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
  • 1. 제작 과정을 통해 본 신앙과 조형 의식의 결합
  • 재료와 제작 기법
정은우

불교 조각의 재료와 기법은 매우 다양하며 국적, 시기, 지역에 따라 다른 특성을 보인다. 재료를 이해하면 그 시대의 양식 및 특성을 이해하기가 쉽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에는 소금동불과 석불, 마애불이 유행하며, 통일신라시대에는 금동불과 석조 불상, 철불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철불과 석불이 유행하다가 중기에 이르면서 목조불과 금동불이 성행하였고, 후기에 이르면 60㎝ 이상의 대형 금동불과 소조, 목조, 건칠불(乾漆佛) 등 다양한 재료가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급격하게 금동불이 사라지면서 소조와 목조불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그 크기도 현격하게 커진다. 이러한 재료의 시대적 차이는 정치적인 변화, 사찰의 경제력, 불사를 주도하는 후원자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같은 재료일 경우에도 시대에 따라 다른 제작 방법과 기법이 유행하게 된다.

불상은 재료가 무기질이며, 덧붙이거나 쪼거나 깎는 작업을 거쳐 제작한다. 예배 대상은 구하기 쉽거나,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최고의 재료로 만들며, 장인의 기술과 기교, 창의성, 예술성, 신앙심 등에 의해 작품은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 따라서 작품은 재료와 더불어 작가의 기량과 열정, 시대성이 합쳐져 영원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의미와 재료에 대해서는 경전에 자세히 나타난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방편품(方便品)에는 다음과 같이 설(說)하고 있다.

어떤 이는 부처를 위해 여러 형상을 세우거나 부처님상 조각하면 그들도 이미 성불하였고 혹은 칠보로나 놋쇠나 백동들과 납, 주석, 쇳덩이나 나무, 진흙으로 이루며 혹은 풀과 옷칠하여 부처님상 장엄하면 이와 같은 모든 사람 모두 다 불도 이루어……102)『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방편품(方便品) 제2, 『대정신수대장경』권262와 권263.

즉,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는 공덕보다 더 빨리 성불하는 길이 불사를 일으키는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불사는 곧 시주와 연결되는 것으로 후원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 철, 흙, 나무, 칠포 등 불상의 재료까지도 설하고 있는데 지속성이 강하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든 재질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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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 탑 내 발견 순금제 여래 입상
황복사지 탑 내 발견 순금제 여래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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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 탑 내 발견 순금제 여래 좌상
황복사지 탑 내 발견 순금제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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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재료 가운데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변함없이 많이 사용되었고 귀한 물질로 여겼던 것은 금이었다. 다른 재료로 불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작업은 그 위에 금을 씌워 마감하는 개금불사(改金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는 가장 귀하고 고귀한 재료인 금을 통해 불상에 영원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금만이 아니라 불상의 재료로 순금만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주로 왕실과 같은 귀족층에서 특수한 목적으로 조성되었던 것 같다. 순금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경주 구황동 황복사지(皇福寺址) 3층 석탑 사리함(舍利函)에서 발견된 여래상 두 구(입상과 좌상)이다. 사리 그릇의 뚜껑과 명문을 통해 692년(신문왕 12) 효소왕과 신목 태후가 조성하였고, 706년(성덕왕 5)에도 아미타상 한 구를 또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높이 12㎝, 14㎝의 작은 상으로 대좌와 광배까지 갖춘 순금제 불상이며, 금판을 두드려 편 다음 여러 가지 기구를 이용하여 오리거나 새겨 만든 귀한 작품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도 988∼997년(성종 7∼16)에 조성된 수도 개성의 왕륜사(王輪寺)에 모신 비로자나불상이 장륙금상(丈六金像)으로 주조되었다 하는데 ‘용금(鎔金)’을 부었다는 기록에서 실제 순금일 가능성이 높다. 장륙 의 크기는 16척으로 약 5m인데도 주조가 가능하였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점도 있지만, 순금을 이용한 대형 불상의 주조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현존하는 실제 작품으로는 고려 후기(1361년 추정)에 제작된 것으로 익산에서 발견된 높이 5.1㎝의 작은 순금판 여래 좌상을 들 수 있다. 이 상은 앞면과 뒷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면에는 닫집 아래 촉지인(觸地印)을 한 불상이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뒷면에는 ‘신축(辛丑)’ 으로 시작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발원자(發願者)의 이름도 있다. 순금을 두드려 편 다음 정교하게 불상 등을 부조하고 뒷면을 따로 만들어 마감한 작품으로, 호지불(護持佛, 항상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작은 불상) 또는 장식용일 가능성이 있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북원(北元)과 오(吳)나라의 사신들이 고려에 와서 각각 황금불을 바쳤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있어 순금불은 나라마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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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판 여래 좌상의 뒷면
