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3. 유랑 예인의 근거지, 장시와 사당골
  • 청룡사와 불당골의 역사 민속지
주강현

유랑 예인의 현장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역적으로 불당골, 사당골 같은 지명이 산재하지만 실제로 남사당패의 과거를 알려 주는 현장은 거의 없다. 그러한 점에서 안성의 청룡사와 사당패들이 은거하던 불당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청룡사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민들을 통하여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구술을 청취할 수도 있고 안성 남사당패의 후예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에 안성은 유랑 예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다.

서운산에서 청룡사 쪽으로 청룡천이라는 내가 흐른다. 그 냇가를 중심으로 불당골이 존재하며, 청룡사는 불당골에서 지척 거리이다. 그러나 지척 거리임에도 분명히 일정한 상대적 거리를 유지한다. 우리가 안성 청룡사라고 하였을 때, 청룡사 내에 예인들이 실재 거주하였는가는 의심이 드는 대목인데, 이를 몇 가지 정황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기로 한다.342)주강현·이기복, 「구술로 본 안성 남사당패」, 『역사 민속학』 18, 한국 역사 민속 학회, 2004. 조사 방식으로는 청룡리 이장 김한기(남, 49세, 청룡리 거주, 마을 현황 제보), 청룡리의 고로인 이기선옹(남, 85세, 청룡리 거주, 청룡리 노인회장, 불당골 제보), 청룡사 주지 정안 스님(사찰 역사 및 현황 제보), 그리고 안성 남사당 보존회 김기복옹(남, 75세, 보개면 남풍리 거주, 안성 남사당 보존 회장) 등의 구술과 현장 조사에 기초하였다.

현재 청룡리는 45호이며 20여 년 전에는 60가구였다. 예전 농지였던 곳이 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되면서 농토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보상받고 떠났다. 청룡 저수지는 30여 년 전에 수년간에 걸쳐서 농업 기반 공사에서 공사를 한 바 있다. 청룡리는 모두 3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1반은 청룡리 본 마을이다. 청룡사가 위치하는 사하촌(寺下村)으로 절 바로 건너편에 형성되어 있다. 약 30여 호인데, 한산 이씨네 다성이다. 이혜구네가 이 마을 이씨이다. 이씨 집안은 복천 대군 후손으로 왕손이다. 본 마 을에 이씨네들이 지은 집이 한 채 있는데 명당이라고 한다.343)상량문으로 미루어 1797년(정조 21)에 지은 이해룡가(李海龍家)를 가리킨다. 그래서 그 집을 지키는 그 사람이 동네를 좌우한다고 믿는다. 정안 주지의 말에 의하면, 이씨네들을 빼놓고는 전부 스님들이 속화되면서 내려간 동네로 본다. 절집에서 ‘중노릇 못하고 내려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지금도 그렇다. 집터도 전부 절 소유이다. 이씨들이 왕족이니까 무덤을 쓰고 난 다음에 동네에 자리를 잡고 절의 산도 빼앗고 논도 빼앗았다고 한다.

2반은 부론리로 일곱 가구에 불과하며 밀양 박씨가 많이 산다. 3반은 불당골로 마을 입구에 청룡사 부도밭이 있다. 계곡이 가파르고 집터가 넉넉하지 않을뿐더러 집이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변변한 규모가 못되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임시 주거지 정도의 작은 촌락이 형성될 정도이지 큰 마을 입지는 전혀 아닌 척박한 곳이다. 다만 물 좋고 산 좋으며 은신하기에 좋은 곳으로 여겨진다.

