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
  • 2. 미술품과 장인의 역할
  • 장인이란
정은우

장인(匠人)이란 물건을 제작하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인데, 어느 옆면으로 보느냐에 따라 제작자, 작가, 예술가라는 다양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인의 명칭은 시대나 신분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삼국시대에는 와박사(瓦博士), 노반박사(鑪盤博士) 등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뛰어난 장인에게 박사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성덕대왕 신종에 명기된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 차박사(次博士) 등이 있어 박사라는 명칭이 계속 이어졌으며 백사(伯士, 804년 선림원 종), 또는 백사(百士, 963년 일본 히로시마현 조우렌지(照運寺) 소장 종)라는 새로운 명칭도 썼음을 알 수 있다.117)박경원, 「고려주금장고(高麗鑄金匠考)-한중서(韓仲敍)와 그의 작품」, 『고고 미술』 149, 한국 미술사 학회, 1981, 6∼22쪽 ; 최응천,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의 종합적 고찰」, 『동악 미술 사학』 8, 동악 미술사 학회, 2007, 69∼70쪽. 돌을 다루는 장인은 석장(石匠, 879년 선방사탑 지석)이라고 불렀는데 이로 보면 관(官)에 속한 장인인 경우 박사, 개인적으로 일하는 장인인 경우 장(匠)의 명칭을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에는 공예의 경우 통일신라의 명칭 그대로 대백사(大百士, 963년 종)라든지, 더 구체적인 지명과 신분까지 포함된 경양공(京良工), 즉 개경에서 활동한 양인(良人, 1202년 반자)이 사용되며 이름과 직급에 따라 대장(大匠), 부장(副匠) 등으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불상에 남아 있는 장인에 대해 1024년(현종 15)의 승가 대사상(僧伽大師像)의 광배 뒷면에 새겨져 있는 명문에는 “마탁자석광유(磨琢者釋光儒)”라 하여 정으로 쪼아 만드는 작업과 관련된 용어를 직접적으로 붙이고 있다.118)진홍섭, 『한국 미술사 자료 집성』 1, 일지사, 1987, 238쪽. 이러한 상황은 고려 말에도 이어져 나옹 선사(懶翁禪師)의 호지불(護技佛)로 알려진 구례 천은사(泉隱寺) 불감(佛龕)에도 “조상신승 조장김치(造像信勝造藏金致)”라 하여 상은 신승이, 불감은 김치가 각기 만든 것이라 새겨져 있다. 즉, 상을 만든 사람과 장을 만든 사람으로 분류하여 단순하게 표기하고 있어 장인의 신분에 대한 그리고 관에 속하지 않은 장인들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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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사 불감
천은사 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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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면 통일된 획일적인 명칭이 사용된다. 즉, 화원(畵員), 화사(畵史) 등인데, 이는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명칭에서 하나의 대명사로 쓰였던 것 같다. 국가에서 화가를 관장하는 도화원(圖畵院)은 화국(畵局), 도화원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고려 예종 연간(1105∼1122) 무렵부터 있었다고 한다.119)홍선표,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136쪽. 조선시대에는 도화원(도화서의 전신)이 설치되고 직제가 정해짐에 따라 화사, 회사(繪史), 화원 등의 명칭이 확립되었다.120)안휘준, 『한국 회화사』, 일지사, 1991, 121∼124쪽. 이후 불상이나 불화를 그리는 장인도 모두 화원이나 화사라는 명칭을 즐겨 애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경우에는 화원, 양공(良工), 편수(片手), 화수(畵手) 등으로 나뉘어 불렀으며, 불화의 경우에는 화원, 화사(畵士), 화사(畵師)가 가장 많이 쓰였다. 이 밖에 상을 만든 사람들을 통칭하여 상장질(像匠秩)이라 한 1612년(광해군 4) 함양 상연대(上蓮臺) 목조 관음보살 좌상의 발원문의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화원질(畵員秩)이라는 용어를 가 장 많이 사용하였다.121)송은석, 『17세기 조선 왕조의 조각승과 불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382쪽. 화원은 그 위치에 따라 상원(上員), 차원(次員), 또는 대화사(大畵師), 차화사(次畵師)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장인들은 관에 소속된 관장(官匠)과 개인적으로 활동하였던 사장(私匠), 승려 집단의 장인인 승장(僧匠)으로 분류되며 표기도 다르게 하였던 것 같다. 예를 들어 흑석사(黑石寺) 목조 아미타불상을 만든 ‘화원 이중선(畵員李重善)’은 관장 또는 개인적으로 활동한 장인으로 분류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천은사 불감의 “조상신승과 조장김치”는 역시 사장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비구□□” 등 승려의 법명을 남기는 경우는 모두 승장으로 분류된다.

우리나라에서 장인의 이름을 작품에 남겨 놓는 경우는 임진왜란 이후의 작품에서 어느 정도 파악될 뿐 그 이전에는 매우 드문 편이다. 삼국시대 작품 가운데 장인의 이름이 등장하는 예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가 착용하였을 520년(무령왕 20)의 은제 팔찌를 보면, ‘다리작(多利作)’, 즉 다리가 만들었다는 내용에서 왕실 소속의 공예가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경주에서 활동한 조각가 양지(良志)와 무게 30만 근의 분황사(芬皇寺) 동조 약사여래상을 755년(경덕왕 14)에 제작하였다는 강고내말(强古乃末)의 이름이 등장한다. 양지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강고내말에 대해서는 이름만 나와 있을 뿐이지만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까지 알려져 있었고, 분황사가 왕실과 연관된 사찰이었던 사실, 그리고 30만 근에 이르는 대형 동불을 제작할 수 있었던 기량으로 볼 때 8세기 중엽 최고의 작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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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작명(多利作銘) 은제 팔찌
다리작명(多利作銘) 은제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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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 석굴암을 비롯한 왕실 차원의 불사에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제작한 뛰어난 장인이 많이 있었겠 지만 작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고려 이후로는 간혹 장인의 이름이 남아 있지만 그 수는 매우 적으며,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적은 시기는 조선 후기 이후 활발해진다. 그 이유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작가들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통일신라까지는 장인의 이름을 남길 필요성이 없었거나, 장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개인보다는 어떠한 집단에 소속된 관 체제하의 장인들은 개인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국가 소속의 관장과 사찰에서 활동하는 승려들의 그룹인 승장의 구분이 더욱 확실해졌다. 특히, 불교 미술에서는 왕실 차원의 불사가 줄어들고, 사찰 내의 경제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나타나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사찰 수공업이 세부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강원도 평강의 부석사(浮石寺)에서는 미투리를 생산하였으며122)김갑주, 『조선시대 사원 경제 연구』, 동화출판사, 1983, 116∼123쪽. 닥나무 등의 원료가 풍부한 사찰의 지리적인 조건으로 제지 산업에 주력한 사찰도 보인다.123)김갑주, 앞의 글, 126∼135쪽. 불화를 그리거나 불상을 조각하는 작업 역시 넓게는 사찰 수공업의 일환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특히, 불교 미술은 기술 이외에 의궤상(儀軌上) 알아야 되는 규범이 많아 일정한 신앙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승려 장인들에게는 가장 적합한 분야였을 것이다. 게다가 문도들이나 스승과 제자, 혹은 같은 지역 내의 유파에 의한 계보가 이어지는 성격이라든지 일정한 공간에 같이 거주하는 승려들의 사회적 조건 역시 그러한 계보를 가능하게 하였다. 계보가 중요해지고 독립적인 성격을 드러내면서 승장은 각자의 이름을 남겼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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