순금판 여래 좌상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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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 보살 좌상
은제 보살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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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금을 대체하여 순은으로 조성한 상도 적지만 남아 있다. 순은불은 확실하게 조사된 상이 적어 약 10여 구 정도가 알려져 있으나 앞으로 성분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그 수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경주 천룡사지(天龍寺址) 출토의 고려시대 보살 좌상이 은제불로 판명된 바 있으며, 순은과 동 등의 다른 금속을 8 대 2 정도로 혼합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는 은이 융점이 낮아 주조가 쉽지 않기 때문으로 다른 금속과 합금함으로써 제작의 편리함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 순금과 은을 이용한 작품들은 아직 조사된 예가 적어 시대성을 살필 수는 없지만, 귀족층을 중심으로 전 시대에 걸쳐 꾸준하게 조 성되었을 것이며, 주로 호지불이나 탑 안에 모시는 사리 장엄용 등의 특수 목적으로 주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대적으로 가장 많은 수가 남아 있는 불상은 동(銅)으로 조성한 동불인데, 동을 재료로 상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금으로 씌운 금동 불상이 가장 많다. 동은 합금으로 구리(Cu), 주석(Sn), 납(Pb), 황(Sb), 철(Fe) 등의 성분을 배합한 비싼 재료로서,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하고 밀랍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보편적인 재료라 할 수는 없지만 내구성이 뛰어나 오늘날까지 잘 남아 있다. 금동불은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 가장 많은 수가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 초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꾸준하게 유행하였다.

금동불을 주조할 때는 밀랍을 사용하기 때문에 밀랍법(密蠟法), 실랍법(失蠟法), 멸랍법(滅蠟法)이라고 부르는데, 속이 흙으로 꽉 찬 통주식(通鑄式)과 속이 비어 있는 중공식(中空式)으로 분류된다.103)곽동석, 「제작 기법을 통해 본 삼국시대 소금동불의 유형과 계보」, 『불교 미술』 11, 동국대학교 박물관, 1992, 7∼53쪽 ; 정부미, 「백률사 금동여래 입상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58∼88쪽. 통주식이란 안틀로 전체적인 형태를 뜨고 그 위 전체에 밀랍을 씌워 세부 조각을 한 다음, 바깥틀을 만들어 열을 가해 밀랍을 녹이고 여기에 동을 녹여 부어 굳힌 뒤 바깥틀을 떼어 내는 주조 방법이다. 중공식이란 같은 방법이지만 불상의 머리나 밑바닥을 통해 안틀의 흙을 제거함으로써 안을 비게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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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 제작 기법
금동불 제작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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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조 기법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인 삼국시대에 는 통주식과 속이 빈 중공식이 같이 나타나며, 이후 통주식이 거의 없어지면서 발전된 기법인 중공식으로 점차 정착된다. 동불은 주로 전체를 하나로 만들지만 8세기에는 일본 대마도 구로세관음당(黑瀨觀音堂) 금동 여래 좌상처럼 불신의 상체와 하체, 대좌 등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분할 주조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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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세관음당 금동 여래 좌상
구로세관음당 금동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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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세관음당 금동 여래 좌상
구로세관음당 금동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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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은 동이나 밀랍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 거대한 상을 만들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를 보완해 주는 재료가 철인데, 금동불과 같은 방법으로 주조하게 되지만 밀랍을 사용하지 않는 점이 다르며, 1m 이상의 거대한 크기 때문에 분할 주조법이 일반적이다.104)철불의 주조 기법에 대한 상세한 논문으로는 강우방, 「통일신라 철불과 고려 철불의 편년 시론」, 『미술 자료』 41, 국립 중앙 박물관, 1988 : 『원융과 조화』, 열화당, 1990, 282∼304쪽 재수록 참조.

