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3장 극락세계의 인식과 미술
  • 4. 극락으로 인도해 주소서
  • 극락가는 용선에 오르시다
정우택

이미 언급하였지만 지옥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어찌 보면 자연히 가는 곳이지만 극락은 우선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누군가에게 인도되어야만이 갈 수 있는 별도의 세계이다. 불교에서는 극락왕생을 인도하는 누군가가 곧 아미타여래이며 연화 대좌에 왕생자의 혼을 태워 가기도 하지만 신앙과 신앙자의 다변화에 따라 또 다른 왕생 방법도 고안하였다. 즉, ‘용선(龍船)’으로 극락에 인도하는 방법이다. 『관무량수경』 등 기존의 극락왕생이 개별적·제한적이라면 탈것인 ‘배’는 이미 다수 또는 동시적으로 많은 구원을 의미하며, 더욱이 배라는 것은 쉽게 연상되는 친근한 사물인 만큼 현실감이 뛰어나며 극적인 장면 연출이 용이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용선접인도(龍船接引圖)는 바로 용선과 서민의 극락왕생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고려시대는 물론 동아시아 불교 도상에서도 볼 수 없는, 조선시대에 독창적으로 나타난 특이한 극락왕생 도상이다.97)정우택, 앞의 글, 1994, 5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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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린지의 관경십육관변상도
호린지의 관경십육관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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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살펴본 관경십육관변상도는 같은 계통의 도상인 고려시대의 1323년 지온인 그림과 조선시대의 1433년 지온지 그림을 비교하여 보면, 지온지 그림은 지온인 그림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면의 가운데를 아미타삼존 및 여러 군상으로 가득 채우고, 못에는 구품의 연화 화생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비록 화면의 상부 가운데 일상관이 있어 십육관상(十六觀想)을 의도하여 그리기는 하였으나 이미 도상의 모습은 바뀌어 있고, 대신 아미타극락회상(阿彌陀極樂會相)과 연화 화생이 강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관경십육관변상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크게 변형을 가져왔고, 도상의 본질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도상으로 바뀌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도상으로의 변화는 신앙 경향과도 부합되어 앞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도상, 즉 용선접 인의 장면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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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린지의 관경십육관변상도 부분
호린지의 관경십육관변상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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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접인의 장면이 묘사된 그림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관경십육관변상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용선접인의 내용이 삽입된 최초의 예로는 호린지의 관경십육관변상도를 들 수 있다. 화면 구성은 한가운데에 14관에서 16관상의 장면을 간략화시켜 묘사하였고, 못에는 연화 화생한 왕생자가 보인다. 못에는 그 밖에도 소위 부자상영회(父子相迎會)라는 아미타여래와 왕생자가 첫 대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98)이 장면은 둔황(敦煌) 제217굴의 관경십육관변상도(觀經十六觀變相圖)를 비롯하여 많은 둔황 불화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고려 불화의 예로는 사이후쿠지(西福寺)의 관경십육관변상도가 있다. 이러한 장면은 일본에서는 선도(善導) 『선주찬(船舟讚)』의 “父子相見非常喜 菩薩聲聞亦復然 父子相迎入大會 卽問六道苦辛事”를 근거로 정토왕생(淨土往生)한 화생보살(化生菩薩)과 아미타여래의 대면을 의미하여 ‘부자상영회(父子相迎會)’라 한다. 이 그림은 얼핏 보아서는 관경십육관변상도라 할 수 없을 만큼 앞 시대의 것에 비하여 단순화되었지만, 화면의 상부 가운데 일상관을 묘사하고 있어서 관경십육관변상도를 의도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면 하부의 장면으로, 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운데에는 아미타여래와 열 명의 왕생자를 태운 돛이 달린 용선이 화면을 향하여 볼 때 왼쪽으로 이동하는 듯이 표현되어 있고, 용선의 뒤쪽에는 사선형으로 구분한 육지가 있다. 속세로 짐작되는 그 육지에는 엎드리고, 무릎 꿇고, 허리를 굽혀 합장하는 네 명의 인물이 떠나가는 용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즉, 이 그림은 지온지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간략화되어 가는 관경십육관변상도에 용선접인의 장면을 추 가한 새로운 도상으로, 현재로서는 용선접인도상의 원초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제작 시기 역시 고려시대로 볼 수는 없을 것 같고, 대체로 조선시대 15세기 전반경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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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잔 문고의 안락국태자경변상도
