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2. 유랑 예인의 존재 양태, 연희와 매춘
  • 다양한 패거리들
  • 초란이패
주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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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중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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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매구밟기), 얼른, 죽방울받기, 초란이굿(가면극)을 놀았다고 전해진다. 초란이패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변강쇠전』에서 강쇠의 송장을 치는 데 조력하는 초란이일 것이다. 송장을 치우고 액땜을 해주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하던 하층민이었음 직하다.322)변강쇠전의 초란이 행색은 다음과 같다. 고전 교재 간행회, 『한국 고전 소설선』, 새글사, 1965, 407쪽. “구슬 상모 담벙거지 되게멘 통장고에 적없는 누비저고리 때묻은 붉은전대 제맛으로 어깨띠고, 조개장단 주머니에 주황사 벌매듭 조롱낭 동쌈지 차고, 청삼승(靑三乘) 허리띠에 버선코를 길게빼어 오메장 집신에 푸른헝겁 들메이고, 오십살(五十矢) 늘어진 부채 송화색 수건달아 털미에 어깨꽂고, 앞뒤꼭지 뚝내민놈 앞살없는 헌망건에 자개관자 굵게달아 당줄에 짓눌러쓰고, 굵은무명 벌통한삼 무릎아래 축처지고, 몸집은 짚동같고 배통이는 물항같고 도리도리 두눈구녁은 고리로 테두르고 납작한 코마루에 주석대갈(朱錫大曷) 총총박고 꼿꼿한 센수염이 양편으로 펄렁펄렁 반백이나 넘은 놈이 목소리는 새된 것이 비지땀을 배씻으며 헛침버썩 뱉으면서 ……” 그런데 조선 후기의 문헌 자료에 의하면, 초란이란 용례는 목우희(木偶戲), 가면과 함께 혼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보면,323)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牧民心書)』, 금포(禁暴). “방언초란이 역명산대(方言焦蘭伊 亦名山臺)”라고 하여 초란이와 산대가 동일한 호칭임을 알 수 있다.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초란이는 조그마한 귀신을 새겨 만들어 귀신을 쫓는다(쵸란이 小鬼刻爲形 以逐鬼).”라고 하여 초란이가 귀신을 쫓는 작은 가면이었음을 암시한다. 현존하는 하회별신굿놀이 탈에는 양반의 하인으로 ‘초랭이’라는 배역이 있다. 초랭이는 경망한 하인의 역으로 작은 가면을 쓰고 있으며, ‘초랭이 쉬염 같다’느니 ‘초랭이 떨음한다’느니 하는 속담이 하회동 일대에서 이어져 왔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324)이두현, 『한국 가면극』, 문화재 관리국, 1969,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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