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2장 현세 구복의 불교 미술
  • 1. 현세에 복 받기를 바라다
강희정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종교 미술에서 조각이나 회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에 대한 답은 다양할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종교가 존재하는 곳에 종교 미술이 있었고, 종교 미술은 기본적으로 각 종교의 이념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각이나 회화라는 형태로 표현된 종교 미술은 대부분 예배 대상을 소재로 삼았고, 공예품은 예배 의식에 사용하는 의식 용구였으며, 다양한 장식적 요소는 종교 미술을 꾸며 주는 역할을 하였다. 우상 숭배(偶像崇拜)를 금기시한 이슬람교를 제외하면 기독교나 불교, 힌두교는 모두 성상(聖像)을 만들었고, 그 앞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의식을 치렀으며, 개인적인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교는 예배를 보기 위한 공간으로 건물이 필요하였고, 전 시대에 걸쳐 그 건물 외부와 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미술 활동이 일어났다. 건축물은 신앙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이자 다양한 종교 미술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공간이다. 그러므로 조각, 회화, 건축을 각각 쟝르별로 살펴보는 것도 유용하지만 장르에 관계없이 복합적인 종교 미술로 함께 바라볼 필요도 있다.

예배와 수행을 위하여 사찰이라는 공간을 창조해 내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신앙 활동을 하였던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신앙 행위를 영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었던 사찰의 전각과 탑, 그 안에 봉안된 불상과 불화 등 조형물들은 각 시대마다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사찰을 중심으로 한 불교 문화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각 세계를 만들어 냈다. 불교의 시각 문화도 ‘누가, 언제, 왜’라는 의문에서부터 먼저 접근을 시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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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행히도 사찰의 시각 문화를 보여 주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조형물에는 제작자, 혹은 예술가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근래 들어 활발하게 연구되는 조선 후기의 불교 미술 중에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한 화승(畵僧)을 알 수 있는 예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전체 불교 미술을 생각하면 미미한 숫자일 뿐이다. 서양 미술이나 회화에서처럼 예술가에 대해 알아보기가 어렵다면 관점을 바꾸어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교 조각이나 회화는 그 자체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거나, 발원문(發願文)을 적은 경우가 있어서 상을 조성한 목적이 알려진 작품이 적지 않다.

이들 명문을 살펴보면 불교 미술을 제작하도록 후원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내세(來世)를 위한 것과 현세(現世)를 위한 것이다. 우선 내세를 위해 불상을 만든 이유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후 세계에 대한 불안감과 내세에서라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세를 위한 기원은 신앙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지금’, ‘현재’를 위한 것이다. 현세에서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신앙을 현세 구복(現世求福), 혹은 현세 기복(現世祈福) 신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불교가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기복 신앙이 강하였다는 것은 이미 일찍부터 지적되었다. 내세를 지향한다거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보다는 당장 자기 앞에 닥친 재난이나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앙이 우선시되었다는 것이다.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가 고구려에 처음 전래되고, 백제와 신라에도 순차적으로 불교의 복음이 전해졌다. 개인이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면 불타(佛陀, Buddha)가 된다는 독특한 성격의 종교가 전해졌을 때,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 불교는 정령(精靈), 동물, 자연신 등 인간이 아닌 어떤 대상이나 조상 신격, 신화적 존재 등을 섬기고 숭배하던 이전까지의 신앙 체계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종교였음이 분명하다.36)이주형, 「한국 고대 불교 미술의 상(像)에 대한 의식과 경험」, 『미술사와 시각 문화』 1, 사회 평론, 2002, 15∼20쪽.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것에 익숙하였던 당시 사람들에게 스스로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해서 득도(得道)하고, 그 결과 인간의 굴레인 윤회(輪廻)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론은 어찌 보면 황당무계(荒唐無稽)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기록에 보이는 불교 전래는 공식적인 전래를 의미하는 것일 뿐, 실제로 민간에는 더 일찍 알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공식적인 불교 전래는 왕실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을 뿐이지만, 당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의 성격은 전래 당시에 어느 정도 방향이 정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자신의 사절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와 경문, 불상을 보 냄으로써 불교가 전해졌다는 것은 중국 화북 지방의 불교처럼 ‘위로부터의 불교’, 즉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불교라는 성격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고구려에서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는 점이다.37)『삼국사기(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6, 고국양왕(故國壤王). 『삼국사기』에는 391년(고국양왕 8) 3월에 왕이 위와 같이 하교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물론 왕명이 있었다고 해서 개인의 특수한 신성(神聖) 체험까지 포괄하는 신앙이 명에 따라 쉽게 규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한다.”는 간단명료한 명제는 쉽게 사람들 뇌리에 파고들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이 수행을 쌓아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을 중시한,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 자체의 성격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국에서 전개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점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불교 본래의 의미를 따른다면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으라.”는 명이 있었어야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어떤 과정을 거쳤든지 불교는 복을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먼저 삼국시대 때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는 삼국시대의 불교 관계 기록에 한 개인의 수행이나 득도에 관한 이야기만큼 복이나 선업(善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복을 구하려는 경향은 삼국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통일신라는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요한 성격이다.