세이잔 문고의 안락국태자경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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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용선접인도상의 성립과 전개를 밝히는 데 주목되는 또 하나의 그림은 1576년(선조 9) 제작된 세이잔(靑山) 문고의 안락국태자경변상도(安樂國太子經變相圖)이다. 이 그림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가운데 안락국 태자와 관련된 내용을 스물여섯 장면으로 압축하여 묘사하고, 장면마다 한글로 해설을 적어 놓은 조선시대 유일의 언문(諺文) 병기(倂記) 불화이다. 이 그림에 대하여는 이미 자세한 글이 발표되어 있어99)이 그림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熊谷宣夫, 「靑山文庫藏 安樂國太子經變相」, 『김재원 박사 회갑 기념 논총』, 1969, 1063∼1091쪽 ; 김정교, 「조선 초기 변문식 불화(變文式佛畵) 안락국태자경변상도(安樂國太子經變相圖)」, 『공간』 208, 공간사, 1984, 86∼94쪽. 이곳에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고, 이 글과 관계가 있는 스물여섯 번째 장면만 살펴보려 한다.

스물여섯 번째 장면은 아미타여래와 두 명의 왕생자, 즉 경전상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안락국(安樂國) 태자와 그의 어머니인 원앙 부인(鴛鴦夫人)을 태운 용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앞의 호린지 그림의 용선접 인도와 왕생자의 신분이 다를 뿐 도상의 본질만은 일치한다. 이 그림은 『월인석보(月印釋譜)』 권8의 월인천강지곡의 내용을 회화화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관무량수경』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어찌 되었든 월인천강지곡이 1446년(세종 28)부터 1449년(세종 31) 사이에 찬집(纂集)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용선접인도상은 적어도 15세기 중반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으며, 이 그림의 윗부분에 금니(金泥)로 쓰여 있는 “너무 오래되어 형상이 흐려져 새로 그렸다.”라는 화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도상의 실제적인 성립 시기는 15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그림은 비록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지극히 일반적인 정토 관련 불화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유교적 이념도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비참하게 살해당한 어머니를 아들인 안락국 태자의 염원으로 아미타여래의 접인중생을 받아 극락에 왕생시킨다는 내용만으로도 당시의 지배 이념인 효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부왕인 사라수왕(沙羅樹王)이 팔려 가는 원앙 부인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며 “아들을 낳으면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효양(孝養)이라 하라.”고 전한 말뜻에는 국가의 평안과 효를 중요시하는 시대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용선접인도상의 전개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작품은 1582년(선조 15) 제작된 라이고지(來迎寺)의 아미타정토도이다. 이 그림에 관하여도 이미 논고가 발표되어100)武田和昭, 「本島·來迎寺の阿彌陀淨土變相圖について-李朝佛畵·純金畵の制作背景について」, 『香川縣文化財協會報』, 1987年 特別號, 1988.3, 15∼25쪽 ; 정우택, 앞의 글, 1994, 51∼71쪽. 이곳에서는 구체적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화면은 내용상 크게 상하로 구분하여 윗부분에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정토세계의 모습, 아랫부분은 정토왕생, 즉 용선접인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용선접인의 도상은 호린지의 관경십육관변상도에서는 다른 장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어 있으나 세이잔 문고의 안락국태자경변상도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대두되고 있음이 엿보인다. 이윽고 라이고지의 아미타정토도에 이르러서는 주된 주제로 다루어지 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그림의 제목도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西方九品龍船接引會圖)로 불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통하여 이미 16세기에 들어서면 전통의 관경십육관변상도상의 범주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앞선 그림들과는 다른 독자의 아미타정토의 도상을 만들어 내고 있음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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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고지의 아미타정토변상도
라이고지의 아미타정토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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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접인도의 성립과 표현이 적극적으로 전개된 원인에 관하여는 몇 안 되는 자료와 현상만으로는 무어라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지 도상 성립에 관하여 추측해 보면, 관경십육관변상도가 간략화되어 온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람들은 과정보다는 결과, 즉 서방정토의 관상(觀想)이 아니라 왕생의 실현 가능성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는 앞에서의 추측과도 관련이 있지만 고려가 귀족 불교였다면 조선시대는 어찌 되었든 국가의 비호를 받기 어려운 상황 아래에서 민중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전의 회화화도 고려시대에 비하여 이 시대의 경우는 설명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목적과 결과의 표현은 단순·명쾌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용선접인의 장면은 점차 강조·확대되었고, 왕생의 대상도 호린지 그림의 경우는 불교를 인정하는 모든 중생이지만, 세이잔 문고 그림에 보이는 인물은 안락국 태자와 그 어머니인 원앙 부인이고, 라이고지 그림에 보이는 용선에 합장을 하고 앉은 여인은 화기에 보이는 혜빈 정씨(惠嬪鄭氏)로 짐작되어 점차 구체적인 인물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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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의 관경십육관변상도
