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1. 불교 의례와 시각 문화
  • 의례와 의식의 역사
  • 고려시대, 의식의 시대
정명희

본격적인 불교 의례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의식이 도입되던 삼국시대 기록에서 의식을 주도한 승려의 행위는 있으나 의식에 참석한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의식에 참여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비해 고려시대는 의식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의식의 종류가 많았다. 정기적으로 개최되던 의식은 고려시대 들어 세시 풍속으로 굳어지기도 하였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고려시대의 불교 의례는 왕의 행적을 엮은 세가(世家)에 남아 있으며 왕이 참석한 의식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기록으로 남지 않은 고려의 불교 의식은 각계각층에서 한층 다양하게 설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44)안지원, 『고려의 국가 불교 의례와 문화-연등·팔관회와 제석 도량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5, 6∼11쪽. 고려시대의 불교 의례에 관한 기존의 지나친 ‘호국 불교론’에 대한 반기이자 입체적 해석의 시도로는 김종명, 『한국 중세의 불교 의례: 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 문학과 지성사, 2001 참조.

불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으로 삼은 고려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범위를 뛰어넘는 다양한 의식이 존재하였다. 국가 운영, 기근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 천재지변, 외적의 침입, 전염병 등 일상의 여러 분야에서 불교 의식이 설행되었다. 부처의 힘으로 국가를 보호하고자 하는 경향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도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훨씬 높았다. 불교 의식은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천령(天靈)과 나라의 다섯 명산(五嶽名山), 큰 강(大川)과 용신(龍神)에 대한 제사의 성격이 혼재되어 종합적인 성격을 띠었다.

고려시대 설행된 대표적인 4대 의식은 연등회, 팔관회, 인왕백고좌회, 소재 도량(消災道場)이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의식이다. 태조는 후대 왕들에게 연등회와 팔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할 것 을 유훈(遺訓)으로 남겼다. 연등회는 등을 밝히는 연등 행사에서 유래한다. 궁궐과 도성, 마을과 관아에 등을 환하게 밝히고 채붕을 설치하여 연희와 음악, 공연을 베풂으로써 불보살과 제천, 산신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하는 의식이었다. 개최 시기는 정월 혹은 2월 15일, 그리고 사월 초파일에 정기적으로 열렸다. 고려 왕실의 연등회는 태조에 대한 숭배 신앙과 융합되어 의식의 수행에 있어 어진(御眞) 배향이 하나의 중요한 절차가 되었다. 역대 왕은 연등회 절차 중에 봉은사(奉恩寺)의 진전(眞殿)에 모셔 놓은 태조 어진에 행향(行香)하고 연등 행사를 베풀었다.

팔관회는 인도의 팔관재에서 유래한 의식으로, 앞서 신라시대부터 정기적으로 행해진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의 여덟 가지 계율을 닦는 동시에 망자의 천도를 기원하며 산신(山神)에 대한 제사의 내용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불교 행사의 성격을 띠었다. 고려시대의 의례는 종교 행사이자 일종의 문화 행사로 베풀어졌다. 공민왕 때 개최된 문수회(文殊會)의 기록에서 의식 공간의 모습과 의식을 구성하는 사물들을 엿볼 수 있다.

왕이 연복사(演福寺)로 행차하여 문수회를 크게 베풀었다. 불전 한가운데에 채색 비단을 연결시켜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산을 빙 둘러 촛불을 켜니 촛불의 크기는 기둥만 하였고 높이는 10척이 넘었으며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실로 만든 꽃과 비단으로 만든 봉황의 광채가 눈부셨다. 폐백은 채색 비단 16속(束)을 썼으며, 중 3,100명을 뽑아 수미산을 돌아다니게 하니 범패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으며, 일을 맡아 본 사람이 무려 8,000명이나 되었다. 왕은 신돈과 함께 수미산 동쪽에 앉아 양부의 관원을 거느리고 부처에게 경배하였다. …… 중에게 밥 먹일 적에 왕이 손수 금로(金爐)를 받쳐 들고 중을 따라 향을 피우면서 조금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145)『고려사절요』 권28, 공민왕 16년 정미(김종명, 『한국 중세의 불교 의례-사상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 문학과 지성사, 2001, 76∼77쪽 재인용).

