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1장 사찰의 공간 구성과 석조물의 상징
  • 1. 가람 배치와 전각
  • 가람 배치
  • 일탑일금당형
박경식

일탑일금당형(一塔一金堂型)은 백제에서 완성한 가람 배치의 한 양식으로 남향한 사역 내에 남문,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차례로 세우고, 주위를 회랑(回廊)이 감싸고 있다. 탑이 한 기만 건립되어 단탑 가람(單塔伽藍)이라고도 한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 초전(初傳)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 주변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불교 유적은 없다. 이후 공주를 거쳐 부여로 천도하면서 사찰 조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성왕은 불교를 진흥하면서 수많은 사찰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시대에 건립된 사찰로는 왕흥사, 칠악사, 오합사, 천왕사, 도양사, 백석사, 미륵사, 호암사, 북부 수덕사, 보광사, 오금사, 경복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사찰은 기록에 명칭만 보일 뿐 일부를 제외하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현재까지 백제시대의 사찰로 정확한 위치가 밝혀진 것은 익산 미륵사지, 부여 정림사지,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가탑리사지, 금강사지, 대통사지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이 중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가람 배치가 확인된 사찰은 미륵사지,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정림사지, 동남리사지(東南里寺址)뿐인데, 미륵사지를 제외한 두 개소의 사지에서 공통된 가람 배치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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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리사지 가람 배치도
군수리사지 가람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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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 가람 배치도
정림사지 가람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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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는 발굴 조사 결과 삼탑삼원식(三塔三院式) 가람 배치로 밝혀졌는데, 이는 고구려에서 확립된 일탑삼금당식 가람 배치를 수용해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군수리사지는 부여읍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지는 1935년과 이듬해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는데, 남쪽으로부터 중문, 탑,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강당의 좌·우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鐘樓)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확인되었다.

정림사지는 부여읍 한복판에 위치한 평지 가람으로 1942년에 실시된 발굴 조사 때 ‘대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大平八年戌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나와 이곳이 정림사였음이 밝혀졌고, 1979년에 실시한 발굴 조사에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남향의 축선을 중심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차례로 배치되고, 주위를 회랑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임이 확인된 바 있다.

이처럼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처럼 백제에서 완성된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는 일본으로 전해져 고구려와 같이 초기 일본 불교 문화를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가람 배치를 백제식 가람 배치라 하는데, 아스카시대(飛鳥時代)에 건립된 많은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탑식 가람 배치는 백제에서 발전 정착된 이래 일본으로 전해져 초기 불교 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인 9세기에 들어 절대다수의 사찰에서 단탑 가람이 건립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9산선문의 확립으로 인해 사찰이 평지에서 산지로 옮겨 가 사찰의 규모가 외형적으로 축소된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것은 신라 하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단탑 가람의 건립을 촉진시킨 결과일 것이다. 고려시대 이후에 세운 사찰의 절대다수가 단탑 가람인 점을 볼 때 백제에서 완성한 이 유형의 가람 배치는 우리나라의 사찰 조영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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