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1. 불교 의례와 시각 문화
  • 의례와 의식의 역사
  • 조선시대, 세상에 넘치는 나쁜 죽음
정명희

조선 왕조를 개창한 사대부들은 유교를 국가를 운영하는 기본 이념으로 삼으면서 지나치게 확장된 불교를 배척하였다. 새로 발의된 각종 정책은 불교에 대한 탄압을 신조로 삼았다.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불교 관련 기록은 대부분 불교의 폐단, 사찰에 대한 노역 부과론, 사원전 혁파, 종파의 축소와 사찰의 통폐합, 이른바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승려 무리에 대한 유학자들의 비판과 항소로 채워져 있다. 절의 수를 줄이고 세금을 부과하고, 승려가 되는 제도(度牒制)를 폐지시키는 정책으로 조선시대 불교 교단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조선이 유교를 사회적 이념으로 채택한 후 당연히 수반되는 과정으로, 과도해지고 타락한 불교 교단에 대해 새 시대의 결의와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역사서에서 파악되는 조선시대는 불교에 대한 박해와 핍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많은 불교 문화재는 조선 사회가 지녔던 공적인 사회의 배경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대중 신앙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

조선은 역설적이게도 의식 문화가 대중 속에서 꽃을 피운 시대였다. 국가 종교로서의 지위는 상실되었고 왕실과 사대부, 사회 지도층의 숭불 행위는 축소되어 갔으나 불교는 새로운 신도층을 흡수하였다. 불교는 조선시대에 좀 더 저변화되어 대중 속에서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새롭게 변화된 신도들에 맞게 조선시대 불교 신앙은 의식 중심으로 바뀌었다. 유교적 사회 운영이 자리 잡고 사찰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은 사라졌으나 승려와 사찰의 주도 아래 의식은 더욱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의식 문화는 국가적 위기였던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중엽의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인 조선 후기에 화려한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임진왜란을 겪고 쑥대밭이 되어 버린 마을의 초라한 달은 참담하고 가시 숲의 슬픈 바람은 스산하다. 홍수와 가뭄, 병충해의 재앙이 계속되고 역병이 창궐한 것은 요상한 귀신(妖鬼)이 곡하고 사악한 귀신(邪鬼)이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다. 흉하고 나쁜 죽음들이 너무나 많도다. …… 귀신이 수없이 많아서 어지러이 인간을 괴롭히니 귀신의 침범을 없애 주고자 하여 불성(佛聖)의 크나큰 구제를 빌어 법식(法食)을 베풀어 귀신의 기허(飢虛)를 달래 주고…… 이에 흉귀(凶鬼)와 악신의 고혼(孤魂)을 천도하기 위하여 널리 모집하여 부처를 기쁘게 하는 대회를 열었다.149)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 「안주천변수륙권문(安州川邊水陸勸文)」, 『한국불교전서』 9,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515쪽.

전쟁이 끝난 후 홍수와 가뭄, 병충해와 전염병이 계속되자 많은 천도 의식이 베풀어졌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현실의 재난이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국가는 공식적으로 불교를 지지하지 않았으나 마을 공동체를 다시 수습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수륙재 (水陸齋)와 여러 천도 의식의 개최를 암묵적으로 후원하였다.150)정명희, 「조선 후기 괘불탱의 도상 연구」, 『미술 사학 연구』 233·234, 한국 미술사 학회, 2004, 163∼164쪽.

국가적으로 불교를 후원하던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다양하던 의식이 축소되었다. 의례의 종류와 빈도가 급격하게 감소함에 따라 몇 가지 의식이 고유한 성격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륙재이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죽은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으로, 중국의 양 무제(梁武帝) 때 처음으로 개최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 수륙재는 천재 소재(天災消災), 구병(求病), 공동 추천재(共同追薦齋), 역질 퇴치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설행되었다. 수륙재의 역할은 폐지된 다른 의식의 기능까지 포섭하면서 점차 확대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유일한 공식적 불교 의례로 왕실 인물의 국상제(國喪制)로까지 개최되었다.