제작 방법은 중앙에 못심을 세우고 그 안에 철심으로 고정한 다음 모래와 점토를 혼합한 흙으로 원형을 만든다. 원형의 표면 위로 점토를 이용하여 세밀하게 불상의 원형을 만든 다음 여러 조각으로 잘라 열을 가하여 건조시킨다. 이 부분들이 원형이 된다. 각 부분의 내형들을 깎아 낸 다음 외형토로 고정하고 형지와 철못 사이에 녹인 철을 부어 완성하는데, 조각 낸 틈 사이로 쇳물이 흘러나와 이음새의 흔적이 남게 된다. 이때 깎아 낸 만큼이 불상의 두께가 된다. 1m 이상의 대형 철불의 경우 내형과 외형을 고정하기 위한 길고 짧은 철못이나 형지가 수십 개씩 필요하며, 고정하였던 둥근 형지 자국들이 표면에 마치 둥근 장식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완성 후 사이를 고정하였던 철못은 제거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의 철못은 그대로 남아 있다.

철은 이르면 8세기 중엽 또는 9세기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 불상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는 잦은 전쟁으로 인한 동의 부족, 무기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한 철 생산이 늘면서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점, 금동불과 같 은 기존의 주조 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던 점 때문에 통일신라 이후 애용되었던 것 같다. 대표적인 철불로는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출토 철조 여래 좌상과 경기도 광주 철불로 알려진 철조 여래 좌상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철불은 크기 면에서나 남아 있는 수, 조형적 옆면에서 볼 때 동아시아 내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105)철불은 중국의 경우 오대 이후 여러 점이 남아 있으나 크기에서나 수적으로나 많은 편은 아니다. 대규모로 조각된 예로는 허난성(河南省) 중악묘(中嶽廟)의 1064년 신장상들이 260㎝ 내외로 가장 크며, 산시성(山西省) 박물관 소장의 60∼90㎝ 정도의 북송대 철조 나한상들, 그리고 산서성 현중사 철불 정도가 알려져 있다. 따라서 9∼10세기 대형 철불의 유행은 우리나라만의 특성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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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춘궁리 출토 철조 여래 좌상
광주 춘궁리 출토 철조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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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전래 이후 많이 조성하였을 불상은 소조불이다. 소조불은 점토를 이용하여 계속 붙여 나가면서 일정한 형태를 만든 다음 말리거나 불에 굽는 기법으로 테라 코타(terra cotta)라고도 한다. 흙을 사용하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들고 수정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내구성이 약해 부서지기가 쉬워 오래된 작품은 적은 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고구려의 불상이 가장 오래되었다. 고구려의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에서는 여래 204점, 보살 108점 등 천불(千佛)일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 나온 바 있으며,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에서도 다량의 소조불이 나온 바 있다. 또한, 충남 청양에서 나온 대좌는 백제 7세기 작품으로 높이 90㎝에 폭이 250㎝나 되는 대형 소조이다. 소조불은 크기에 관계 없이 비교적 쉽게 조각할 수 있고 제작비가 저렴한 점이 장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로 이어지고 조선시대에는 10m가 넘는 대형 불상이 다수 조성된다. 조선시대의 소조불은 삼국시대와 달리 형태가 크기 때문에 안에 목심을 받치고 그 위에 점토를 붙여서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삼베와 칠, 그리고 개금을 이용하여 표면 처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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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조 불두(塑造佛頭)
소조 불두(塑造佛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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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마다 보편적으로 사용한 재료는 석재였다. 중국에서는 질 좋은 석회암(石灰巖)을, 인도에서 는 편마암(片麻巖)을 이용하여 특색 있고 아름다운 불상을 제작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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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 불상 대좌(陶製佛像臺座)
