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2장 현세 구복의 불교 미술
  • 2. 관음보살을 청하다
  • 관음이시여, 지금 이 자리에
강희정

자신을 필요로 하는 중생들에게 응답하는 관음의 권능이 더욱 빛나는 때는 언제였을까? 집에 불이 났다거나 도적을 만났을 때와 같은 개인적인 위험보다는 아마도 역병(疫病)과 기근(饑饉)처럼 천재지변에 가까운 상황에서 관음이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기원을 관음에게 전달하고, 그의 응답을 어떤 방식으로 받고자 하였을까?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관음을 청하는 의식을 규정한 『청관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주경(請觀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呪經)』(이하 『청관음경(請觀音經)』으로 약칭)이다.40)강희정, 「중국 고대 양류관음 도상의 성립과 전개」, 『미술 사학 연구』 232, 한국 미술사 학회, 2001. 경전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경전은 인간에게 미칠 해악을 없애 달라고 주문을 외워 관음을 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5세기 초에 한문으로 번역된 『청관음경』에 따르면, 인도에 있었던 바 이샬리(Vaiśālīi, 毘舍離)라는 나라에 심한 전염병이 돌자 사람들이 전염병의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며 석가모니에게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서방에 무량수불과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있으니 관음보살에게 기원하라고 권하였다. 바이샬리국 사람들이 ‘버드나무 가지와 깨끗한 물(楊枝淨水)’을 관음보살에게 바치자, 자비로운 관음보살은 일체중생을 가엾고 불쌍히 여겨 이 소복독해다라니(消伏毒害陀羅尼)라는 주문을 가르쳐 주었다. 관음의 이름과 주문을 외우는 의식은 관음이 중생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들에게 내려와 구원해 주도록 청하는 것이다. 이로써 관음의 구원을 받은 바이샬리국 사람들은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확대보기
관음보살 입상
관음보살 입상
팝업창 닫기

경전의 주된 내용은 관음보살이 고난에 빠진 중생을 위하여 네 가지 신통한 주문(神呪)을 가르쳐 주고 관음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게 함으로써 인간을 구제해 준다는 것이다. 『청관음경』에는 인간이 겪을 만한 온갖 재난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그 재난에서 벗어나려면 관음의 이름과 각각의 재난에 맞는 주문을 계속해서 외우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청관음경』에서 거론하는 재난은 대부분 『법화경』 보문품에 나오는 것들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러므로 『청관음경』은 주로 『법화경』을 중심으로 전개된 관음 신앙을 의식을 통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신앙의 방법을 알려 준 경전이다.

『청관음경』에 의거하여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의 관음보살상을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 한다. 주로 주술적인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양류관음은 다른 형상의 관음상보다 늦게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6세기 말경에 처음 제작되었다.41)강희정, 「백제 양류관음상고-호림 박물관 소장 양류관음상 2구를 중심으로-』, 『미술 자료』 70·71, 국립 중앙 박물관, 2004. 삼국 가운데 병을 낫게 해준다는 치병(治病)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 양류관음을 먼저 만든 나라는 백제였던 듯하다.

호림 박물관(湖林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양류관음상은 전체 높이가 16.7㎝에 지나지 않는 작은 조각으로, 관음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똑바로 서 있는 모습이다. 머리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삼면 보관을 썼는데 마모가 심해서 화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관음보살의 둥글고 원만한 얼굴에는 양감이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상당히 입체적으로 보인다. 특히, 눈두덩의 폭이 넓고 둥글게 부풀어 있어서 부은 것처럼 튀어나온 것은 대개 백제의 불상이나 보살상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오른손을 위로 들어 버들가지를 잡았고 왼손은 허리보다 약간 아래에서 정병을 움켜잡았다. 발목까지 내려와 찰랑거리는 옷이 자연스러워 보이며 주름도 자연스러운 편이다. 이 보살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영락(瓔珞) 장식인데, 보살의 양쪽 어깨에 있는 둥근 장신구에서 흘러내린 영락은 허리 가운데서 직사각형의 장식으로 모아졌다가 다시 두 다리로 나뉘어 Y 자가 거꾸로 뒤집힌 것처럼 보인다.

