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1. 불교 의례와 시각 문화
  • 의례와 의식의 역사
  • 삼국시대, 마술과 같은 신비한 힘
정명희

사찰에 현존하는 불교 문화재는 석조 문화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수많은 전화(戰禍) 속에서 전각에 봉안되었던 불교 문화재는 대부분 사라졌다. 삼국시대에 개최된 의례의 종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의례를 추측할 수 있는 시각 문화는 현존하는 예가 매우 드물다. 불교 의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진평왕대에 나타난다.

신라가 처음 백좌강(百座講)과 팔관회(八關會)를 설치하였다. 거칠부 등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중 혜량(惠亮)의 무리를 만나 함께 왕을 알현하였다. 왕은 그를 승통(僧統)으로 삼았고, 비로소 백좌강회와 팔관법을 설치하였 다. 그 법은 매해 11월(仲冬)에 궁궐의 뜰에 중을 모아 놓고, 윤등(輪燈)은 좌(座)에 걸고 향등(香燈)은 사방에 걸며, 채붕(彩棚) 둘을 매어 달고는 온갖 놀이와 가무를 하면서 복을 비는 것이다. 팔관(八關)이라는 것은, “첫째 살생하지 않고, 둘째 도둑질하지 않고, 셋째 음란한 짓을 하지 말고, 넷째 거짓말하지 않고, 다섯째 술을 마시지 않고, 여섯째 좋고 편안한 자리에 앉지 않고, 일곱째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고, 여덟째 화려한 장식과 유흥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關)은 막는다는 뜻으로 여덟 가지 죄를 금하고 막아서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승려 혜량이 백좌강회와 팔관법회를 개설하였다고 한다. 비록 불교 의식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이른 것이기는 하나 신라가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수용하였고,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가 의식을 전한 것을 보면 불교 의식은 이 기록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백좌강회는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에 의거한 의식으로, 부처의 힘으로 국가를 수호한다는 호국 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이 짙다. 궁궐 뜰에 100개의 법상(法床)을 설치하고 100명의 승려로 하여금 『인왕경』을 강의하게 하면 제천(諸天)과 선신(善神)이 국토를 잘 수호하고 국난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137)박용진, 「고려 중기 인왕경 신앙과 그 의의-의천과 대각국사문집을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14, 한국중세사학회, 2003, 149∼185쪽. 백좌강회와 함께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는 팔관회도 613년(진평왕 35) 이후 매해 11월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의식이 개최되는 공간에는 사방에 향등(香燈)을 걸고 자리에 윤등(輪燈)을 놓았다. 윤등은 야외무대에 설치한 등으로, 바퀴 모양의 걸이에 수십 개의 등불을 매다는 조명 시설이었다. 밤새 의식 공간에는 향과 빛이 가득하였다. 야외 의식 공간에 설치한 채붕(彩棚)은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막을 늘어뜨린 장식 무대로, 여러 공연과 놀이가 이곳에서 펼쳐졌다. 많은 사람이 모인 의식에는 공연이 함께 이루어졌다. 의식을 베푸는 자리는 불보살을 기쁘게 하는 연희의 장인 동시에 공동체를 하나로 묶고 결속을 다 지는 자리였다. 의식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은 시대에 따라 제한되었으나, 불교 의식이 베풀어지는 날은 일손을 놓고 일상을 떠나 공동의 목적을 위해 단합하였다. 잡기(雜技)를 공연하는 무리는 흥겨움을 북돋았고, 승려들의 범패(梵唄) 소리가 사찰에서 마을로 울려 퍼졌다. 절에서는 공양을 올린 음식을 함께 먹으며 의식을 준비한 공덕을 나누고 복을 기원하였다. 의식은 공동체를 통합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면면히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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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사경 조성기
『화엄경』 사경 조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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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교 미술품은 조성 자체가 의례의 한 과정이었다. 755년(경덕왕 14)에 조성된 『화엄경』 사경(寫經) 변상도(變相圖)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시대의 불교 회화이다.138)문명대, 「신라 화엄경 사경(寫經)과 그 변상도(變相圖)의 연구」, 『한국학보』 5, 일지사, 1979, 27∼64쪽 ; 남풍현, 「신라 화엄경 사경 조성기(造成記)의 해독」, 『고문서 연구』 2, 한국 고문서 학회, 1992, 1∼13쪽 ; 정재영, 「신라 화엄경 사경 조성기 연구」, 『문헌과 해석』 12, 문헌과 해석사, 2000, 196∼214쪽. 설법하는 부처가 있는 정토의 광경은 보살들의 풍려한 자태,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8세기 중엽 불교 문화의 우수성을 알려 준다. 경전의 끝머리에는 경전을 만들고 서사(書寫)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어 경전에 그려진 그림 이상의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사경에 쓰일 닥나무는 향수(香水)를 뿌려 키우고 성장한 연후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고 종이를 뜬다. 종이 만드는 사람, 가죽을 제련하는 사람, 경전을 필사하는 사람, 경심(經心)을 만드는 장인, 불보살을 그리는 사람은 반드시 보살계를 받고 재식(齋食)을 금해야 한다. 대소변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먹고 마신 후에는 반드시 향수로 목욕해야 하며 사경을 행할 때는 오직 경을 서사함에 힘써야 한다. 경을 베껴 쓸 때에는 청정한 신정의(新淨衣), 곤수의(褌水衣), 비의(臂衣), 관(冠), 천관(天冠) 등으로 장엄시킨 두 명의 푸른 옷(靑衣)을 입은 동자가 관정침(灌頂針)을 받들며, 청의 동자 옆에는 네 기악인이 악기를 연주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가는 길에 향수를 뿌 리며, 한 사람을 꽃을 받들어 뿌린다. 한 법사(法師)는 향로를 받들고 이끌며, 한 법사는 범패를 부르며 인도한다. 그 뒤를 이어 여러 필사들이 각기 향화(香花)를 받들고 불도를 행할 것을 염(念)하며 경을 만드는 곳에 이르면 삼귀의를 행한다. 세 번 반복하여 정례(頂禮)하고 부처와 보살에게 화엄경 등을 공양한 이후에 자리에 올라 경을 베껴 쓴다. 필사를 마치면 경심을 만들고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그리는데 이때 청의 동자와 기악인들은 제외되나 나머지 의식은 동일하다. 경심 안에는 사리 한 매씩을 넣는다.

