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3장 극락세계의 인식과 미술
  • 4. 극락으로 인도해 주소서
  • 내 손을 잡아 주소서
정우택

고려 불화는 현재 160여 점이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아미타여래, 즉 극락정토와 관련된 그림이 무려 60여 점으로 이를 통하여 당시의 신앙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아미타여래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아미타여래 한 분만 그린 아미타독존도(阿彌陀獨尊圖) 형식이고, 둘째는 관음과 세지보살로 대표되는 협시 보살 등을 거느리고 앞면을 향하여 앉아 있는 설법도(說法圖) 형식, 셋째는 아미타여래 단독이든 협시보살을 거느리든 모든 존상이 약간 오른쪽을 향하여 서 있는 자세의 내영도(來迎圖) 형식이다. 그 가운데 내영도는 아미타여래가 불교를 인정하고, 신심 또한 깊은, 목숨을 다한 중생을 극락세계로 데려가기 위하여 그 앞에 나타나는 순간적인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 내영도는 다시 아미타여래만을 묘사한 독존내영도와 관음과 세지보살이 함께 묘사된 아미타삼존내영도 그리고 여덟의 보살을 거느린 아미타팔대보살내영도(阿彌陀八大菩薩來迎圖)와 아미타성중내영도(阿彌陀聖衆來迎圖)로 나뉜다.