채백으로 수미산 모양을 만들거나 봉황의 형태를 만들었고 300명의 승려가 수미산 주변을 돌며 범패를 행하였다. 왕은 한편에 앉아 의식 광경을 지켜보았으며 반승(飯僧) 역시 진행되었다. 반승 행사 때에 왕은 금향로를 받쳐 들고 향을 피웠다. 채붕은 잡기(雜技)를 벌이기 위한 임시 무대로 사용되었다. 1067년(문종 21), 12년에 걸친 흥왕사(興王寺) 건립 공사를 마무리하고 낙성식(落成式)을 열 때는 뜰에서 절문까지 채붕으로 꾸몄다. 당시 낙성 법회에는 1,000명의 승려가 참석하였고 연등회는 닷새 동안 베풀어졌다. 고려시대 큰 의식은 마치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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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후쿠지의 관경십육관변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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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의식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수행을 위한 의식도 있었다. 자신의 수행을 위한 의식에는 특별한 의식구와 사물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자행 의례를 돕기 위해 불화를 그린 예도 있다. 불교의 수련 방법 중에 관상법(觀想法)이 있다. 관상법이란 어떤 상을 떠올려 마음을 다스리고 통일시킴으로써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불교 의례이다.

불화의 상단 좌우 측에는 둥근 원 안에 지는 해, 물, 나무, 연못 같은 관상을 이끄는 사물이 있으며, 그림의 중앙에는 아미타불의 설법회(說法會)와 극락정토의 연못이 그려져 있다. 각각의 장면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거한 것으로 관상을 통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열여섯 가지 방법과 관상의 결과 눈앞에 펼쳐지는 극락의 모습이다.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는 관상을 통해 자신을 참회하여 정토왕생에 이르는 수행 방식을 보여 준다. 이 불화가 개인적 신앙의 영역에서 사용되었는지, 혹은 결사나 모임과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사용되었는지 구체적인 맥락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불화의 존재는 단순히 예불화(禮佛畵)의 목적에서 벗어나 수행 의식에 사용된 불화의 기능을 추측하게 한다. 불화나 불상은 전각에 봉안되어 예배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의식을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기도 하였다. 현세 구제의 신앙을 담고 있는 관음보살도가 현실의 고난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원된 예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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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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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의 거란 군사가 고려를 침공하였다. 북에서 동까지 온 강토에 피비린내가 넘쳤고, 노인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거란군의 잔인한 살행이 계속되었다. 계책이 없어 신에게 기도하고 하늘에 호소하였으나 그들을 막아낼 형세는 궁박하였고 신은 감응하지 않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사악한 거란군을 물리쳐 주기를 바라며 관음보살을 그렸다.146)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41 ; 진홍섭 편저, 『한국 미술사 자료 집성』 2, 일지사, 344쪽.