확대보기
관음보살 입상
관음보살 입상
팝업창 닫기

두 손의 지물이 파괴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두 팔의 자세와 위치로 미루어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관음보살상이 국립 부여 박물관에 있다. 충남 예산군 교촌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진 이 관음보살상은 어깨가 당당하고 허리는 잘록하며 입체적인 조형 감각이 두드러진다.42)국립 부여 박물관, 『국립 부여 박물관』, 국립 부여 박물관, 1997 참조. 부드럽고 곡선적인 모델링과 작지만 양감이 잘 표현된 인체, 둥글고 원만하게 표현된 관음의 자비로운 얼굴은 백제 지역에서 만들었음을 알려 준다.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을 만들어 바이샬리국 사람들처럼 역병을 물리치거나 중생이 처한 고난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란 이들은 백제 사람들이었다. 원래 『청관음경』에서 설명하는 대로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양류관음을 만들고,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서 특수한 의식 공간을 만들고 주문을 외우는 등 특정한 의식을 치르는 것을 ‘양지정수법(楊枝淨水法)’, 혹은 ‘청관음법(請觀音法)’이라고 했다.43)『아사박초(阿娑縛抄)』 권84,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도상편(圖像編) 제9권, 164b ; 松本榮一, 『敦皇畵の硏究』, 東方文化學院 東京硏究所, 1937, 626∼631쪽.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제단을 만들어 청관음법의 의식을 치를 때는 의식이 진행되는 바로 그 장소에 관음이 내려와 주기를 틀림없이 갈망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리라는 것을, 양류관음을 만들어 예배하고 그 앞에서 주술적인 의례를 치름으로써 확신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재난에서 고통을 받으며 구원의 손길을 갈망하던 신도들에게 그 누구의 어떤 백 마디 말이나 설법보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관음보살상의 실체가 훨씬 믿음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청관음경』이 어떤 경로로 고구려, 신라가 아닌 백제에 들어와 유통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청관음경』과 이에 기반을 둔 양류관음의 도상이 백제에 유입된 배경에 대해서는 백제와 중국 남조(南朝)와의 긴밀한 관계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듯하다. 백제가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고 고구려에 견줄 정도로 나라의 힘을 키우는 과정에서 중국 남조의 나라들, 즉 동진(東晋), 양(梁) 등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로 백제의 왕들이 남조에 사신을 보내거나 반대로 남조에서 사신이 오기도 하였고,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남조 미술의 영향이 보이는 것도 백제와 남조의 친밀한 관계를 뒷받침한다. 현세의 온갖 위험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쳐 주는 고마운 관음보살에 대한 열렬한 신앙은 남북조(南北朝)시대인 5∼6세기에 빠른 속도로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고, 바로 백제로도 전해졌다.

과연 관음보살은 도대체 어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일까? 옆집에 큰불이 났는데도 일념으로 관음보살을 부르자 자기 집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온갖 재난 속에서 구제해 주는 다양한 관음보살의 영험담을 모아 놓은 기록이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이다. 『관세음응험기』 중에는 백제의 승려 발정(發正)이 양나라로 유학 갔다가 백제로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다.44)牧田諦亮, 『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の硏究』, 平樂寺書店, 1970, 58∼61쪽. 발정은 관음보살이 중요하게 나오는 『법화경』을 아주 중시한 승려였다. 그가 정확하게 언제 양나라에 가서 언제 백제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6세기 초엽에는 돌아왔을 것이다. 그가 돌아온 때는 무령왕(501∼522)대였는데, 동성왕대인 5 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백제에서는 기근과 역병이 계속 일어나서 수천 명의 백성이 고구려나 신라로 도망을 갔다.45)이병도 역주(譯註), 『삼국사기』, 백제본기, 을유문화사, 1977, 398∼418쪽 참조. 이처럼 무수한 백성이 이웃 나라로 도망을 갈 정도로 기근과 역병이 심각하였다면 백제 조정에서는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기근과 역병을 먼저 퇴치해야 하였던 백제 왕실에서도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양류관음에게 지성을 다해 빌지 않았을까.

