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1장 사찰의 공간 구성과 석조물의 상징
  • 1. 가람 배치와 전각
  • 가람 배치
  • 일탑삼금당형
박경식

일탑삼금당형(一塔三金堂型)은 중앙에 위치한 탑을 중심으로 세 곳에 금당을 건립하는 배치 방식으로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를 수용한 이래 375년(소수림왕 5)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였다. 이후 392년(광개토대왕 2)에는 평양에 아홉 개의 사찰을 지었고, 498년(문자왕 7)에는 금강사를 창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영류왕 때에는 중대사, 진구사, 유마사, 연구사, 대승사, 대원사, 금동사, 개원사 등의 사찰이 있었음을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밖에 연복사, 영탑사 등의 사찰 이름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도 불교 전래 이후 지속적으로 사찰이 건립되었으나 가람 배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937년에 진행된 평양 근교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남향한 사찰의 윤곽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팔각 목탑지(八角木塔址)를 중심으로 동·서·북쪽에서 각각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 자리가 확인되었다. 이후 1939년에 발굴 조사한 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 및 1974년에 북한이 조사한 정릉사지(定陵寺址)에서도 모두 팔각형의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금당을 두고, 남쪽으로는 남문(南門)이 위치하고 있음이 확인된 바 있다. 이 같은 발굴 조사 결과를 볼 때 고구려시대에 건립된 사찰에서는 모두 일탑삼금당식의 가람 배치가 성립되었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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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리사지 가람 배치도
청암리사지 가람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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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스카사 가람 배치도
일본 아스카사 가람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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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구려에서 확립된 일탑삼금당식의 가람 배치는 백제와 신라로 전파되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유사한 실례를 남기고 있다. 백제가 건립한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는 삼탑삼금당(三塔三金堂)식 가람 배치가 확인된 바 있다. 이곳에서는 각각 독립된 세 개의 원(院)을 구성한 뒤, 각 원에는 탑과 금당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중앙에는 목탑을, 동·서쪽에는 석탑을 배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가람 배치는 미륵사지에서만 확인된 점으로 보아 백제의 창안으로 볼 수 있지만, 고구려에서 확립된 일탑삼금당식 가람 배치가 백제로 전해져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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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복원 상상도
미륵사지 복원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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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역시 황룡사지(皇龍寺址)와 분황사(芬皇寺)에서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이 중 황룡사지에서는 고구려와는 달리 9층 목탑의 북쪽에 세 개의 금당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 역시 같은 예가 확인된 바 없 어 신라의 창안으로 볼 수 있지만, 아마도 고구려의 가람 배치가 신라로 전파되어 변형된 일탑삼금당제의 한 유형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에서 확립되어 백제 및 신라에 영향을 주었던 일탑삼금당의 가람 배치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나라(奈良)에 있는 아스카사(飛鳥寺)의 가람을 구성하고 있다. 아스카사는 일본 최초의 사찰로 592년(崇峻天皇 5)에 법당과 회랑을 기공하고, 596년에는 탑이 준공되었으며, 606년에 장륙석가상(丈六釋迦像)이 안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사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평면 방형의 목탑을 중심으로 북·동·서쪽에 각각 금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식 가람 배치였음이 밝혀졌다. 고구려가 팔각 목탑을 건립한 반면 아스카사에서는 방형 목탑을 건립한 점만 다르며, 건물의 배치는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 배치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의 초기 불교 문화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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