삼가 『대비다라니신주경(大悲陀羅尼心呪經)』을 상고한 결과 거기에 이르기를, “만약 환란이 일어나거나, 원적(怨敵)이 와서 침범하거나,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귀신과 마귀가 설쳐 어지럽히는 일이 있거든, 마땅히 대비(大悲)의 불상을 만들어 모두가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기울이며, 당번(幢幡)과 개(蓋)로 장엄하고 향과 꽃으로 공양하니, 그렇게 한다면 저 적들이 죄다 스스로 항복하여 모든 환란이 아주 소멸되리라.” 하였기에, 이 유언을 받들자 마치 친히 가르치는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이에 단청의 손을 빌어서 수월관음(水月觀音)의 얼굴을 모사하오니, 아! 그림 그리는 공인이 역시 우리 백의의 모양을 비슷하게 한지라, 지극한 정성을 다 피력하여 우러러 연모(連眸)를 점안(點眼)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큰 음덕을 내리시고 이내 묘한 위력을 더하사, 지극히 인자하면서 무서운 광대천(廣大天)처럼 적의 무리를 통틀어 무찌르게 하고, 무외 신통(無畏神通)으로써 그 나머지는 저절로 물러나 옛 소굴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 글은 거란군이 침범하였을 때 관음보살을 새로 그려 점안하며 베푼 의식에서 낭독한 의식소문이다. 이 의식은 고려시대의 무신 집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의 맏아들 최상국(崔相國)이 주도하였다. 관음보살의 그림은 고려 사회가 당면한 국가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다. 여기에 나오는 『대비다라니신주경』은 『천수경(千手經)』,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라고도 하는데, 7세기 중엽 한문으로 번역된 이래 오 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신앙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시의 불화는 현존하지 않으나 천수다라니를 외우며 진행하는 의식과 의식을 위해 조성한 불화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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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도
오백나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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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역시 신앙적인 의미와 별개로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조성되었다. 나한(羅漢)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존재를 가리킨다. 나한 신앙은 깨달은 자에 대한 예경(禮敬)에서 나아가 나한이 지닌 신통력으로 현실의 고난을 타개하는 존재에 대한 존숭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기우(祈雨)의 바람, 외적의 격파에 대한 바람 등 고려시대는 다양한 목적으로 나한재(羅漢齋)가 빈번하게 개최되었다.147)정우택, 「나투신 은자의 모습-나한도-」, 『구도와 깨달음의 성자, 나한』, 국립 춘천 박물관, 2003, 166∼179쪽. 고려시대 나한재의 정치적 목적에 관해서는 허흥식, 「개경 사원의 기능과 소속 종파」, 『고려 불교사 연구』, 일조각, 1986, 300∼301쪽 참조. 나한도의 화기(畵記)에는 나한에 대한 예배와 신앙의 문구 대신에 조성 당시의 절박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인근에서 몽고군이 위협해 오던 때 적군의 칼과 창이 멈추고 몽고군이 불력으로 퇴치되기를 바라는 기원 내용이 묵서(墨書)로 적혀 있다. 이 불화를 발원한 이는 무인 출신의 김의인(金義仁) 등이었다. 이러한 불화의 존재는 상을 조성하거나 불화를 그리거나 경전을 쓰는 공덕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였던 시대 분위기를 보여 준다. 불화에 그려진 신앙의 대상이 현실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라던 기원은 ‘의식’이란 형식을 통해 좀 더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

불화는 고유한 도상이 지닌 의미와는 별개로 왕의 수명 연장을 기원하기 위해 그린 예도 있다. 의종(1127∼1173) 때 영의(榮儀)라는 점쟁이는 왕에게 아첨하며 권력을 농단(壟斷)하여 군신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는 의종에게 수명을 연장하려면 천제석(天帝釋)과 관음보살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의종은 그의 말을 따라 제석과 관음보살의 불화를 그려 도성의 사원에 나누어 보내고 임금의 수명 연장을 기원하는 축성 법회(祝聖法會)를 열었다. 또한, 안화사(安和寺)에서 제석과 관음, 수보리(須菩提)의 초상을 만들어 두고 승려를 모아 밤낮으로 계속하여 모든 보살의 이름(菩薩名號)을 부르는 연성 법회(連聲法會)를 열었다고 한다.148)진홍섭 편저, 『한국 미술사 자료 집성』 2, 일지사, 346쪽.

불보살의 신비한 힘에 의지해 현실의 고난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은 여러 사례를 통해 찾을 수 있다. 고려의 신하들은 현실의 온갖 문제에 침투되어 넘쳐 나던 불교 의식과 의식에 소요되는 수많은 비용과 과도한 의존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미 유학을 배우고 성리학적 세계 이해에 깊이 심취한 이들은 불교의 힘에 의지해 고난을 타개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보았다. 앞서 관음보살을 그려 거란군을 물리치기를 바라던 자들도 고려의 지배층이었으나 거듭 반복되는 불교 의식에 대한 비판 역시 이들로부터 나왔다.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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