조선시대 의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찰 내외부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성대한 야외 의식이 개최되면서 의식을 전담하는 의식용 불화가 만들어졌다. 사찰 건축과 공간 구성은 의식을 거행하기 쉽도록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찰은 대체로 중심 전각 앞에 넓은 앞마당을 두고 전면에 누(樓)를 두는 중정형(中庭形) 가람 배치를 보인다. 전각 내부가 아닌 대웅전 앞마당이 의식의 중요 장소가 되면서 나타난 건축적 변모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찰이 일상적인 예불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의식을 위한 공간으로 성격이 변모한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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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금강령
청동 금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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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문화의 발전에 따라 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시각 문화가 나타났다. 큰 규모의 불교 의식이 많아지면서 전각 내의 불단(佛壇)이 아예 앞마당으로 옮겨졌다. 야외에 마련한 불단에는 부처를 상징하기 위해 의식용 대형 불화인 괘불(掛佛)이 조성되었고 도량을 꾸미기 위한 의식구와 장엄구가 갖추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의식 법구가 더욱 구체적인 의미와 기능을 띤 채 사용되고, 의식 내용에 의거한 불상과 불화의 도상이 새롭게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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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흥사 감로도 부분
운흥사 감로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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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물품들은 특정한 의식에 사용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지닌 의식구로 상징성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금강령(金剛鈴, vajra)은 번개의 모습을 본뜬 의식구로, 번뇌를 물리치는 번개의 의미에서 유래하여 금강저(金剛杵)와 함께 사악한 무리가 불법이 베풀어지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막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들어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1)이 간행한 『운수단(雲水壇)』에는 금강령의 쓰임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시식(施食) 의례를 진행할 때 의식을 진행하는 승려는 잠든 고혼을 깨워 의식 도량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 금강령을 사용하라고 하였다.151)운수(雲水)는 흰 구름과 물처럼 떠돌며 의식을 지내 주는 승려를 운수승으로 지칭하는 데서 유래한 말로, 『운수단』은 조선 중기의 승려 휴정(休靜, 1520∼1604)이 간행한 의식집이다. 의식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승려의 존재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왕실의 기신재에 왕실과 종실의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 것에 대해 의식 승려들이 행사를 주도하도록 할 것을 명령한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의식 승려들의 존재와 의식을 위한 매뉴얼의 보급은 고려시대 이전에 의식승이 의식을 수행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특수한 승려로 인식되던 것에서 의식의 대중화 현상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 금강령은 ‘영혼을 불러 모은다’는 좀 더 명확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공간과 그곳에 봉안된 불교 문화재의 기능은 고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하였다. 과거의 의미 맥락을 모두 걷어 낸 채 만나는 유물에 대한 이해는 편파적이다. 그 유물이 만들어지고 신앙되던 당시의 풍토 속에서 다시 유물을 해석해야 한다. 의례 문화는 그 시대가 원하는 수요에 맞추어 고유의 의미를 변화시키거나 확대되었다. 신앙의 대상을 형상화한 불보살상이나 불화는 전각에 봉안되어 일상적인 예불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식이 있는 날에는 전각 안에서 혹은 의식 도량으로 옮겨져 의식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위치의 이동은 곧 기능의 변화를 의미한다. 의식을 위해 자리를 옮긴 불교 문화재는 의식을 이끄는 주체가 되거나 의식의 진행을 돕는 등 새로운 맥락에서 제각각 역할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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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관음보살도(千手觀音菩薩圖)
천수관음보살도(千手觀音菩薩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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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숙종 35)에 간행된 의식집(儀式集)인 『범음집(梵音集)』을 보면, 불보살에 대한 예불 의식이 영산작법(靈山作法)편에 수록되어 있다. 영산작법에는 천수관음보살도(千手觀音菩薩圖)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큰 규모의 의식이 있을 때면 마당의 왼편에 관음단(觀音壇)을 마련하였다. 관음단은 영혼에게 음식을 베푸는 시식 의례를 주재하는 의식단으로, 이곳에는 의식의 주체인 천수관음보살을 그린 불화가 걸렸다. 관음보살도가 걸림으로써 야외의 의식 도량은 관음보살이 동참한 의식 공간으로 상징되었다. 고려시대 외적이 침입한 다급한 상황에서 조성한 관음보살도와는 역할이 달라졌다.

승려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의 경우에도 의식집은 우리가 고정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역동적인 불화의 기능을 말해 준다. 사찰의 진영각(眞影閣), 혹은 영당(影堂)에는 역대 고승이나 사찰의 덕이 높은 승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특정 승려에 대한 존숭과 숭배의 목적으로 그린 진영 역시 전각에 봉안되는 존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실제 의식에도 사용되었다. 승려가 입적한 후 치루는 다비식(茶毘式)은 불교식 화장 의례를 수록한 의식이다. 의식집의 다비식편에는 의식을 진행할 때 평소에 승려가 예불하던 불화와 입적한 승려의 모습을 그린 진영을 야외로 가지고 나오도록 하였다. 야외에는 승려의 극락왕생을 바라며 아미타불을 모신 미타단(彌陀壇)을 마련하였다. 미리 준비된 미타단에는 생전에 승려가 예불하고 기도 올리던 불화(願佛)을 걸고 그 하단에 승려의 모습을 그린 진영을 걸고 의식을 진행하라고 하였다. 다비식이 끝난 후에는 원불탱(願佛幀)과 진영을 걷어 불전에 참례한 후 원래 있던 곳에 다시 걸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당시의 의식 문화 속에서의 불교 미술품이 담당하던 역할은 그것이 신앙되던 기능과 역할 속에서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난다.152)의례 문화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의례 문화에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는 메커니즘과의 유기적 맥락 속에서 구체적인 의미성을 드러낸다(Hans Belting, Likeness and Presenc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New edition, January 15,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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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대사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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