관음보살이 전염병을 물리쳐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의약 체계가 발달하지 못해 한번 병이 들면 속수무책이었을 고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한번 전래된 『청관음경』과 양류관음의 신앙 및 의식은 쉽게 보급되었고, 한 손에 버들가지, 다른 한 손에 정병을 든 관음상도 적지 않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청관음경』에 기반을 둔 신앙의 핵심은 병을 고쳐 주는 관음의 치병 권능(治病權能)에 기대는 것이다. 실제로 『고승전(高僧傳)』에는 버들가지로 물을 뿌림으로써 병자를 낫게 하였다는 중국의 고승 불도징(佛圖澄)과 기역(耆域)이라는 사람의 일화가 실려 있다.46)『고승전(高僧傳)』, 『대정신수대장경』 권50, 388b. 양류관음의 위대한 능력이 일차적으로 병을 고치는 치병에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역병이 돌았을 때라든가, 전쟁이나 기근으로 역병이 심각해질 위기에 처하였을 때, 특히 양류관음을 활발히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청관음경』에서 거론한 대로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는 양류관음상은 남아 있는 예가 앞에서 거론한 몇 점에 지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제작된 유명한 불화가 잘 남아 있다. 혜허(慧虛)가 그렸다는 명문이 있는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에서 볼 수 있듯이 서 있는 자세로 한 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다른 손에 감로수가 담긴 정병을 들고 있는 관음의 모습은 앞에서 거론한 양류관음 조각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 준다.

혜허의 양류관음도는 물방울 모양의 광배 안에 섬세한 필치로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관음 입상을 그린 것으로 고려 불화의 백미(白眉)라는 찬사 를 받고 있다. 관음의 뒷면에는 아무런 배경도 없어서 마치 허공에 홀연히 나타난 관음보살을 보는 듯하다. 관음이 나타난 것은 그의 발아래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배례(拜禮)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감응(感應)한 것이다. 자비로운 관음의 부드러운 시선이 선재동자에게로 향하고 있으며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는 우아한 손놀림도 선재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회화는 세부 표현에 제약을 받는 조각과 달리 화가가 원하는 것을 모두 묘사할 수 있다. 양류관음도 역시 삼국시대의 양류관음상과 달리 머리의 보관부터 그가 딛고 선 연꽃까지 화려하고 세밀하게 꾸며졌다. 머리끝부터 온몸을 휘감아 흘러내린 얇디얇은 비단 천의 사이로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내밀어, 관음보살은 중생의 어떤 기원도 다 들어줄 듯하다.

확대보기
양류관음도
양류관음도
팝업창 닫기

물방울 모양의 광배를 뒤로하고 서서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관음보살의 형상은 원래 중국 북송의 불교 미술에 기원을 둔 것이다. 조각으로 남아 있는 중국의 관음상 가운데 이른 시기의 것은 많지 않으나 쓰촨성(四川省) 다쭈 석굴(大足石窟)의 예가 있고, 북송대의 판화 중에도 유사한 예가 있다. 『화엄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도해(圖解)한 북송의 판화는 판화를 새기던 당시까지 유통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불교 미술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물방울 모양의 광배가 그려진 양류관음의 기원은 적어도 당대(唐代)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도상이나 형식의 기원이 중국에 있다고 해서 우리 미술의 독창성이나 개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형태는 외국에서 전해졌다고 해도 그것을 기반으로 재현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었다. 특히, 혜허의 양류관음도에서 보이는 섬세하고 우아한 필치, 기품 있는 관음의 자태,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필선의 묘미는 고려 미술의 창의성과 화가의 역량을 잘 웅변해 준다.

