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2장 현세 구복의 불교 미술
  • 4. 이 내 몸에 부처님의 가피를
강희정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기가 섬기는 신을 흠모하고 존경한다. 어떤 이는 간절히 신을 닮기를 원할 것이며, 또 어떤 이는 신의 모든 것을 배우고 싶기도 할 것이다. 종교의 성격은 달라도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갖는 신앙의 자세와 마음, 그 자체는 비슷하다. 어떤 종교적 현상이 얼마나 더 성스러운가, 혹은 덜 성스러운가 하는 성스러움의 정도를 가릴 수는 없어도 종교적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 수 있다. 신도라면 때로는 성스러운 종교적 체험을 하기 위해 기도하기도 하고, 주문을 외우기도 하며, 경전을 읽고 외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불교 신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성심껏 기도하고, 무언가를 불전(佛前)에 봉헌하기도 하며, 경전을 공부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지키기 위해 작은 금동불을 지니고 다니기도 하였을 것이다. 혹은 몸에 지니는 금동불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믿음이 더욱 확고하였을지도 모르고, 혹은 닮고 싶은 부처님을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인지도 모른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특히 많이 조성된 소형 금동상들 중에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호지용(護持用)도 적지 않다. 어떤 식으로 지니 고 다녔는지, 주머니나 합(盒)에 넣었는지, 혹은 개인의 불단(佛壇)에 올려놓았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워낙 10여㎝ 남짓한 작은 상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작은 크기의 불상을 놓고 대중이 모여서 예배를 하거나 의식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소형 금동상은 어디든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이므로 승려나 신도 개인의 호신불(護身佛)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크기도 크거니와 무거워서 옮기기 어려운 석불이나 철불을 개인용으로 조성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석불이나 철불은 대부분 예불이나 의례를 목적으로 법당에 봉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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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 출토 금동불 좌상
뚝섬 출토 금동불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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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불교 조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59년 서울 뚝섬에서 발견된 금동불 좌상이다. 마모된 부분도 많고, 녹색을 띤 녹 부분이 많아서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옷깃이 목에서부터 둥글게 내려간 통견(通肩)의 옷을 입고 두 손을 배 부분에 대고 명상하는 듯한 자세를 한 것은 분명하다. 이 자세는 중국의 5호16국시대, 즉 4세기경에 만든 중국의 초기 불좌상과 같다. 불상의 자세와 손 모양, 옷 주름 처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 불상은 늦어도 400년 전후에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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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
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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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뚝섬에서 발견된 이 불좌상의 뒤를 잇는 불상은 연가7년명 금동 여래 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으로 539년(안원왕 9)에 제작된 것이다.64)강우방, 「삼국시대 불교 조각론」, 『삼국시대 불교 조각』, 국립 중앙 박물관, 1990, 126∼159쪽 ; 황수영, 「삼국시대의 불상 조각」, 『금동불·마애불』 국보 2, 예경산업사, 1984, 179∼192쪽. 뚝섬에서 출토된 불좌상과 비교하면 제작 시기가 1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두 불상이 조성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그 기간의 간격이 너무 멀기 때문에 뚝섬에서 발견된 불좌상은 중국에서 전래되었거나 중국의 불상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반면, 연가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낙랑(樂浪), 즉 평양에서 만들었다는 명문이 광배(光背)에 적혀 있어서 분명한 고구려의 조각으로 본다.65)김리나, 「고구려 불교 조각 양식의 전개와 중국 불교 조각」, 『고구려 미술의 대외 교섭』, 예경, 1996, 75∼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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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
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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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 출토 불좌상은 전체 높이가 4.9㎝이다. 어른의 손가락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상인 셈이다. 이렇게 작은 상을 만든 목적은 분명하다. 이 불좌상이 중국에서 만든 것이라면 더더욱 누군가 자신을 지키고, 신심을 잃지 않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는 기나긴 여정 동안 부딪칠지도 모를 위험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부처님의 가호를 빌었을 것인가. 그렇게 한반도로 전해진 이 불좌상은 이후 제작된 다른 불상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고, 그 위신력 또한 널리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만일 뚝섬 출토 불좌상을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모델이 되었던 불상이 중국에서 전래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승려이든, 속세의 사람이든 누군가 모델이 된 불상을 지니고 온 까닭은 마찬가지이다. 여래의 호신력에 기대어 머나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불법을 전하러 온 그 뜻을 이어받아 다시 그와 비슷한 유형의 불상과 보살상을 계속 조성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소형 금동불이 적지 않게 만들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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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판 여래 좌상
