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
  • 2. 미술품과 장인의 역할
  • 조각가 양지를 아시나요
정은우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가로서 이름이 남아 있는 유일한 인물은 양지(良志)이다. 『삼국유사』에 7세기에 활동하였던 인물로 소개되어 있는데,124)『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4, 양지사석(良志使錫). 양지에 대한 논문으로는 다음이 참고가 된다. 문명대, 「양지와 그의 작품론」, 『불교 미술』 1, 동국대학교 박물관, 1973, 1∼24쪽 ; 강우방, 「사천왕사지 출토 채유 사천왕 부조상의 복원적 고찰」, 『미술 자료』 25, 국립 중앙 박물관, 1980 : 『원융과 조화』, 열화당, 1990, 159∼201쪽 재수록 ; 강우방, 「신양지론」, 『미술 자료』 47, 국립 중앙 박물관, 1991 ; 장충식, 「석장사 출토 유물과 석양지의 조각 유풍」, 『신라문화』 3·4,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7, 87∼118쪽 ; 문명대, 「신라 대조각장 양지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 『미술 사학 연구』 232, 한국 미술사 학회, 2001, 5∼19쪽 ;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박물관 편, 『래여애반다라』, 2006. 9. 그 의 활동과 작품, 그당시 양지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짧지만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다.

먼저 그의 활동 연대에 대해서는 선덕여왕대(632∼646)라고 말하고 그의 고향과 선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서 신비적이고 기이한 그의 행적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였다. 즉, 양지가 지팡이 끝에 포대를 달아 놓으면 직접 시주자의 집으로 날아가 흔들리면서 우는 소리를 냈는데, 시주자가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포대가 차면 저절로 돌아왔다고 하며, 이에 연유하여 살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 이름 하였다 한다.

그가 만든 작품으로는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 천왕사탑(天王寺塔) 및 팔부신장, 법림사(法林寺)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 일곱 작품의 사례를 열거하였다. 즉, 그와 관련된 사찰은 거주한 석장사를 비롯해서 영묘사, 천왕사, 법림사 등이 된다. 영묘사는 635년(진덕 여왕 7)에 세운 사찰이다. 천왕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125)『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2, 문호왕 법민(文虎王法敏). 당나라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명랑 법사(明朗法師)와 유가 명승(瑜伽明僧) 두 명이 문두루 비법을 행해 당나라의 칩입을 막고, 그 이후 사천왕사(四天王寺)를 679년(문무왕 19)에 세웠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사천왕사는 국가적인 위급에 대처하기 위한 호국적인 성격 아래 창건된 국가적 대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명랑 법사와 같은 밀교 승려와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왕사는 현재 발굴 중에 있는데 쌍탑(雙塔)으로 이루어진 목탑지가 밝혀졌으며 사천왕사라 쓰여진 기와도 발견되었다. 1982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석장사지도 발굴되어 다수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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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명문 기와 탁본
사천왕사명문 기와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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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양지는 선덕여왕대부터 사천왕사가 창건되는 679년 등 삼국시대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에 걸쳐 7세기에 활동한 조각가로 좁혀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사천왕사 등 당대 왕 실에서 창건한 국가적인 호국 사찰의 조각을 담당할 정도로 최고의 소조 조각가였음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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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유사천왕상전
녹유사천왕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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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유사천왕상전
녹유사천왕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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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가 만든 실제 전불(塼佛)도 발굴을 통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작품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앞에서 열거한 양지의 작품 중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두 가지이다. 즉, 경주 석장사지와 사천왕사 발굴에서 출토된 소조불들로서 부조의 틀로 찍어 낸 다음 표면에 갈색의 유약을 입혀 구운 전돌로서 채유전(彩釉塼)이라 부른다. 특히, 사천왕사에서 나온 녹유사천왕전(綠釉四天王塼)을 보면126)이 사천왕에 대해서는 기록상의 ‘천왕사탑 및 사천왕상’에 의해 팔부중으로 조각하였다는 설도 있다(문명대, 앞의 글, 1973, 1∼24쪽). 사천왕사 쌍탑 중 서탑 목탑지가 현재 발굴 중에 있고 기단부가 현재 나와 있으므로 앞으로의 발굴 성과에 따라 도상의 문제는 증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현재의 팔부중 도상은 일본에 남아 있는 작품 사례라든지 신라의 경우 8세기 석굴암 이후 나타나는 도상인 점, 그리고 중국에서의 팔부중 역시 8세기 이전 작품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도상과 시원의 문제 등과 함께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내에서 풀어야 될 주제이다. 부릅뜬 눈에 치켜 올려진 눈초리, 굵은 눈썹에 호통이 느껴지는 얼굴 표정,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갑옷의 표현, 사천왕의 무거운 몸에 짓눌려 눈까지 튀어나올 듯 고통스런 아귀들의 모습은 사실적인 표현력에 이미 도달하였음을 알려 준다. 이 밖에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사천왕의 균형 잡힌 위풍당당한 자세와 더불어 주변을 압도하는 표정 묘사는 물론 정신력의 극치를 보인다. 녹유전의 가장자리에는 인도의 수신 마카라가 장식되었는데, 인도와 중국에서는 많이 발견되는 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는 요소이다. 이 채유전들이 있었던 위치는 현재 진행 중인 발굴에서 기단부에 있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즉,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양식과 도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재해석하여 제작 된 작품임을 알 수 있어 당나라를 비롯한 외국과 빈번히 교류하던 당시 국제화된 수도 경주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석장사에서 출토된 작품은 완형이 거의 없이 편들만 출토되었는데, 주로 불상과 신장상들이다.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채유전보다는 크기에서나 정교성에서 떨어지는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도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조각품이다. 이들은 모두 양지의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장인과 작품 그리고 문헌 기록이 일치하는 신라 7세기의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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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의 목탑지 기단부 발굴 광경
사천왕사지의 목탑지 기단부 발굴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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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양지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잡예(雜藝)에 능통하여 그 신묘함이 비길 데 없다.