이장의 말에 의하면, “본디 거지들이 사는 곳으로,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살았다.”라고 한다. ‘묵었다가 가는 곳’이라 하였다. 불당골은 토박이들이 전혀 없으며 현재의 음식점 등은 모두 후대에 들어온 것들이다. 불당골의 토박이들은 30여 년 전에 모두 떠났다. 불당골은 마을 입구에서 서운산으로 올라가는 계곡에 있다. 정안 주지는 “불당은 굿당이다. 지금은 없지만 예전부터 불당이라는 게 유명한 사찰에 다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장 도량이라든지 특이한 곳에는 불당이 있다. 불당에서는 굿을 한다. 사찰 터도 다 있고 불상도 모시고 암자도 모시고 봉안을 한다. 그리고 사람이 산다. 그 사람들은 비승들이 하였다. 불당골도 비승비속 가능성이 높다. 광복 이후에 사라졌다. 남사당패들이 살았다고 한다.”고 증언하였다. 불당에 비승비속의 무리들이 살면서 굿도 하였다는 말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씨네가 본 마을에 들어선 것은 조선조부터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이 김자점(金自點)이 올린 상소에 답한 대목이다. “청룡사는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내원당(內願堂)이니, 그 앞산에는 장사 지 내도록 허락해서는 안 될 듯하다.”344)『광해군일기』 권117, 광해군 7월 정축. 이미 국초부터 안평 대군이 원당으로 삼았던 곳이었으며, 실제로 이씨네는 무덤을 쓰게 된다. 산과 논을 빼앗았으며, 청룡사를 상징하는 못을 메우고 행패가 잦았다는 구전이 절에 전해진다. 국초의 원당이기는 하였으나, 이씨네의 힘이 강력하게 미쳤던 절 동네이다.

그런 점에서 왕손을 표방하는 청룡리 본 마을에서 떨어진 불당골의 비승비속적 사당 무리들은 천하의 상놈으로 인적 교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청룡리 전체적으로 청룡사의 스님들과 불당골의 사당 무리들이 같은 처지였다면, 이씨네의 세력권이 권력 축으로 반대에 대척적(對蹠的)으로 존재하였음 직하다.

본디 청룡사 대웅전 앞에는 민간 살림집과 흡사한 요사채가 1993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청룡사에 가보면, 그 집은 헐리고 정식 목조건물로 잘 지은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사당패가 청룡사에 거주하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사실 없다. 그러나 청룡사의 요사채를 잘 살펴보면 가람 배치라기보다는 살림집에 가깝다. 근자에 개축 보완된 부분이 아닌 그 이전의 요사채는 살림집 구조로 일반 요사채와는 격이 달랐다. 이는 이곳에서 일반 살림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믿는다.

기존 요사채 해체 과정에 관하여, “여기에 앉았던 건물들은 기본 건물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옮겨서 지었다. 헐었을 때 아무것도 없고 쓸모없고 전부 잡목이었다. 소나무는 별로 없고 전부 잡목. 다른 곳에서 옮겼다. 요사채는 그런 식으로는 앉지 않는다. 임시로 가까운데 그냥 만들었다. 사당애들이 여기서 살진 않았다. 요사채는 우리도 살기 좁아요. 어데서 임시로 재목을 가재다가 하였다.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정안 주지는 말한다. 변변한 목재를 쓰지 못하고 임시로 옮겨 지은 건물이란 뜻이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얼마 전에 부순 요사채 건물이 바로 남사당의 흔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건물은 일반 살림집에 가까운 집이었으며, 그런 건축물은 일반 사찰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양식이었다.

정안 주지는 “놀이는 저 앞에서, (불당골) 마당이 좁으니 절 마당에서 하지 않겠어요. 잠은 여기서 못 자고 천막을 쳤던지. 이 마을 같이 있으니까. 아무리 그 사람들이 이 절에서 살았겠어요.”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속단할 수는 없으나 남사당의 주 근거지가 인근 불당골이 틀림없기는 하지만 요사채 양식으로 볼 때 청룡사에서 안거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청룡사의 기본 입장과 생각은 불당이 옆에 있고 사당들이 살았겠지만 청룡사와 무관하였을 것이란 반응이다. 이는 불법을 수호라는 신성한 절이라는 보수적인 입장과 더불어 청룡사가 가난한 사당들에게 도움을 받을 만큼 가난하지 않았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도움을 안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안 맞거든요, 이치가. 보통 불당이라고 하죠. 바우덕이가 거기서 살았다고 하죠. 제가 아는 것으로는, 제가 여기서 살아보니까, 여기는 어찰(御刹)입니다. 원찰이 되면서 정부서 지원을 많이 하였습니다. 평택·안성·수원까지 땅이 수만 마지입니다. 노트에 기록해 놓은 것이 한 두름 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남사당패에게 시주를 받고 …… 물론 그분들이 시주는 하였겠지만, 이렇게 잘 사는 지역에서 그럴 일이 없습니다. 시주받을 이유가 없지요.