순금판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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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도 호신불을 제작하여 몸에 지니는 일은 계속되었다. 높이가 겨우 5.1㎝에 지나지 않는 순금판 여래 좌상(純金板如來坐像)은 너무 작아서 앙증맞아 보일 정도이다. 불상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1361년(공민왕 10)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금을 두드려 불좌상을 만들어 그 주변의 연꽃과 광배는 맞새김으로 만들고 뒷면을 막아 마무리하였다.66)곽동석, 『금동불』, 예경, 2000, 234쪽. 뒷면의 광배 끝 부분에 고리가 달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현대의 목걸이 펜던트처럼 줄에 꿰어 어딘가에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앞면의 불상은 오른손을 땅에 짚어 마귀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석가모니를 묘사한 것이다. 크기가 워낙 작은 탓에 불상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보여 주고 있어서 꼭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아기 부처상을 보는 듯하다. 불상 좌우에 덩굴처럼 연결된 연꽃과 이마 가운데가 뾰족하게 M 자 모양이 된 것, 팔찌를 찬 손목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요소들이다.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순금으로 펜던트처럼 만든 이 불상을 걸고 다녔던 사람은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였을까. 언제나 부처님의 가호를 받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불상은 아니지만 분명히 개인이 가지고 다녔을 은제 호신 불감(銀製護身佛龕)도 빼놓을 수 없다. 높이가 6.7㎝이고 폭이 4.5㎝이니, 약간 큰 성냥갑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67)최응천·김연수, 앞의 책, 272쪽. 은판으로 작은 상자를 만들고 뾰족한 침으로 무늬를 곱게 찍어 표면을 장식하였다. 역시 은판으로 불감 뚜껑을 만들어 미닫이문처럼 끼워 넣으면 앞면을 완벽하게 닫을 수 있다. 불감 뒷면에는 주문에 해당하는 실담 문자(悉曇文字, 범자)를 새겨 넣어 호신의 위력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불감의 뚜껑을 잡아 빼면 그 안에서 금동제 관음보살상과 비사문천상(毘沙門天像)이 살포시 자태를 드러낸다. 관음과 비사문천 상은 불감의 아랫면에 고정되어 있다. 불감 아랫부분을 살짝 잡아당기면 두 상이 불감에서 빠지게 되어 있다. 비사문천은 사천왕 가운데 하나인 북방 다문천의 다른 이름이다. 서역에서 나라를 지키는 능력이 뛰어나 호국신으로 받들어졌던 비사문천을 관음보살과 함께 만들어 한 벌로 삼은 것은 어떤 고난에도 빠지지 않기를, 또 고통에 빠지더라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다. 관음보살이나 비사문천, 어느 한쪽만으로도 충분하였을 텐데 양자를 같이 모신 것은 그만큼 구원의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관음상이나 비사문천 모두 4㎝ 남짓한 작은 크기인데도 상당히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비사문천과 연꽃 가지를 손에 든 관음보살의 신체 비례도 적합할 뿐더러, 얼굴과 손발의 크기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관음보살이 딛고 선 연꽃과 그의 옷자락, 비사문천의 갑옷도 비교적 섬세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지닌 조각가가 만들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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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 호신 불감
은제 호신 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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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 호신 불감의 뒷면
은제 호신 불감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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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감은 1156년(의종 10)에 장사 지낸 남원군 부인(南原郡夫人) 양씨 (梁氏)의 석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불감도 역시 그와 비슷한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불감의 상태와 호신불로서의 원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실제 제작된 것은 1156년보다 훨씬 빨랐을 것이다. 남원군 부인은 오랫동안 부처님과 보살, 천왕의 가피(加被)를 입고자 이 불감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았을까. 언제나 관음보살과 비사문천의 가호를 받은 부인은 얼마나 든든하였을까.

인간 세상의 일은 복잡하고 다난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어찌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송사(訟事)에 휘말리기도 하고, 모함을 받기도 하며, 도둑을 만나기도 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갑작스럽게 천재지변을 만나기도 한다. 예측 불허라는 점이 사실 인생의 묘미 아니던가. 하지만 예기치 못한 불운한 상황을 당하여 나약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을 때, 우리는 부처님께, 하나님께, 알라께 의지한다. 또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있는데 자기 의지로 얻기 어려울 때도, 인간은 신에게 간곡히 요청한다. 자신의 기원을 들어달라고. 때로는 부귀영화를 바라는 경우도 있고, 높은 벼슬에 오르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들을 얻으려는 바람이다. 아예 자식이 없어서 아들딸 성별에 관계없이 자식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비는 경우도 있었을 터이다. 몸이 약한 사람은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빌었을 것이고, 불도(佛道)를 닦으려는 사람은 그 길을 알려 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집안 권속들의 안녕과 장수를 바라는가 하면, 나라와 임금님, 왕실의 만수무강,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기도인들 왜 없었겠는가.

물론 이것이 종교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다종다양한 인간들의 기원이 신앙을 유지하는 중요한 축임은 부인할 수 없다. 직접적인 주술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거나, 혹은 개인의 염원을 담았거나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담은 불교 미술을 만들었다. 내세에서 구원받기 바라는 마음을 담기도 하였고, 깨달음을 얻어 성불(成佛)하기를 기원한 예도 있다. 하지만 현세에서 복 받기를 바라는 현세 구복의 미술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다사다난한 면모와 그 신앙을 잘 드러내 주는 적나라한 스펙트럼이 아닌가. 인간과 불교가 존속하는 한, 신앙이 지속되는 한, 현세 구복의 미술 조성은 결코 멈춤 없이 굴러가는 불법의 바퀴(法輪)와 같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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