혜허의 양류관음도처럼 화려하고 기품 있는 관음을 묘사한 예를 역시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서 볼 수 있다.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곁에 두고 있어서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원을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의 또 다른 관음 그림이 바로 바위산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이다. 수월관음도에서는 버들가지를 직접 들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고, 대부분 관음이 걸터앉아 있는 바위의 한편에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을 놓아 둔 모습으로 그렸다. 물에 비친 달의 모습을 내려다본다는 시적인 의미를 담은 수월관음도는 관음 뒤의 둥근 광배가 마치 둥실 떠오른 보름달처럼 묘사되었다.

수월관음도 역시 당대의 유명한 궁정 화가였던 주방(周昉)이 처음 그렸다는 기록이 당대의 화론서(畵論書)인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실려 있다. 그러나 실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간단한 기록만으로는 그가 그렸다는 수월관음이 어떤 형상이었는지 알 수 없다.47)강희정, 「고려 수월관음도상(水月觀音圖像)의 연원에 대한 재검토」, 『미술사 연구』 8, 미술사 연구회, 1994 ; 박은경, 「일본 매림사 소장의 조선 초기 ‘수월관음보살도’」, 『미술사 논단』 2, 성강 문화 재단, 1995, 391∼414쪽. 현재 전해지는 중국의 수월관음도는 대개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 발견된 그림이나 안시(安西) 유림굴(楡林窟) 등에 남아 있는 벽화로 고려의 수월관음도와는 다른 그림들이다. 그러므로 수월관음의 연원이 비록 당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고려의 그림이 당나라 것을 직접 모델로 삼아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혜허의 양류관음도처럼 판화나 경전화 같은 형태로 기본적인 관음의 형식이 전해지고, 이를 기반으로 고려 화가가 귀족적인 세련미를 보여 주는 관음의 현신으로 재창조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확대보기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팝업창 닫기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불화 가운데 대다수는 일본에 있다. 수월관음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그림도 일본의 가가미 진자(鏡神社)에 소장되어 있는 수월관음도이다. 1310년(충선왕 2)에 그린 이 불화는 채색이 떨어진 부분이 많고, 훼손된 부분도 있어서 본디 모습은 많이 잃었지만 원래 얼마나 화려한 그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관음보살은 작은 화불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험난하기 그지없는 바위 위에 가느다란 풀잎을 쌓아 방석처럼 깔고 앉아 있다. 오른쪽 발로 연화를 밟고 왼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 위에 얹어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데, 오른팔은 튀어나온 바위 모퉁이를 팔걸이 삼아 기대고, 왼팔은 왼쪽 무릎에 올려놓은 자세가 아주 편안하게 보인다. 흰빛이 도는 투명한 비단인 사라(紗羅)가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상반신 위로 흘러내려서 관음의 고귀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하늘하늘한 천의 사이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영락 구슬로 장엄된 관음의 왼손 가까이에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 있어서 양류관음의 도상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관음 뒤로 둥근 광배가 하얗게 빛나는 것이 마치 보름달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수월관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중국 둔황 석굴에서 발견된 수월관음도 중에는 고려의 수월관음도와 구도는 거의 같으나 양손에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는 그림이 있다. 이러한 그림은 수월관음이 기본적으로 양류관음보다 늦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양류관음의 전통을 따라서 그렸음을 보여 준다. 버들가지를 손에 들고 있는 양류관음이 현실적인 구복 신앙(求福信仰)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으로, 양류수(楊柳手)를 한 수월관음을 그림으로써 병을 고치려는 바람과 아들을 얻기 바라는 구자(求子)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둔황에서 발견된 수월관음도 중에는 구자나 아기를 무사히 낳게 해달라는 순산(順産), 즉 안산(安産)을 기원하는 명문이 있는 것이 여러 점 있다.48)林進, 「高麗時代の水月觀音圖について」, 『美術史』 102, 慶應義塾大學校文學部 美術史學會, 1977.3, 101∼117쪽. 따라서 고려의 수월관음도 역시 치병, 구자, 안산과 같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염원을 담아 그린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앉은 자세가 안락하고 편안한 데에 비하면 관음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그다지 아늑해 보이지 않는다. 화가는 관음 주변의 바위를 그릴 때, 붓의 방향을 계속 바꾸어서 작고 날카롭게 각이 진 형태로 만들어 기괴하고 환상적 인 느낌을 자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관음보살 옆 대나무 주위와 관음보살의 머리 위쪽의 울퉁불퉁한 바위를 꼭 암굴(巖窟)처럼 보이게 한 것은 일종의 관음굴(觀音窟) 신앙과 관련 있다. 흔히 험난한 바위 가운데 앉아 있는 관음을 보타락산(補陀落山, Potalaka산의 음역(音譯)으로 보타산이라고도 함) 관음이라고 한다. 보타락산 관음은 『화엄경』에서 진짜 관음(觀音眞身)이 보타락산에 살고 있다(住處)고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화엄경』에는 구도의 길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선재동자 이야기가 나온다. 관음보살을 찾아가려는 선재동자에게 관음의 거처가 남방의 보타락산이라 하고 남방의 바다 위 험난한 산에 꽃나무가 가득하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청정한 곳이라고 알려 준다. 가가미 진자에 소장되어 있는 수월관음도에서 관음 주위를 에워싼 험난한 바위산과 발아래 연꽃이 피어난 모습은 바로 선재동자가 오랜 고생 끝에 도달하였을 보타락산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위로 깨달음(菩提)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이 되기 위한 수행을 하기 위하여 어떤 고된 여정도 마다하지 않는 나이 어린 선재가 수월관음도에서는 드디어 관음보살을 직접 친견하고 그의 발아래 배례하는 것이다.