재전덕충(才全德充)하지만 대방(大方) 말기(末技)에 숨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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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상전의 다리 부분
인왕상전의 다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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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는 잡예, 즉 조각만이 아니라 서예 등 다른 분야의 미술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며 재주와 덕이 충만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기에 숨겨 버렸다는 말은 예기(藝技)에 너무 뛰어난 재주를 경시하던 시대성을 말하는 것인지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영묘사 장륙상을 조성할 때 “입정정수(入定定受)” 하였으며 이때 남녀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흙을 날랐는데 흙을 나르면서 부르는 노래인 “래여래여래여래여 애반다라 애반다의도량 공덕수질여량여래(來如來如來如來如哀反多羅哀反多矣徒良功德修叱如良如來,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슬픔 많아라 슬픔 많은 우리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오다.)”라는 풍요가 전한다고 한다.127)이 구절의 해석은 『삼국유사』, 이회문화사, 2003 ;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박물관 편, 『래여애반다라』, 2006, 표지 참조.

이 기록을 통해서 양지의 승려로서의 모습과 조각가로서의 모습에 대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양지에 대해서는 사천왕사의 창건 배경이나 문두루 비법을 행한 명랑 법사와의 관련, 그리고 요술 지팡이 같은 석장의 기록에서 밀교 승려로 묘사하기도 한다. 양지가 사실적인 묘사력이 뛰어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정수(定受)’, 즉 선정(禪定)에 들어 정수 속에서 흙을 만져 형태를 만들었다는 기록과 연관하여 단순히 기술만이 아닌 신비적이고 신앙심과 결합된 그의 작품 세계에 있다. 때로는 주술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조형 태도를 밀교 승려와 결합하여 해석하기도 하지만 작품의 제작에 있어 우수한 조각 기법은 물론 혼이 깃든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또한, 당시의 다른 조각가와는 구별되는 이국적이고 정교한 새로운 외래 요소가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어쨌든 양지는 우수한 기법과 조형성을 통해 상을 만든 조각가와 돈을 댄 후원자 그리고 예배하는 신도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공감하고 즐기는 공통적 축제의 장을 마련한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들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든지 미켈란젤로와 같이 우리나라의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에 ‘양지’라는 이름의 조각가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제작 과정에 혼이 담긴 신라 7세기의 새로운 조형 의식을 창조한 양지가 있었음은 8세기 통일신라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즉, 통일신라시대 불교 미술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바로 7세기의 창조적인 예술성에 기인한 것이며, 산 자체가 박물관인 경주 남산의 불적에서 이 시대의 신앙과 미의식 그리고 생명력 넘치는 역사의 현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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