도제 불상 대좌(陶製佛像臺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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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각 지역에 산재하는 질 좋은 돌을 이용하여 재료에 따라 시대적 특성을 담은 불상을 만들어 왔다. 6세기 백제에서는 곱돌이라고도 하는 연한 납석(蠟石)을 사용하여 마치 비누를 벗기듯이 깎아 부드럽고 넉넉한 불상을 만들었다. 납석은 결이 곱고 부드러워 조각하기 쉬우나 규모가 큰 불상은 부스러지기 쉽고 오래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불상보다는 장신구나 탑지석(塔誌石) 그리고 생활 용구의 재료로 애용되었으며, 이를 보완하여 백제는 6세기 후반부터 화강암(花崗巖)을 불상의 재료로 쓰기 시작하였다. 화강암은 경도가 강하고 단단하여 크고 작은 망치나 정으로 쪼아 조각함으로써 돌의 질감을 그대로 살릴 수 있고, 역강(力强)한 느낌의 기념비적인 불상을 조각할 수 있었다. 무게와 크기 때문에 다른 장소로 옮기기 어려워 제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의 성격상, 다른 불상의 편년과 국적을 추정하는 데 양식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태안 마애 삼존불과 같은 마애불(磨崖佛)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환조불(丸彫佛)로 이행되어, 현재 경주 남산의 곳곳에는 신라의 석불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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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탑곡 마애 조상군
경주 남산 탑곡 마애 조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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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으로 조성한 석불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가장 흔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화강암은 우리나라만의 재료적 특징으로 볼 수 있으며, 석굴암(石窟巖)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다. 화강암으로 조성한 불상 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것은 마애불이다. 깊은 산속 높은 곳 우뚝 솟은 바위 면에 고부조(高浮彫)나 선각(線刻)으로 새겨진 마애불들은 돌의 질감 그대로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독특한 조형성을 가진 대표적인 불상을 남겼다. 미소가 아름다운 서산 마애 삼존불, 신비로움 가득한 경주 남산 탑곡 불상들, 고려의 선비를 닮은 안동 이천동 마애 석불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시대에는 화강암과 더불어 대리석(大理石)도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수도 개성과 강원도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강원도 한송사지(寒松寺址) 석조 보살상을 비롯하여 개성 천마산 관음굴 내부에 있는 보살상이 이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재료인 불석(沸石)을 사용하였는데 마치 석회처럼 하얀색을 띠기 때문에 석고와 구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불석은 부드러운 재료적 특성상 깎아서 조각하기 때문에 끌 자국이 그대로 잘 남아 있다. 불석은 경주 불석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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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천마산 석조 관음보살 좌상
개성 천마산 석조 관음보살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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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법보전 목조 여래 좌상
해인사 법보전 목조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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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나라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는 나무였을 것이다. 나무는 쉽게 구할 수 있고 조성하는 데에 일정한 공간과 기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보편적 재질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동명왕상(東明王像)을 목조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이를 입증하며, 일본 고류사(廣隆寺) 목조 반가 사유상이 만일 우리나라 작품이라면 이 역시 삼국시대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106)정은우, 「일본의 국보 1호인 광륭사의 목조 반가상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인가」, 『미술사 논단』 2, 한국 미술 연구소, 1995, 415∼437쪽. 이 반가 사유상은 전체를 하나의 큰 목재로 만든 것으로 삼국시대에는 이러한 일목조 방식이 일반적이었다는 점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최근 통일신라의 해인사(海印寺) 법보전(法寶殿) 목조 여래 좌상이 새롭게 소개되어 통일신라의 목조 불상이 추가되었다. 이 목조 여래 좌상은 1m가 넘는 대형 불상으로 불신은 하나의 나무이지만 옆으로 돌출된 양 무릎은 따로 만든 다음 이어 붙인 일목조임이 밝혀졌으며 100년 이상된 향나무로 제작하였음도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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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목조 보살 좌상