일본 교토 센오쿠하코칸(泉屋博古館)에서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 역시 가가미 진자에 소장되어 있는 수월관음도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선재동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관음을 뵈러 올라갔을 보타락산의 기교를 부리지 않은 바위 표현은 오랫동안 이어진 청록 산수(靑綠山水)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다. 청록 산수는 청색과 녹색을 주조로 산과 바위를 그리는 방법으로, 먹을 위주로 그리는 수묵(水墨) 산수와 달리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마다하지 않고 스승을 찾아다니는 선재의 고행은 말하자면 보살이 되기 위한 공부의 길이자 현세에서 자기 자신을 수행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복을 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보살행(菩薩行)’을 닦기 위 한 것이지만, 넓게 보면 현세에서의 만족을 얻기 위한 신앙에 포함될 수 있다. 오로지 보살로서 수행하기 위하여 기나긴 역정(歷程)의 길을 걷고 있는 선재의 눈에 비친 대자대비 관음보살의 자태는 또 얼마나 고결하게 보였을 것인가.

확대보기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팝업창 닫기

센오쿠하코칸 소장의 수월관음도는 앞의 수월관음도보다 보존 상태가 훨씬 좋으며, 그림 왼편 하단에 1323년(충숙왕 10)에 서구방(徐九方)이 그렸다는 화기(畵記)가 남아 있어서 고려시대 수월관음 연구에 기준이 된다. 우리는 이 불화에 나오는 이름 외에는 내반종사(內班從事)라는 직책에 있었다는 것을 명문으로 알 수 있을 뿐, 서구방이라는 화가에 대해서 다른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유희좌(遊戲坐)로 앉아 있는 관음의 우아한 자태와 오른 손목에 걸친 투명한 염주를 살짝 쥐고 있는 섬세한 손, 그리고 정병을 받치고 있는 투명한 유리그릇의 묘사로 미루어 볼 때, 서구방은 고려 후기 화단(畵壇)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는 우수한 화가가 아니었을까.

