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2. 유랑 예인의 존재 양태, 연희와 매춘
  • 다양한 패거리들
  • 걸립패
주강현

풍물, 줄타기, 비나리(고사문서)를 놀았다고 한다.318)모갑이와 거사가 대개 걸립패의 화주(化主) 출신이 많았다는 남사당패 출신 전금배(1958년 사망)의 증언은 이들 집단 간에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심우성, 『남사당놀이』, 화산, 2000, 15쪽 재인용). 걸립패는 민간의 풍물굿패가 동네에서 걸립을 다닌 데서 비롯되었다. 애초에는 대동걸립으로 출발하였으되, 기량이 뛰어난 걸립패가 나오면서 차츰 이웃 동네로 걸립을 나갔고, 마침내 전문적인 걸립패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현존 일부 마을의 걸립패로 유추할 때, 전문적인 걸립패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을 걸립패와 다르게 유랑 걸립패는 무엇보다 비나리를 잘 하였다. 걸립패는 두 가지로 나누어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마을 굿패가 마을을 벗어나 인근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며, 특별히 걸립패만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20세기에도 곳곳에 걸립패가 존재하여 마을의 공동 비용을 염출하는 수단으로 널리 쓰인 데서 다른 연행 집단에 비한다면 매우 두레적·마을적인 속성이 바탕에 강하게 깔린 집단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걸립패의 뛰어난 재주꾼들은 아예 전업적인 걸립만으로 생존의 길을 모색하거나 다른 단체로 적을 옮겨 생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유랑 예인 집단으로서의 걸립패는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다. 화주(化主)를 우두머리로 삼고 비나리(고사꾼), 보살, 잽이, 산이(기예의 연희자), 탁발로 조직되었다고 하며, 불교적인 것과 관련이 깊었으리라. 걸립패에서 기획자 구실을 하던 화주들이 전문적 패거리로 들어가 역시나 같은 기획 일을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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