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2장 현세 구복의 불교 미술
  • 3.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를 지키다
  • 임금님의 만세가 곧 나라의 안녕이니
강희정

고대 혹은 봉건제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나라든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곧 그 나라의 왕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가령 충효의 관념을 가장 중요한 국가의 이념 가운데 하나로 중시하고 강조한 유교 국가 조선에서,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나라 전체가 그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국상(國喪)을 치른 것은 왕을 나라의 주인이자 백성의 어버이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위한다는 것과 임금님을 위한다는 것이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다. 양자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호국의 기원을 담아 조성한 불교 미술 중에도 단순히 나라를 외적의 침략에서 지키기 위한 호국만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인 임금님의 안녕을 빌기 위해 제작된 예들도 있다. 실제로 임금님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비는 기원은 그 진정한 목적이 어디 있었든지 간에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였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기원하면서 불상, 보살상, 불화를 조성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대개 명문(銘文)이나 발원문(發願文)의 형태로 남기는데, 부모, 친지의 명복을 빈다든지, 사해 대중(四海大衆)이 불법을 듣기 바란다거나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억불 숭유(抑佛崇儒)를 나라의 기치로 내세운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위에서 아무리 불교를 믿지 말라고, 승려가 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신앙이 바뀔 리가 없다.

건국과 함께 정책적으로 강력한 억불책(抑佛策)을 썼던 태조도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숭상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을 건국하기 전인 1391년(공양왕 3)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금강산 월출봉에 사리기를 봉안한 일은 유명하다. 또 건국 이후인 1397년(태조 6)에는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릉에 흥천사(興天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태조도 여전히 자기 신앙을 지속하고 있었는데 하물며 일반 백성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부처나 보살을 믿고 의지하던 조선 백성은 여전히 부처 에게 귀의하였고, 보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아미타불의 힘으로 서방정토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였으며, 다라니(陀羅尼)를 외워 현재 몸(現身)으로 깨달음을 얻기를 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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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발원 사리기
이성계 발원 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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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지체 높은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의 기강을 잡기 위해 내세운 유교의 이념을 수용하면서 온전히 자신들의 신앙도 지켜 나가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바란다는 내용을 자신들이 만들게 한 불교 미술의 발원문에 포함시켰다. 불교와 유교, 어느 한쪽을 택할 수 없었기에 나온, 말하자면 타협책이었던 것이다. 고려 말기의 불상 조성기(造成記)에도 황제의 만세(萬歲)와 왕의 천추(千秋)를 기원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몽고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던 당시에 황제가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보다 조선 전기에 만든 불상, 보살상, 불화의 발원문은 임금과 왕실 친족들의 안녕과 만수를 기원하는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서 고려시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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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륙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
장륙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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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 만든 영덕(盈德) 장륙사(莊陸寺) 대웅전의 건칠 관음보살 좌상(乾漆觀音菩薩坐像)도 왕과 왕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긴 조각이다. 관음보살상의 체내에 집어넣은 복장물 중에서 그 경위를 적은 복장기(服藏記)가 발견되었다.57)정영호, 「장륙사(莊陸寺) 보살 좌상과 그 복장 발원문(腹藏發願文)」, 『고고 미술』 128, 한국 미술사 학회, 1975, 2∼ 4쪽 ; 문명대, 「세종조 전후의 조선 전기 조각 양식의 변천」, 『세종 시대의 미술』, 세종 대왕 기념 사업회, 1986, 111쪽. 복장물은 불상이나 보살상의 신체 안에 마치 그 불상이 살아 있는 사람인 것처럼 오장 육부(五臟六腑)를 만들어 넣거나 여러 사람이 바친 공양물을 넣은 것이다. 그중에는 경전을 베껴 써 넣은 것도 있고, 정성껏 만든 옷이나 비단 천, 삼베도 있으며 거울이나 구슬, 주문(多羅尼)을 쓴 종이를 넣기도 한다. 장륙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의 복장기에는 1395년(태조 4)에 보살상을 조성하고 1407년(태종 7)에 보살상에 금칠을 하는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하였다고 적혀 있다. 복장기의 내용 중에는 주상(主上)과 현비(顯妃), 여러 왕실과 백관의 복과 장수(福壽)를 기원한다는 부분이 있다. 여기 나오는 주상 전하는 역시 조선의 건국자 태조를 지칭하며, 현비는 신덕 왕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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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사 금동 약사여래 좌상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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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복장기에는 다양한 계층의 시주자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관직(官職)이 있는 사람은 관직과 성씨를 함께 적고 자필 사인인 수결(手決)을 하였고, 관직이 없는 사람은 단순히 이름만 적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건칠불(乾漆佛)은 삼베를 여러 겹 발라서 입체로 만들지만 장륙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은 종이를 겹쳐 발라서 만든 특이한 것이다. 조선 건국 직후에 만든 조각이기 때문에 고려 말 조각의 특징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보살의 섬세하고 화려한 장신구와 보관, 우아한 손놀림은 1346년(충목왕 2)에 조성한 장곡사(長谷寺) 금동 약사여래 좌상이나 국립 전주 박물관의 금동 관음보살 좌상의 양식에 맥이 닿아 있다.58)민영규, 「장곡사(長谷寺) 고려 철불 복장 유물」, 『인문 과학』 14·15,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66, 237∼247쪽 ; 이은창, 「장곡사의 금동 약사 좌상 복장 불경」, 『고고 미술』 3-11, 한국 미술사 학회, 1962 및 『고고 미술』 제1∼100호 합집 상권, 1972, 315∼316쪽. 그러나 고려시대의 조각에 비하면 허리가 짧아졌고, 얼굴은 좀 더 커졌다.

