 집단이었다.

이들 종교적 세계의 인물들이 한국의 특수한 사회 사정 때문에 세속적 무리로 전락한다. 거사배는 조선 초기에 단행한 대불교 정책, 즉 비대해진 불교의 인적·물적 자원을 재정비하려는 정책이 계기가 되어 형성된 비승비속(非僧非俗) 집단이다. 이들 집단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은 ‘사당배’·‘거사배’·‘거사패’·‘사당패’로 바뀌어 왔는데, 이는 거사의 기능이 약화됨에 따른 현상으로 파악된다. 조선 전기에는 사장(社長)과 거사와 도사가 다 같은 무리임을 알 수 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 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사장은 불교 신자들의 무리이다.”라고 보았다.

절에서 추방된 수많은 거사가 속가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다. 사회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사회적 물의를 빚기 시작한다.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회적 물의의 시초는 세조 때이다. 1465년(세조 11) 1월에 원각사(圓覺寺) 대종(大鍾)을 만들고 4월에 원각사가 낙성되었는데, 사장의 무리가 이 원각사를 내세워 백성의 재물을 약탈해 가고 있는 기록이 나온다. 『세조실록』에서 ‘약탈’이란 표현을 쓰고 있으나, 정작 이들이 하였음 직한 일은 거지를 방불케 하는 유랑인으로서 불교를 내세워 재물을 얻는 행위였을 것이다. 이를 지배층에서 ‘약탈’이란 강경 어조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런 폐해는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듯하다.311)전신재, 「거사고 : 유랑인 집단 연구, 서설」, 『한국의 생활 의식과 민중 예술』, 성균관 대학교 대동 문화 연구원, 1983, 231∼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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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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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을 통하여 조선 전기 거사들의 다양한 동태를 살펴볼 수 있다. 1465년(세조 11)부터 1513년(중종 8)까지 48년간 10여 차례에 나타나는 이들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의 집단이다.

•승려를 비롯해서 관리·군인·노비 등이 이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모두 조직에서 이탈된 사람이다.

•서울 및 지방에 존재하였다.

•생업을 버리고 부역도 회피하였다.

•남녀가 함께 거처하여 남녀 관계가 문란하였다.

•연화(緣化)를 사칭하여 백성의 재물을 탈취하였다.

•도성 안에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닌 사(社)를 짓고 불사를 행하였다.

•사기로 시장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징과 북을 치며 가무를 하였다.

이로써 조선 전기의 거사들은 속세를 방황하면서 끊임없이 불교 동네를 떠나지 않았던 유력한 불교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화를 사칭하여 백성의 재물을 탈취하였다.”라고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의 공식 견해였을 뿐, 민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던 불우한 측면으로 이해해야 옳지 않을까.

‘사를 짓고’라는 대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도 아니고 집도 아닌 그 무언가의 불교적 성소를 만들어 놓고 의례(儀禮)를 집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 승려와 차이가 있다면, 장사와 연희로 생존하였다는 변별성이 있을 뿐이다. 이들 기록을 보면 매우 많은 숫자의 거사들이 조선 전기에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불교사를 이해할 때, 이들 절에서 강제로 밀려난 집단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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