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
  • 3. 후원자의 신분층과 시주 목적의 변화
  • 삼국시대
정은우

기원전 3세기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4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백제는 384년(침류왕 1)에 처음 불교를 공인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 중 불교 공인이 가장 일렀던 고구려는 공인 직후인 375년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이후 아홉 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였으며, 현재 터가 남아 있는 정릉사(定陵寺)의 규모는 9,100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찰 안에는 법당과 탑을 세우고 불상 등을 제작하였을 것이나 이에 대한 제작 배경이나 후원자에 대한 문헌 기록, 그리고 남아 있는 불교 미술 역시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삼국의 불교 공인이 국가 차원에서 주도되었던 점에서 볼 때 왕실이나 귀족층, 그리고 사찰에서 주도하였던 사실 정도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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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명 금동 삼존불
계미명 금동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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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역시 첫 번째 수도였던 한성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공주로 천도한 후에도 대통사(大通寺)와 같이 왕실이 주축이 되어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후 부여 왕흥사(王興寺)와 익산 미륵사(彌勒寺)의 창건 역시 왕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부여 왕흥사는 법왕이 발원하고 무왕대에 창건하였으며, 무왕은 이후에도 전북 익산에 미륵사와 제석정사(帝釋精舍)를 세웠다. 이들 사찰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백제의 부흥을 위해 부여와 새로운 거점지인 익산에 대대적으로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그 힘을 드러내 보임은 물론, 이를 통해 민중을 하나로 모으려는 목적을 위해 불교라는 신앙의 힘을 빌렸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에서의 신앙은 왕실에서부터 서서히 민중 속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이들에 의한 불교 미술의 제작도 성행하였다. 536년으로 추정하는 고구려의 연가(延嘉)7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광배 뒷면에 새긴 명문에 의해 평양 동사(東寺)의 주지와 그 신도들이 천불(千佛)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천불을 널리 유포시킬 목적으로 사찰과 신도들이 결사(結社)를 조직하여 천불을 제작하였으며, 연가7년명 불상은 이 천불 중의 한 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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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4년명 금동 삼존불
경4년명 금동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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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내세 신앙이나 소박한 목적을 담은 소형의 불교 조각도 제작되었다. 현재 평양 역사 박물관에 남아 있는 영강(永康)7년명 금동 광배(478)의 뒷면에 적힌 발원 내용을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미륵삼회(彌勒三會)에 참석하여 깨닫기를 기원하며 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평양 평천리(平川里)에서 출토된 불상은 어머니를 위해, 계미명(癸未銘) 불상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경4년명(景四年銘) 불상은(황해도 곡산 출토, 571) 자기의 스승과 부모를 위해 무량수상(無量壽像)을 만들고 있다. 모두 돌아가신 부모와 스승을 위한 내세 신앙과 결부되어 있으며, 사후의 정토왕생 신앙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고 있어 당시 민중들이 원하였던 신앙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이제 불교가 민중 속에서 뿌리를 내렸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영양왕대(590∼617)를 기점으로 도교 진흥책을 펴게 됨에 따라 불교 미술은 크게 위축되었다. 승려들도 고구려를 떠나 다른 나라로 옮겨 갔는데, 반룡사(盤龍寺) 승려 보덕(普德)은 『열반경』을 가지고 백제로, 혜량(惠亮)은 신라로(551), 혜관(慧灌)은 일본으로(605) 건너간 대표적인 승려이다.

신라는 528년(법흥왕 15)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였다. 즉, 왕실에서보다는 민중 속에서 불교가 먼저 수용되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차돈(異次頓, 506∼527)의 순교라는 사건을 겪게 된다. 법흥왕의 신하로서 불 교를 믿었던 이차돈이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이적(異跡)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 죽자 그의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128)『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3,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猒髑滅身). 이러한 순교 장면은 대리석 부조에 이차돈상으로 현재 남아 있다.129)문명대, 『한국 조각사』, 열화당, 1980, 229쪽 도 72. 이같이 민중 속에서 확대된 불교 신앙의 힘은 더욱 강력한 응집력을 띠게 된다. 신라는 544년(진흥왕 5)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고 이어서 566년(진흥왕 27)에는 황룡사(黃龍寺)를 창건하였는데, 이를 위해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와 200명의 장인을 초빙하는 등 국가적인 힘을 기울여 거대한 사찰을 건립하였다. 또한, 황룡사의 불전 뒤에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이 앉아 설법하였던 대좌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신라 건립 이전부터 신라의 땅은 불국토였으며 선택받은 민족이었다는 자긍심의 배경이 작용한 결과이다. 황룡사 역시 궁전을 위한 건축이었으나 건축 도중 황룡이 나타나 사찰로 바꾸었는데, 이도 역시 신라가 불교의 호위를 받은 나라임을 입증하는 예이다. 이어서 화랑을 미륵 신앙과 결부시키는 등 신라에서의 불교는 단순한 믿음과 신앙이 아니라 국가적인 틀을 잡고 민중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체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사찰 건축 또한 이를 응집하고자 하였던 하나의 수단으로 삼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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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석당(栢栗寺石幢)
백률사 석당(栢栗寺石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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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왕실이 후원하여 창건된 대사찰들인 흥륜사, 황룡사, 분황사 등은 현재 거의 없어지고 절터와 약간의 유적만이 남아 있다. 그 중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수도 장소로 알려진 단석산 신선사(斷石山神仙寺)의 석실에 부조된 마애조각군도 유명하다. ㄷ 자를 이루는 사각형 석실에 열 구의 부조 불상들과 미륵석상 한 구, 보살상 두 구가 남아 있으며 남면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시주자는 잠주(岑珠)라 적혀 있다.130)황수영, 「단석산 신선사 석굴 마애상」, 『한국 불상의 연구』, 삼화출판사, 1973, 194∼196쪽. 이 조각군이 김유신 장군의 후원에 의한 결과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당시 유명한 신앙처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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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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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남아 있는 수많은 석불과 절터, 한적한 골짜기에서도 만날 수 있는 남산의 불적(佛蹟)들은 신라 왕실과 민중들이 후원자가 되어 제작된 것으로 신라의 호국 불교적 신앙과 예술이 농축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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