개심사의 관경십육관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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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선접인도상은 호린지 그림을 통하여 짐작해 보는 바에 의하면 관경십육관변상도는 지온인 그림과 린쇼지 그림의 도상에서 조선시대의 지온인 그림, 지온지 그림과 같은 서방 세계가 확장된 도상으로 바뀌면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적어도 16세기에는 라이고지 그림과 같은 유형의 도상으로 변화하였던 것 같다. 용선접인도의 제작은 1549년(명종 4) 선조의 어머니인 정씨의 발원으로 ‘인접용주회(引接龍舟會)’를 금선묘(金線描)로 그렸다 는 기록을101)허균(許均),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6, 문부(文部)13, 비(碑), 「중수도솔원미타전비(重修兜率院彌陀殿碑)」. 통해서 볼 때 적지 않게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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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구장의 염불왕생첩경도
은해사 구장의 염불왕생첩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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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사 구장의 용접선인도
은하사 구장의 용접선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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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접인도의 17세기 제작 사례는 거의 없어 도상의 전개 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지온지 그림과 같이 단순화된 관경십육관변상도상은 그 나름대로 변화 과정을 거쳐, 예를 들면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는 있으나 개심사(開心寺)의 1767년(영조 43) 그림과 같은 도상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으며, 라이고지의 용선접인의 장면이 있는 아미타정토 도상은 역시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여 은해사(銀海寺) 구장(舊藏)의 염불왕생첩경도(念佛往生捷經圖, 1750) 그리고 은하사(銀河寺) 구장의 용선접인도 같은 도상을 만들어 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868년(고종 5)에 제작한 것이지만 통도사에 용선접인도라 일컫는 그림이 전하고 있어 용선접인의 신앙은 조선 전 시대를 통하여 일관되어 왔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인간은 선후(先後)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한시적 생명체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사멸(死滅)한 오곡(五穀)이 봄에 다시 재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역시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부활한다고 믿었다. 이 부활은 불교의 내세관으로 발전하였고 업보에 따른 선악의 이분법 적 세계를 설정하였는데, 바로 환희의 극락과 고통의 지옥이다. 또한, 지옥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갈 수 있는 곳임에 반하여 극락은 절대자인 아미타여래의 위신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세를 인정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할 것이며, 그 바람을 시각화시킨 것이 서방정토 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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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의 용접선인도
통도사의 용접선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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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 미술은 국가, 민족, 시대에 관계없이 동일한 텍스트(경전)를 바탕 으로 만들어졌지만 신앙의 형태, 미의식에 따라 표현 방법이 다르고 또한 변화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토 미술은 불화를 통하여 볼 때 고려시대의 관념적 도상이 조선시대에 들어 서서히 서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 도상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고려시대에는 경전에 대한 상당한 이해와 지식을 갖지 않으면 내용조차 읽어 낼 수 없을 정도의 복잡한 구도의 관경십육관변상도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곧 관념보다는 극락왕생의 방편을 시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요소가 이 도상에 더해지고 확대되어 이윽고 불특정 다수를 태우고 극락으로 가는 용선 도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종교는 이상과 현실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인간에게 실현 가능성을 제시하여 왔고, 그 하나가 서방 극락세계의 시각화(視覺化)였다. 이 글에서는 정토 신앙의 인식과 시각화의 의미와 과정,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였으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내세 도상의 양상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었다는 성과에 만족하고 싶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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