고통스러운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선재동자는 관음 진신의 주처(住處)라는 보타락산을 찾아간다. 『화엄경』에서 선재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갓 들어갔을 정도의 어린 나이로 나온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보살행을 닦고, 진리를 탐구하던 선재가 보타락산을 찾아 나선 것은 관음 진신을 찾아뵙는 일이 그만큼 절실하였다는 뜻일 터이다.

확대보기
선재동자상
선재동자상
팝업창 닫기

그런데 진짜 관음이 살고 있는 곳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황당하다. 진짜 관음은 무엇이고, 가짜 관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아마도 『법화경』 같은 경전 여러 곳에 나오듯이 중생의 각기 다른 소망을 들어주고, 또 각각의 고난에서 구원해 주기 위해 관음이 여러 가지 다른 모습(화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인 듯하다. 때로는 여래의 모습으로, 때로는 대신의 모습으로, 혹은 자재천의 모습으로 관음이 중생에 맞추어 자신의 화신을 보여 주니, 선재는 그 어떤 화신도 진신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굳이 관음 진신을 뵙고, 그 말씀을 듣고자 보타락산까지 찾아갔던 것이 아닐까.

진짜 관음이 항상 머물러 있다는 보타락산은 원래 중국에서 인도로 가던 남해 항로(南海航路)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한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삼장 법사(三藏法師)로 알려진 현장(玄奘)은 구법(求法)을 위해 인도에 갔던 자신의 여행기를 남겼다. 그의 여행기이자 구법의 기록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보타락산이 오늘날의 말레이 반도가 있는 말라카 해협(Malacca海峽)에 있다고 적었다.49)현장(玄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제(卷第)10, 『대정신수대장경』 권51, 932쪽. 그런데 말라카 해협은 옛날부터 해적들의 소굴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해적은 말할 것도 없고, 풍랑과 암초 등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먼 뱃길에서 상인과 뱃사람들은 또 얼마나 불안하였을까. 그들이 무사 항해를 비는 마음과 각종 재난에서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관음 신앙은 당연히 결합되기 쉬웠다. 『법화경』 보문품에 나오듯이 온갖 재난에서 구해 준다는 제난 구제(諸亂救濟)의 관음 신앙이 뱃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바닷길로 다니는 상인과 뱃사람을 중심으로 배가 드나드는 항구에서 특히 제난 구제의 관음 신앙이 발달하였다. 아울러 기나긴 항해 도중에 휴식을 취하고 음식과 물을 보충하기 위하여 잠시 정박할 수 있는, 항구에서 멀지 않은 산을 중심으로 관음이 거처한다는 보타락산 신앙이 널리 퍼졌다.

확대보기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홍련암
팝업창 닫기

보타락산 신앙은 인도만이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에도 전래되어 나라마다 관음 진신이 살고 있는 가상의 보타락산이 만들어졌다. 중국의 저장성(浙江省) 푸퉈산(普陀山) 조음동(潮音洞)이나 우리나라의 강원도 낙산(洛山)도 이와 같은 보타락산 신앙이 들어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정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수월관음도에서 관음이 앉아 있는 기암절벽은 바로 말레이 반도의 보타락산이며, 중국의 푸퉈산이며, 동시에 낙산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한 산수 배경이 아니라 그림 속의 수월관음이 바로 관음 진 신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삼국유사』에는 의상 대사(義湘大師, 625∼702)가 낙산에서 관음을 직접 만났다는 의상 관음 친견설(義湘觀音親見說)이 나온다. 관음 진신이 해변의 굴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의상이 여러 날 기도하고 제를 올린 후, 관음 진신을 만나고 그가 일러 주는 대로 두 그루의 대나무가 올라온 자리에 금당을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극히 설화적인 이 이야기에서 낙산 관음굴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낙산에 거처하는 관음보살을 표현한 것인가. 바닷가 높은 곳에서 어리석고 연약한 중생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의 수월관음이 새겨진 경상(鏡像)이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다.50)최응천·김연수, 『금속 공예』, 솔, 2004, 268∼269쪽 ; 곽동석, 「고려 경상(鏡像)의 도상적(圖像的) 고찰」, 『미술 자료』 44, 국립 중앙 박물관, 1989 ; 정지희, 「고려 수월관음경상(水月觀音鏡像)과 서울 역사 박물관 경상의 연구」, 『강좌 미술사』 24, 한국 미술사 연구소, 2005, 11∼ 48쪽. 경상은 일종의 거울이며, 청동 거울에 불상이나 보살상, 기타 신상을 새겨 넣은 것이다. 둥글거나 네모진 형태의 청동 거울 면에 다양한 불교상을 새긴 경상은 고려시대에 특히 유행한 독특한 종류의 의식용 도구이다. 대부분 10여㎝ 남짓한 정도의 크기에다가 경상 맨 위나 가장자리에 아주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서 어딘가에 부착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날카로운 침 같은 것을 이용해 만든 고려시대의 경상은 관음상이나 사천왕상을 선각(線刻)한 예가 많다.