이 기록은 사경을 만들기 위한 닥나무의 재배에서부터 필사 작업에 수반되던 의식, 사경의 제작 과정을 고스란히 전해 주고 있다. 사경 장소로 가는 길에 앞장서는 두 명의 청의 동자, 네 명의 기악인, 향로를 받드는 승려와 범패를 부르는 승려, 향화를 받들고 가는 필사자들은 1000년 전 사경을 만들던 때의 생생한 기록이다. 불교 미술품이라는 성물(聖物)의 제작은 의례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향으로, 꽃으로, 기악으로, 범패로 인도된 사경 제작 공간은 단순한 경전의 제작소가 아니라 불법이 베풀어지고 부처의 가르침이 유포되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상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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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곡사 괘불의 범자
청곡사 괘불의 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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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과정에는 범패(梵唄)가 수반되었다. 범패는 인도(梵)의 소리(唄)라는 의미로, 불교 음악을 뜻하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범패는 불교 의식을 진행하면서 곡조를 붙여 경전을 읽거나 노래로 부처의 덕을 칭송하거나 의식에 수반되는 춤과 악기, 음악을 모두 아우르는 불교 의례의 주요 요소였다.139)범음은 매우 미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즐겨 듣게 한다. 그런데 천축에서는 무릇 법음(法音)을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을 모두 패(唄)라 하였다. 그것이 이 땅에 와서는 경을 읊는 것은 전독(轉讀)이라 하고, 가찬(歌讚)은 범패라 하게 되었다(『양고승전』, 50∼51쪽). 범패의 역사에 있어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인물이 진감 국사 (眞鑑國師) 혜소(慧昭, 774∼850)이다.140)홍윤식, 「진감 국사와 범패」, 『비사벌』, 전북대학교, 1978, 103∼108쪽. 그는 우리나라에 범패를 전한 범패의 비조로 불린다. 쌍계사 진감 국사비에는 그로부터 범패를 배우려는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신라에서는 범패가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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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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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도 삼국시대 의식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141)엔닌(圓仁), 김문경 역주,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도서출판 중심, 2001. 엔닌은 당나라에 입국하였을 때 장보고(張保皐, ?∼846)가 세운 신라 사찰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법화경』을 읽고 토론하는 강경 의식(講經儀式), 일일강 의식(一日講儀式), 송경 의식(誦經儀式)을 목격하고 기록하였다. 당시에 진행된 강경 의식은 강사(講師)가 경전의 내용을 강하고 도강(都講)이 강사와 문답하여 강경을 도왔으며 범패를 맡은 승려(作梵師)의 소임도 있었다. 엔닌의 기록에 의하면 적산원에서 행해진 범패는 각각 신라식과 당나라식이 있었다고 한다.142)홍윤식, 「제종불교전통의례(諸種佛敎傳統儀禮)의 기원, 역사와 그 사상성」, 『불교 예술』 1, 한국 문화 예술인 협회, 1998, 147∼211쪽.

『삼국유사』 제4권 사복불언(蛇福不言)조에는 원효 스님이 사복의 어머니가 죽자 제문을 짓고 천도한 기록이 있으나 아직 정례화된 의식 절차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복이 어머니와 함께 사라진 곳에 도량사(道場寺)라는 이름의 절을 세우고 매월 3월 14일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고 한다.143)『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사복불언(蛇福不言). 신라시대 원광(圓光, 541∼630?)이 개최한 이래 『점찰경(占察經)』에 의거하여 계속적으로 설행되는 점찰법회는 주기적으로 의식이 개최되는 현상을 보여 준다.

삼국시대는 기이한 천재지변이나 적군의 소멸을 빌기 위해 부처의 힘에 의지하였다. 의식은 신비한 힘을 지닌 승려의 주도로 베풀어졌다. 불교 의식을 주도하는 것은 고대의 샤먼이나 제사장의 역할처럼 신(神)과 교통하 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불교 의식은 일종의 마술적인 힘으로 인식되었다. 의식을 주도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나 일정한 제문의 형식이 갖추어지고 점차 의례가 주기적으로, 일정한 순서에 의해 진행되는 현상도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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