현세 구복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미술 문화는 어떤 것이며, 어떤 성격을 보여 주는가? 우리 불교 미술이 이루어 낸 시각 문화를 현재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만으로 판단해야 하는 점이 아쉽기도 하고, 우리 불교 문화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미리 밝혀 두고자 하는 것은 불교 미술을 이해하는 데 각 쟝르를 구분하여 생각하는 점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근대적인 ‘미술’의 개념을 전제로 미술 각 쟝르를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으로 나누어 생각하 지만, 이러한 분류가 언제나 옳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신성한 예배 공간이나 수행 공간을 중심으로 한 종교 미술은 오늘날 우리 생각보다 훨씬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구상 아래 창조되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전체 사찰의 시각 문화를 담당한 사람은 전체 건물 내에 불상이나 보살상, 혹은 사천왕상이 모셔질 위치를 미리 정하고 상을 만들어 제 위치에 봉안하였을 것이다. 또 전각 내의 벽이나 주존불(主尊佛) 뒤에 걸기 위한 탱화나 벽에 그리는 벽화는 제각각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따로 있었고, 주제에 따라 그림들이 자리 잡아야 할 적절한 위치가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감상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 회화는 처음부터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치 오페라나 뮤지컬을 만들고 관람하는 것처럼 종합적인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는 오페라나 뮤지컬, 혹은 드라마 중 어느 것도 노래 따로, 음악 따로, 무대 배경 따로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중에는 현세 구복적인 미술도 있고, 내세를 위한 미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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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해인사 묘길상탑 출토 토제 소탑
전 해인사 묘길상탑 출토 토제 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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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에서 복을 구하는 현세 구복 신앙에 따른 미술 활동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느 쪽이든지 여기서 거론하는 신앙과 기원은 대개 직접적으로 불교 미술을 창조해 내는 예술가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예술 활동을 후원한 사람의 처지에서 말하는 것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세 구복의 미술 활동 중 한 가지는 현세에서 선업을 쌓으려는 목적에 따른, 이 른바 ‘복 짓는’ 신앙 행위 가운데 하나이고, 다른 한 가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원을 하면서 조상(造像)이나 조탑(造塔) 활동을 하는 것이다.

전자, 즉 ‘복 짓는’ 의미에서 벌이는 조형 활동은 불전(佛典)에 나오는 그대로 탑을 세워 봉헌하는 조탑, 상을 만드는 조상이라는 행위를 통해 공양하는 것이다. 현세에 선업을 쌓음으로써 내세에 과보(果報)를 받으려는 것도 크게 보면 현세 구복의 신앙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내세에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거나, 복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현재’의 그들에게 심어 주기 때문이다. 후자는 명문에서 밝히는 대로 한 개인이나 일족, 혹은 신앙 집단의 특정한 기원을 위해 불상이나 불화를 만들도록 시주(施主)한 것이다. 물론 불교 미술에 써 있거나 새겨진 명문이 상(像)의 후원 배경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전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문자로 된 기록만으로 현세 구복의 불교 미술이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조상기(造像記)나 명문을 살펴서 현세의 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긴 불교 미술을 기원 내용에 따라 살펴보고, 명문이 없어도 현세 구복 미술로 판단되는 예들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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