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3장 극락세계의 인식과 미술
  • 1.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정우택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한시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를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불교에서의 극락(極樂)과 지옥, 즉 선과 악의 양극화는 물론 내세의 존재 유무를 떠나 현세의 선행(덕)과 불교에 대한 경외심을 쌓게 하기 위한 방편이기는 하지만, 종교의 속성상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특히, 극락의 설정은 긍정적 사후 세계의 구현이라는 목적으로 실체적인 것으로 강조되어 왔고, 민족, 시대, 종파에 관계없이 그 신앙 또한 성행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죽음은 곧 어두운 황천(黃泉) 나라와 연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세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로 가는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국토(佛國土)라는 것도 실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더러운 속세, 즉 예토(穢土)의 상대적 개념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지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불국토 역시 현세에서 이상화시킨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영생의 바람이 피안(彼岸)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태어난 모든 유정(有情)들은 틀림없이 죽어야 하는 운명이지만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어 정작 그 세계의 실상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즉, 자의적으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육신을 보며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 것인지 아닌지, 과연 분리되었다면 어디로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인지, 산 사람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의 세계는 단지 인간 스스로가 문자 또는 시각적인 형상으로 만들어 낸 이미지(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은 경험해 볼 수 없는 행위이기에 사후 세계의 해석과 이미지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소멸한 생명체가 현세에 적어도 같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경우를 경험해 보지 못하였듯이, 현실 세계에는 죽음에서 재생이라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종교적 신념과 원망(願望)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삶의 형태나 방법을 구속하는 자연의 변화나 천재지변, 좁게는 공존하는 다른 생명체의 성성(姓性)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따라서 종교는 믿음을 통하여 현세의 복덕을 구하고 그 모든 것이 얻어질 것이라는 약속만으로는 계속 존재할 수 없다. 현세에서의 깊은 종교적 신심과 이념에 따른 생활 태도는 그저 자신 스스로에 대한 위안이며, 충실한 종교성은 오히려 사후, 즉 속세보다 나은 내세의 보장과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내세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세계는 죽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비밀의 공간인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운명적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죽음에 긍정적인 면 또한 가지고 있다. 이는 고대로부터 있어 온 재생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며, 다만 앞서가는 것뿐이라는 순차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교 역시 현세 구복적임과 동시에 죽음이 없는 세계로 재생한다는 내세 구복적인 성격도 강하여, 사후 세계를 선-극락, 악-지옥이라는 이등분적 분류 체계로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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