왕의 천수(天壽)를 기원하는 것은 조선 전기 불교 미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장륙사 건칠 관음보살 좌상보다 60년가량 늦은 1458년(세조 4)에 조성된 영풍 흑석사(黑石寺) 목조 아미타불 좌상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59)최소림, 「흑석사(黑石寺) 목조 아미타불 좌상-15세기 불상 형식의 일 이해(一理解)-」, 『강좌 미술사』 15, 한국 미술사 연구소, 2000, 77∼100쪽. 흑석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은 세조의 후원에 힘입어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조성한 삼존불(三尊佛) 가운데 본존불이다. 장륙사 건칠 관음보살상처럼 복장물과 복장기가 발견되어 왕실에서 발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복장물에는 『법화경』 등의 경전과 각종 직물류, 금동 사리함, 사리, 오곡(五穀), 오향(五香), 칠보(七寶)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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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
흑석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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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발견된 보권문(普勸文)에 따르면 1457년(세조 3) 정암산(正岩山) 법천사(法泉寺)에 봉안하기 위한 뜻을 세우고, 몇몇 승려를 중심으로 이듬해에 아미타불을 만들었다. 이 불상을 만들기 위하여 뜻을 함께하고 시주한 사람은 무려 275명에 이른다. 그중에는 태종의 후궁인 의빈(懿嬪) 권씨와 명빈(明嬪) 김씨를 포함하여, 효령 대군,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耼) 등 왕실 관련 인물이 몇 명 참여하였다. 광덕대부(光德大夫)에 봉해진 안맹담은 세종의 둘째 딸이자 세조의 누이인 정의 공주(貞懿公主)와 결혼한 인물로, 신심이 워낙 깊어서 집 안에서도 승복을 입고 독경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불상을 만들도록 시주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권문으로 밝혀졌으며, 복장기에는 그들이 뜻을 모아 발원한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나온다.60)장충식, 「경태(景泰) 7년 불상 복장품(腹藏品)에 대하여」, 『고고 미술』 138·139, 한국 미술사 학회, 1978, 48∼49쪽. 복장기에서는 먼저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을 만든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부처님의 광명이 날로 빛나고, 불법이 항상 전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주상과 왕비의 만세를 비는 내용과 함께 세자 역시 천추(千秋)를 누리기를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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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물
복장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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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종친 및 관련 인물들이 상을 만드는 데 참여한 탓인지 조선시대의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안정감 있는 비례를 보여 준다. 흑석사 아미타불은 나무를 깎아 만든 목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각선이 깔끔하다. 현재 개운사(開運寺)에 안치된 목조 아미타불 좌상(1274년 제작 추정)이나 봉림사(鳳林寺) 목조 아미타불 좌상(1362년 이전 제작 추정) 같은 고려 말기 조각처럼 약간 허리가 긴 신체와 갸름한 느낌이 나는 얼굴이 날렵한 인상을 준다.61)문명대, 「고려 소·목불상(塑木佛像)의 연구-원효사(元曉寺) 소천불상(塑千佛像)과 봉림사(鳳林寺) 목아미타불상(木阿彌陀佛像)을 중심으로-」, 『고고 미술』 166·167, 한국 미술사 학회, 1985 ; 문명대, 「고려 13세기 조각 양식과 개운사장 취봉사(鷲峰寺) 목아미타불상의 연구」, 『강좌 미술사』 8, 한국 미술사 연구소, 1996. 나무로 만든 까닭에 옷은 약간 두꺼워 보이지만 옷자락 끝단과 주름도 단정하게 처리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왕과 왕비의 만세를 빌면서도 그들의 기원과 관계없이 아미타불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흔히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빌기 위한 대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흑석사 아미타상은 극락왕생과 전혀 관계없는 목적을 위해 조성한 점이 주목된다.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는 흑석사 목조 아미타불상만이 아니라 조선 전기의 여러 불교 미술 조성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조선 왕실의 여인들은 전반적으로 신심이 깊었기 때문에 이들은 조선 전기 불 교 미술의 중요한 후원자였다.62)강희정, 「조선 전기 불교 미술의 여성 후원자」, 『아시아 여성 연구』 40,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2003. 그들의 후원으로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사원의 보수와 불상 조성, 불화 제작 및 봉안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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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
개운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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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