사찰에서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많은 토지 문서를 보유하고 있다.

•청룡사 토지 대장 도본(土地坮帳圖本) : 대정 4년(1915) 상월(上月) 본책(本冊). 토지 구획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문서이다.

•청룡사 산림 서류(山林書類) : 대정 5년(1916) 9월. 이후의 산림 현황을 적어 두었다.

•청룡사 토지 대장 : 대정 10년(1920) 5월.

•청룡사 전장기(傳掌記) : 대정 10년(1921) 원월(元月). 재미있는 것은 이 문서 표지에 ‘소화 18년(1943) 7월 19일에 해군부에 유기 헌납을 한 후에 이를 기록한 것이 첨부되어 있다고 다른 글씨로 누군가 적어 두었다는 점이다.

•청룡사 추수기(秋收記) : 소화 17년(1942). 글자 그대로 추수한 기록으로 작인들이 명시되어 있다.

•기타 : 해방 공간 및 근년의 문서가 다수 있으며, 대학 노트 등에 적어 둔 별도의 기록물도 존재한다.

이들 문서 중에서 1916년의 대장을 그림으로 살펴보면, 토지 소유지의 범위가 매우 넓다. 서운면 청룡리 외에도 산평리(山坪里), 송정리(松亭里), 미양면 공도면 개정리(開井里), 행정리(杏亭里), 진사리(珍沙里) 그리고 서운산 건너편 석남사 근역에도 논밭이 산재하였다. 이들 문서로 본다면,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의 청룡사 토지 소유는 상당한 수준이었음이 분명하다. 광복 이후로는 농지 개혁으로 환지가 되고 또한 땅을 팔아먹어 대거 줄어들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토지 현황을 알 길은 없다. 1720년 사적비가 조성되기 직전에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다. 그 불사 이전에는 오랫동안 황폐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혹시나 무너진 옛 절터에 사당패들이 먼저 들어와 살던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하여간 1720년 이후에 100여 년 뒤인 1824년, 그리고 1863년, 1887년에 크고 작은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시기는 유랑 예인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절이며, 안성의 두레들이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기 시작한 시점은 1865년이다. 어쩌면 바우덕이네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며 이름을 드높였던 시절도 이쯤이다. 물론 어떤 더 이상의 증거들이 없어서 이 부분 역시 이쯤에서 서술을 멈추어야 한 다. 그러나 사당패들이 절의 중창에 상당한 이바지를 하였음 직한 것은 1720년 사적비에 거사들 명단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다음은 정안 주지의 증언이다.

남사당이라는 게 밥도 못 먹습니다. 여자들도 창녀도 하고 밥도 못 먹는데 어떻게 사찰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더불어 사니까 시주는 조금 하였겠지만, 이웃 간에 나누어 주고 하였겠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그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는 없지요. 일 년에 한 번 밥을, 괘불을 걸어 놓고 야단법석을 하면 이 근방뿐 아니라 전국에서 놀러 오질 않습니까. 당시에 극장이 있습니까, 노래방이 있습니까, 그것밖에 없거든요. 여기서 오면 여기서 전부 숙식을 다 해주는 것이지요. 쌀은 많겠다. ……

일면 맞는 말이다. 남사당은 곤궁하여 제대로 팔지 못하면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찰이라고 하여 충분한 돈이 있었는지는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앞의 이씨네 등쌀에도 청룡사는 견디기 어려웠으며, 중창에 중창을 거듭하여 앞의 문서에 등록될 정도의 땅을 마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김기복의 구술 증언이다.

절 걸립을 허가를 내고, 화주는 말 잘하는 사람들, 스님이 앞장서고(화주승), 옛날에는 걸립 아니면 안 되니까 걸립을 끼고…… 그때 당시에는 절에서 왔다고 하면 잘 해줬지. 시주도 잘하고. 절 걸립은 으레 남사당을 껴서 하면 막 훑는 거야. 그러면서 돈이 모이니까, 그 언저리 땅도 사고, 그 시초는 그런 거야. 난 그렇게 봐. 불당골, 옛날에 가보니까 순 돌덩이야, 임시로 축대로 쌓아서 살았던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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