봉정사 목조 보살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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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고려시대 이후 가장 보편적인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가장 이른 고려시대의 작품은 1199년(신종 2) 안동 봉정사(鳳停寺) 목조 보살 좌상이다. 봉정사 목조 보살 좌상은 3개의 나뭇조각을 이어 붙인 접목조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도 많아지고 대형 불상도 많이 남아 있어 소조불과 더불어 목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체로 여러 개의 나무를 이어서 전체적인 형태를 뜬 다음 각기 다시 조각하고 이어 붙임으로써 철저한 분업을 이루어 대형 불상도 쉽게 제작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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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불 제작 기법
목조불 제작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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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불 제작 기법
목조불 제작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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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한 재료로 만든 불상으로는 건칠불(乾漆佛)이 있다. 건칠불이란 삼베와 칠을 이용하여 만든 불상을 말하며, 기법에 따라 탈건칠(脫乾漆)과 목심건칠(木心乾漆)로 분류되나 우리나라의 건칠불은 거의 탈건칠로 제작된다. 탈건칠은 나무와 흙으로 대체적인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삼베와 칠을 예닐곱 번 정 도 칠하여 충분히 건조시킨 다음, 내부의 나무와 흙을 제거하고 팔이나 무릎 등을 부분적으로 나무로 보강한 것이다. 목심건칠은 내부에 목심을 두는 기법으로 이때의 목심은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조각 나무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후 삼베와 칠로 불상의 형태를 만드는 방법은 탈건칠과 같다. 눈은 수정이나 옥으로 상감(象嵌)하여 생동감 있게 처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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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칠불 제작 기법
건칠불 제작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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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칠불은 우리나라보다는 원래 일본에서 발달한 기법으로 7∼9세기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 시기의 기념비적인 우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건칠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재료를 말하는 단어로서 상의 경우에는 고려시대 이후 칠포(柒布) 또는 칠상(柒像), 중국에서는 협저(夾紵)로 불렸다. 『묘법연화경』에도 불상을 만드는 재료를 열거하는 가운데 칠포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따라서 여러 명칭 가운데 칠포가 가장 적합한 용어임을 알 수 있지만 현재는 건칠불이라는 일본식 용어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건칠은 값이 비싼 칠이 대량으로 필요하고 제작 방법이 까다로우며 잘 마르지 않아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견고성이 뛰어나고 정교하여 복잡한 형태의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칠이라는 비싼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보편적이지는 못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종이로 대신하는 지불(紙佛)과 병행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에 그릇, 부채, 화살 등에 쓰는 칠의 사용을 금하는 등 칠의 부족을 언급하고 있는 점과도 관련된다고 보며, 이를 통해 당시 귀한 재료였음을 알 수 있다. 문헌에 전하는 불상으로는 해인사판당중수기(海印寺板堂重修記)에 쓰여진 1488년(성종 19) 해인사 대적광전의 주불(主佛)과 비로자나 삼존불이 칠포로 조성된 예가 있으며,107)최은령, 「동아 대학교 박물관 소장 건칠 대세지보살 입상」, 『동악 미술 사학』 2, 동악 미술사 학회, 2001, 32쪽 주 8.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전남 나주 심향사(尋香寺) 건칠 여래 좌상, 불회사(佛會寺) 건칠 여래 좌상, 경북 영덕 장륙사(莊陸寺) 건칠 보살 좌상(1395년 복장), 포항 기림사(祇林寺) 건칠 보살상(1501), 강원 양양 낙산사(洛山寺) 건칠 보살 좌상 등 다수가 전한다. 건칠불은 현재 남아 있는 작품으로 보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다수의 작품이 집중되어 있어 재료에도 지역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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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향사 건칠 여래 좌상
심향사 건칠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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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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