봉림사 목조 아미타불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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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빈 김씨가 관여한 또 다른 중요한 불사(佛事)로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水鐘寺)의 금동상 조성을 들 수 있다. 수종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태종의 딸인 정의 옹주(貞懿翁主)의 부도를 1439년(세종 21)에 세운 것을 보면 수종사는 그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수종사에 관한 몇 가지 기사는 주로 성종대에 집중되어 있어서 수종사가 당시 대비였던 정희 대비(貞熹大妃)의 비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수종사는 조선 초기부터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사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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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팔각 5층 석탑
수종사 팔각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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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팔각 5층 석탑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탑신 여러 곳에서 유물들을 발견하였는데, 그중에는 여러 점의 불상 및 보살상과 조성기가 포함되어 있었다.63)윤무병, 「수종사(水鍾寺) 팔각 5층 석탑(八角五層石塔) 내 발견 유물」, 『김재원 박사 회갑 기념 논총』, 김재원 박사 회갑 기념 논총 편찬 위원회, 1969, 945∼972쪽 ; 유마리, 「수종사 금동 불감(佛龕) 불화(佛畵)의 고찰」, 『미술 자료』 30, 국립 중앙 박물관, 1982, 38∼39쪽 참조. 수종사 석탑에서 발견된 이들 불상들은 조성기 덕분에 정확한 제작 연대와 출처, 발원자 등을 알 수 있어서 조선 전기와 중기 불교 조각 연구에서 중요한 기준이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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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5층 석탑 금동 불감
수종사 5층 석탑 금동 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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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석탑에서 발견된 조성기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석탑 1층에서 금동 불감(金銅佛龕)과 같이 발견된 금동 석가여래 좌상(金銅釋迦如來坐像) 속에서 나온 복장기이며, 다른 하나는 석탑 기단에서 발견된 비로자나불의 조상기이다. 석가여래상은 앞에서 거론한 다른 불상들의 상체가 약간 길게 처리된 것과는 달리 단신의 단단한 체구로 만들어졌다. 고개를 숙인 듯한 모습에, 두 눈을 아래로 내려뜬 모습에서 삼매(三昧)에 든 부처의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머리 위로 정상 계주(頂上髻珠)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나발(螺髮)과 육계(肉髻)가 여전히 크고 도드라져 이마가 좁게 표현된 것은 고려시대 불상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어린아이같이 짧은 신체 비례와 단단해 보이는 양감 처리는 조선시대 후기 불상으로 전개될 것을 예견하게 해준다.

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1493년(성종 24)에 성종의 후궁인 숙용(淑容) 홍씨, 숙용 정씨, 숙원(淑媛) 김씨 등이 불상을 중수(重修)하였다고 적혀 있다. 복장기에 따르면 수종사의 불상은 주상의 성수만세(聖壽萬歲)와 후궁 자신들이 낳은 왕자, 공주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면서 옛 불상을 중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극 정성으로 수종사의 불상을 만들도록 시주하고 기도하였을 왕실 여인들의 기원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그들은 주상, 즉 성종의 막중한 의와 정을 찬양하고 왕의 덕이 높아서 해와 달이 한꺼번에 비추는 듯하다고 칭송한다. 이어 그들이 소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고 부귀하며 대비들과 세자, 조카들까지 안녕하기를, 부처님의 은덕을 입기를 모두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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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금동 석가여래 삼존상
수종사 금동 석가여래 삼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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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기에 이어지는 시주자 명단에는 두 숙용과 숙원에다가 그들이 낳은 각각의 소생으로 생각되는 옹주와 군(君)의 이름이 보인다. 아직 나이 어렸을 그들이 신앙심과 판단력이 있어서 불상 조성을 후원하고 사찰을 보수하도록 시주하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시주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두터운 신앙심으로 뜻을 내어 발원하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어머니였던 후궁이 직접 자기 자손의 이름을 명확하게 적어 넣음으로써 그들에게로 조상 공덕(造像功德)이 분명하게 쌓이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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