확대보기
수월관음경상(水月觀音鏡像)
수월관음경상(水月觀音鏡像)
팝업창 닫기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상의 수월관음은 풀을 깔아 만든 자리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팔을 그 위에 올린 채 편안하게 앉아 있다. 그런데 관음 주변에 가가미 진자 소장의 수월관음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험난한 산은 묘사되지 않았다. 대신 관음의 아래편에 거칠고 서툰 각선(刻線)으로 넘실대는 파도를 묘사하여 바닷가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네모난 돛을 단 배가 관음의 발아래 둥실 떠올라 있으며, 물고기를 잡는 어망 같은 것도 보여서 바다가 배경임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관음은 무릎에 얹은 오른손으로 버 들가지를 들고 있으며 정병은 반대편 한쪽에 놓아두었다. 정병 뒤로 올라간 대나무 두 그루가 관음의 머리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아래편에서 벌어지는 온갖 속세의 재난들이 마치 호리병 속으로 마법사 지니가 들어가는 것처럼 관음의 정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려졌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호리병 속으로 빨려 드는 재난들은 검을 든 병사, 갓이 벗겨진 사람, 물 위에서 표류하는 사람 등인데, 미루어 보면 전쟁, 폭우, 비바람 같은 인재(人災)와 자연재해를 포괄한다.

확대보기
공작명왕
공작명왕
팝업창 닫기

이처럼 재난들이 모두 관음의 정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그린 까닭은 어떠한 재난을 만나도 오로지 한마음으로 관음의 이름을 부르면 관음보살이 고난에서 구원해 준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 주기 위한 장치이다. 경상 화면의 반 정도를 물결치는 바닷가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수월관음 경상은 특별히 바다에서의 고난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디서 만들었는지는 밝혀내기 어렵지만 바다에서 겪게 될지 모르는 해난(海難)에서 구원받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절절히 전해지는 듯하다. 이처럼 특별히 해난에서의 구제를 기원하여 조성한 관음상을 쇄수관음(灑水觀音), 혹은 해수관음(海水觀音)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이름으로 부르는 까닭은 경전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해난 혹은 수난(水難)을 방지하거나, 만일에 그런 상황을 당하면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라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음상이 적지 않은 것은 안전한 항해와 무사 귀환(無事歸還)을 바라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난에 빠지지 않도록 기원하기에는 관음상만으로 부족하였던지 관음상의 뒷면에 공작명왕(孔雀明王)을 새겨 넣었다.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공 작을 타고 있는 동자가 한 손에 기다란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 경전을 들고 있는 공작명왕은 여러 명의 명왕 가운데 경전에 처음으로 나오는 존재이다. 공작명왕의 주문을 외우면 독사의 독을 비롯하여 온갖 독을 없애 주고, 공포와 번뇌를 제거하며 안락을 준다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쪽 면에 공작명왕을 새기고, 반대 면에 수월관음을 새긴 이 경상은 어떤 고난에서도 구원을 받고 싶은 강한 의지와 공작명왕과 관음이 구원해 주리라는 확고한 신념이 담긴 미술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