정토 삼부경의 하나인 『관무량수경』에는 아미타여래의 내영, 즉 접인 중생(接引衆生)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가 극락에 다시 태어나고자 할 때 용맹정진하였기 때문에 아미타여래가 관음보살, 세지보살, 무수한 화불(化佛), 수많은 비구 성문 그리고 무수한 제천(諸天)과 칠보 궁전과 함께 금강대(金剛臺)를 든 관세음보살과 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왕생자 앞에 납신다. 그때 아미타여래는 큰 빛을 놓아 왕생자를 비추며 여러 보살들과 함께 손을 뻗어 그를 영접하니 무수한 보살들이 그를 찬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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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A 미술관의 아미타삼존내영도
MOA 미술관의 아미타삼존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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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화의 내영도는 MOA 미술관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경우 『관무량수경』의 내용과는 달리 관음보살이 왕생자를 태울 대좌를 들고 있지 않으며 아미타여래가 큰 빛을 놓는 모습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미타여래가 손을 아래로 뻗고 있으며 약간 옆면의 입상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비록 왕생자는 없으나 그를 향하여 이동하고 있음을 암시적 또는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앞으로 부처님의 접인을 받아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부처님을 뵙게 하여 주소서.”92)『동문선』 권112, 「미타재소」.라는 바람에 상응하려는 인식에서 그렸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려 불화의 내영도는 어느 형식이든 간에 아미타여래 및 여러 보살이 구름을 타고 있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들이 내영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93)홍윤식, 「고려 불화의 주제와 그 역사적 의미」, 『고고 미술』 180, 한국 미술사 학회, 1988, 25∼49쪽. 이러한 견해는 내영도의 경우 아미타여래를 비롯하여 모든 권속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듯이 묘사되는 일본이나 중국 의 내영도와의 직접적인 비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름의 유무가 내영도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도쿄 국립 박물관의 아미타삼존내영도와 도쿠가와(德川) 미술관의 아미타팔대보살내영도(阿彌陀八大菩薩來迎圖)는 아미타여래가 관음보살, 세지보살 등을 거느리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즉 내영인(來迎印)을 한 고려 불화 통례의 내영도와 본질에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두 그림은 화면의 아랫부분에 구름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통례를 벗어난 듯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 구름들도 일본과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아미타여래 및 권속들과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여기에서의 구름은 이동 수단이 아니라 단지 존상들이 허공에 있다는 것, 즉 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내영도의 도상학적인 근거가 되는 『관무량수경』을 비롯하여 어떠한 경전에서도 아미타여래 및 권속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구름을 표현하지 않는 것 역시 고려 불화 내영도의 암시적·관념적 성격의 일면임과 동시에 일본이나 중국의 불교 도상과는 다른 독자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94)고려시대 아미타내영도에 관하여는 다음 논고를 참조. 菊竹淳一, 「高麗時代來迎美術の一遺例-香川·萩原寺の阿彌陀如來立像」, 『大和文華』 72, 大和文華館, 1984. 2, 15∼24쪽 ; 鄭雨澤, 「高麗時代の阿彌陀三尊圖」, 『泉屋博古館紀要』 5, 泉屋博古館, 1988. 9, 50∼70쪽 ; 鄭雨澤, 「高麗阿彌陀八代菩薩圖の變容」, 『大和文華』 80, 大和文華館, 1988. 9,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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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리움 미술관의 아미타삼존내영도
삼성 리움 미술관의 아미타삼존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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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리움 미술관의 아미타삼존내영도는 통례의 고려 불화 내영도와는 아주 다르게 『관무량수경』의 아미타여래의 내영 장면을 가장 설명적으로 충실하게 묘사한 그림이다. 아미타여래는 육계주에서 빛을 내어 화면 아래에 무릎을 꿇고 합장한 자세로 위를 올려다보는 왕생자를 비추고 있으며 손을 뻗어 그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또한, 관음보살은 역시 대좌를 들고 허리를 굽혀 마치 왕생자의 혼을 태우기라도 하듯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비록 세지보살 대신에 지장보살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충실하게 묘사한 것으로 고려 불화에도 다양한 내영도상이 존재하였음을 시사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또한, 삼성 리움 미술관의 아미타삼존도는 중국 도상 수용의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데, 이 그림은 중국 서하(西夏)에서 제작된 12세기의 내영도와 아주 흡사하다. 서하의 아미타내영도는 몇 점이 전해지는데 그중에서 이 아미타삼존내영도의 화면 구성과 표현을 살펴보면,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아미타여래의 앞에 서 있고, 본존의 백호에서 나온 빛이 왕생자를 비추고 있으며 관음보살은 연화 대좌를 들고 등을 약간 굽혀 마치 화면 아래에 있는 왕생자에게 다가가 그 혼을 태워 극락에 인도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물론 삼성 리움 미술관의 아미타삼존내영도는 왕생자의 혼과 구름이 생략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서하 내영도와 도상의 본질성에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된다.95)삼성 리움 미술관 아미타삼존내영도와 서하 불화와의 관계에 대하여는 정우택, 「중국 불교 도상의 한국적 수용과 미학적 변용」, 『새천년의 미소』, 98 경주 세계 문화 엑스포 국제 학술 회의, 1998, 215∼244쪽 참조.

삼성 리움 미술관의 내영도와 같이 관음보살이 연화 대좌를 들고 왕생자 앞에 나타나는 도상학적인 근거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관무량수경』에 두고 있으나 “안양의 금대에 올라 모든 성인의 영접을 친히 받으며…….”96)『동문선』 권111, 「동전시왕전소(同前十王前疏)」.라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고려인들은 연대 접인 또는 연대 왕생 의 이미지를 현실 생활 속에서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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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극락전의 아미타성중내영도
무위사 극락전의 아미타성중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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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려 불화의 암시적·관념적 성격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모든 주제의 불화에 공통적으로 설명적·구체적으로 바뀌는데, 이는 불화의 향유 대상이 특정의 귀족 계층에서 대중으로까지 넓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무위사(無爲寺) 극락전(極樂殿)의 1476년(성종 7) 아미타성중내영도(阿彌陀聖衆來迎圖) 벽화는 내영도상이 조선시대에 들어서 설명적·대중적으로 변화한 양상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 그림은 아미타여래가 여덟의 보살과 성중들을 거느리고 마치 구름을 타고 이동하는 듯한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존상들은 허공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의 보는 사람을 향하여 다가오는 듯한 실재감이 느껴질 만큼 설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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