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
  • 3. 후원자의 신분층과 시주 목적의 변화
  • 조선시대
정은우

조선시대의 불교는 건국과 더불어 유교를 중심으로 정치와 사회 질서가 개편됨에 따라 국가적인 큰 후원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불교 역시 태종대에 11종 242사에서 세종대에는 36사로 축소하는 등 급격히 유교 사회로 전환하여 갔다. 그러나 지금까지 왕실과 일반 민중들의 지주 역할을 담 당하였던 불교 신앙은 음성적으로 계속 이어졌으며 심지어 왕실에서조차 불교를 열심히 숭상하였다. 왕과 대군, 빈, 종친 등 왕실의 후원자들이 중심이 되어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고, 이들이 일으키는 많은 불사는 때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실 및 귀족들의 불사 형태는 외형과 내면이 다른 이중적인 잣대로 이루어졌다.

왕실의 불교 신앙과 이로 인한 사찰의 창건 및 중창 그리고 불교 미술의 제작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불사는 태조 이성계부터 시작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성계는 정릉에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으며, 둘째 왕자인 효령 대군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효령 대군은 강원도 상원사의 중창 불사에도 이름을 남기고 있어 왕실에서 행한 불사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이다. 세종은 1448년(세종 29)에 내불당(內佛堂)을 세웠으며 세조는 1464년(세조 10) 원각사(圓覺寺)와 1467년 현재 탑골 공원에 남아 있는 10층 석탑을 건립하였다. 1466(세조 12)에는 수도인 한양뿐만 아니라 지방의 주요 사찰인 강원도 상원사의 중창 불사에 참여하였으며, 1467년에는 세자 덕종(德宗)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낙산사(洛山寺)의 중창을 명하기도 하는 등 실질적인 왕실 불사를 주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던 문정 왕후(文定王后, 1501∼1565) 시기까지 이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왕실 차원의 불사에 의한 불교 조각으로는 1467년 현재 탑골 공원에 남아 있는 대리석으로 제작된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1466년 강원도 상원사 목조 문수 동자상이 남아 있다. 이 동자상은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 공주(懿淑公主)와 그 남편 정현조(鄭顯祖)가 아들을 낳기 바라면서 조성한 상으로,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동자 머리가 매우 특징적이다. 양감 있는 동안의 표정과 세련된 조각 기법, 섬세한 손가락의 표현 등 조선 전기 왕실 발원 조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수종사탑(水鐘寺塔)의 초층 탑신석에서 발견된 금동 불감과 그 안에서 발견된 세 구의 불상 역시 왕실 발원의 작품이다. 석가여래 좌상에서 나온 발원문에 의하면 1459년(세조 5)과 1493년(성종 24) 사이에 명빈 김씨(明嬪金氏)가 조성하였음이 밝혀졌다. 1458년(세조 4)에 제작된 경북 영주 흑석사(黑石寺) 소장의 법천사(法泉寺) 금동 여래 좌상도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懿嬪權氏)와 명빈 김씨, 효녕 대군이 시주한 불상이다.

이들 불상은 왕실의 인물이 발원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발원 목적은 지극히 개인적인 병의 완쾌라든가,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명복처, 현실에서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적 바람 등이 대부분이다.

확대보기
상원사 목조 문수보살 좌상
상원사 목조 문수보살 좌상
팝업창 닫기

조선시대의 불교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2) 등의 전쟁을 잇따라 겪으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 아래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휴정과 유정 등의 승려들이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왕실의 인정은 받게 되지만 왕실이나 귀족 세력 같은 후원 세력이 약해져 국가적 차원에서의 기념비적인 불교 미술의 제작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 왕실 불사의 예로는 정조에 의한 용주사 창건과 정조의 어의(御衣)가 나온 파계사 건칠 보살 좌상 그리고 1872년(고종 9) 명성 황후의 후원으로 제작된 서울 학도암 마애 관음 보살 좌상 등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크나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반 서민들은 종교를 통해 위로와 확고한 내세를 확인받고자 하였다. 내세를 약속하지 않는 국교인 유교 대신 불교는 민중 속으로 확실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죽은 영혼을 위한 수륙재(水陸齋), 예수재(豫修齋)를 비롯한 크고 작은 많은 재가 거행되었으며, 죽은 뒤의 세계인 지옥을 묘사하는 명부전(冥府殿)도 주요 전각으로 건립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지옥의 심판자로서 시왕(十王) 중의 한 명인 염라대왕(閻羅大王)과 검은 옷으로 대변되는 지옥사자(地獄使者)는 이야기 속에서 나와 실제 시각적으로 구성된 가장 보편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는 전쟁 중 불타 없어진 불사를 재건하면서 다양한 전각과 다양한 도상의 불교 미술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 불상의 특징은 재료는 목조와 소조가 많아지고 크기는 대형화하는 점이다. 목조불과 소조불의 재료인 흙과 나무는 이전 시기 왕실 발원 불상의 주 재료였던 금동보다는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값이 싼 특징이 있다. 그러면서도 크기는 5m 이상의 소위 장륙불이라 일컫는 대불이 많아지는데, 이 경우 소조불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불상이 커지면서 이를 모시는 전각도 대형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 대불들은 근엄하면서도 딱딱한 모습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봉안(奉安) 방법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1626년(인조 4)의 충북 보은 법주사 대웅전의 소조 삼존 불상(본존불 크기 450㎝), 1641년(인조 19)의 송광사 대웅전의 소조 삼세 불상(565㎝), 충남 부여 무량사 소조 삼존 불상(520㎝) 등 5m 이상 되는 대불을 들 수 있다.134)조선 후기 대불에 대해서는 심주완, 「임진왜란 이후의 대형 소조 불상에 관한 연구」, 『미술 사학 연구』 233·234, 한국 미술사 학회, 2002, 95∼135쪽 참조.

확대보기
무량사 극락전 소조 아미타 삼존불
무량사 극락전 소조 아미타 삼존불
팝업창 닫기

이러한 특징은 이 시기 후원자 계층과 연관되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각 사찰의 승려들이나 지방의 관리 및 유지, 서민들로 구성되는 후원자 집단의 약한 경제력은 값비싼 재료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나 흙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세에서의 다양한 바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크기가 주는 거대함과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역동적인 부처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당시 사회와 민중들이 원한 부처의 모습은 부드러운 친근함보다는 확고하면서도 강한 이미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