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2. 전각 내부의 의식과 시각 문화
  • 전각 안에 갖추어 놓은 세 개의 단
정명희

고대 사회에서는 일식, 월식, 지진 등과 같은 하늘의 기이한 변화를 천변(天變)이라 하여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어느 날 하늘의 달이 갑자기 둘이 되었다. 그리고 열흘 동안이나 이 현상은 계속되었다. 760년(경덕왕 19) 신라에서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일관(日官)은 승려를 청하여 산화 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승려 월명(月明)에게 단(壇)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불길한 징조를 피하기 위해서 땅을 볼록하게 쌓고 의식을 위한 단을 마련하였다. 단은 의식에서 불보살의 존재를 상징하며 삿된 것이 근접하지 못하는 성스러운 경계를 나타낸다.

우리나라 사찰의 중심 전각 내부에는 세 개의 단이 놓여 있다. 전각 중앙의 불상 앞에 놓인 불단(佛壇) 이외에 좌측과 우측 벽면에도 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불단을 삼단으로 설치하는 형태는 의식 문화의 성행과 더불어 조선시대부터 나타난다. 삼단이 아직 일정한 규칙성을 지니고 갖추어지기 이전인 고려시대의 경우를 우선 살펴보자.

노영(魯英)은 흑칠(黑漆)로 된 작은 병풍에 금니(金泥) 불화를 그린 고려시대의 승려 화가이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이 불화 한 점이 유일하나, 노영이 참여한 도솔암(兜率庵) 미타전(彌陀殿), 선원사(禪源寺) 비로전(毘盧殿)의 불사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 전각의 내부 구성을 엿볼 수 있다. 노영이 도솔암 미타전 중수 불사를 맡아 진행할 때 서쪽 벽에는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를 그리고, 또 다른 벽면에는 천신과 신중들로 꾸몄다고 한다. 또한, 1325년(충숙왕 12)의 선원사 비로전의 불사에서는 동편과 서편에 40분의 신중을 그리고 북벽에는 55명의 선지식(善知識)을 그렸다고 한다. 미타전에 아미타불과 천신을 배치한 것이나 비로전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법 여행 중 만난 선지식과 화엄신중(華嚴神衆)을 그린 것은 경전과 교리에 기초하 여 전각 내부를 꾸민 것이다. 전각 내부는 각 전각이 상징하는 교리에 의거하여 구성되었을 뿐 일정한 규칙성은 발견되지 않는다.161)삼단(三壇)을 의식한 용어의 사용은 1562년 조성된 사불회도에서는 중단 불화(中壇幀)의 조성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以眞黃金新畫成西方阿彌陀佛一幀彩畵四會幀一面彩畵中壇幀一面送安咸昌地上院寺以奉香火云爾”, 화기 원문은 『영혼의 여정』, 국립 중앙 박물관 특별전, 2003, 18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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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의 불화(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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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의 불화(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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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을 삼단으로 구성하려는 의도는 조선시대부터 나타난 현상이다.162)조선 중기까지는 사찰 내부 공간을 삼단에 의거해 구성하려는 규칙성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사찰 내부에 걸리는 불화의 도상을 엿볼 수 있는 예로는 이정(李楨, 1512∼1571)이 전각의 동쪽과 서쪽 벽면에 백의관음도와 용선접인도를 그린 사례를 들 수 있다. 교리에 따른 방위에 기준하여 전각의 내부를 배치한 경우이다(허균(許筠),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권1, 「장안사벽리정화변상급산수가(長安寺壁李楨畫變像及山水歌)」 ; 진홍섭 편저, 『한국 미술사 자료 집성』 4, 일지사, 460쪽). 대표적인 예가 왕실에서 주도한 진관사(津寬寺)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자신의 개국이 조종(祖宗)의 음덕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 조상의 명복을 빌고 중생에게 그 공덕을 이롭게 하기 위해 수륙재를 개설하였다. 태조는 이미 남해 견암사(見岩寺), 낙산 관음굴(觀音窟), 삼척 삼화사(三和寺)에서 수륙재를 개최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좀 더 항구적으로 수륙재를 개최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적당한 사찰을 물색하도록 명하였다. 몇 곳의 후보지 중에서 북한산 진관사가 결정되었다. 진관사가 완성되고 그 첫 번째 수륙재가 개최되던 날, 태조는 신하 권근(權近, 1352∼1409)에게 이 일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1397년(태조 6)에 작성된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 寺造成記)는 진관사가 태조의 명에 의해 수륙재를 위한 사찰로 다시 리모델링된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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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정축년 정월 을묘일에 상이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승려 신하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의 적선(積善)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상의 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또 신하와 백성 중 혹은 나랏일에 죽고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하지 못함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옛 절에도 수륙 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회(齋會)를 개설하여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은 가서 합당한 곳을 찾아보게 하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이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의 신하 상충(尙忠)·양달(陽達)·승려 지상(志祥) 등과 함께 장소를 찾아 삼각산(三角山)에서부터 도봉산(道峰山)까지 둘러보고 복명하여 말하기를, “여러 절 중에 진관사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고 하니, 여기서 상이 명령하여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지상 등을 명하여, 승려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진행하게 하였는데 내신(內臣)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썼다. 그달 경진일에 역사를 시작하였으며 2월 신묘일에 상이 친히 와서 구경하고 삼단(三壇)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도 거둥하여 구경하였다. 가을 9월에 이르러서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집이 되었는데 모두 세 칸이며 중·하의 두 단은 좌우쪽에 각각 욕실(浴室) 3칸이 있고, 하단 좌우 쪽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여덟 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행랑·부엌·곳간을 갖추었고 시설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 59칸인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163)권근(權近), 『양촌집(陽村集)』, 「진관사수륙사조성기(津寬寺水陸寺造成記)」 ; 『동문선(東文選)』 권78, 기(記)

수륙재를 위한 도량의 설치 공사는 1397년 1월에 시작하여 9월에 완공하였다. 공사의 핵심은 삼단의 설치였다. 삼단은 수륙당 건립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수륙재를 하려면 삼단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왕이 친림(親臨)하여 삼단의 위치와 차례를 정하였다. 상단, 중단, 하단은 각각 세 칸으로 독립된 전각으로 존재하였다. 중단과 하단에는 좌우 측에 각각 욕실(浴室)을 설치하였으며 하단에는 여덟 칸의 조종(祖宗)의 영실(靈室)을 두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과 삼단을 포함하여 모두 59칸의 전각이 조성되었다.164)1090년 보제사에 건립된 수륙당은 우리나라에 최초의 수륙당이나, 공사를 마치기 전 화재를 만나게 된다. 화재가 난 이후 수륙당이 다시 건립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태조는 수륙당을 건립하여 정기적으로 수륙재를 개최할 수 있는 전용 사찰을 기획하였다. 삼단은 별개의 전각으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수륙사로 지정된 다른 사찰의 기록에서 진관사의 경우처럼 의식을 위해 전용 건축을 별도로 지은 예는 찾기 어렵다. 그보다는 일상적인 예불의 공간을 의례를 개최하기에 적합하도록 조금씩 기능과 구조를 바꾸어 나갔다. 의식이 신앙 의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전각 내부는 의식에 적합한 공간 구조로 변모하였다. 상설 예불 공간이 의례를 치르기 쉬운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일어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삼단이 전각 내부로 들 어왔다는 점이다.

야외 의식에 있어서 삼단을 각각 무엇으로 보느냐는 의식의 종류와 의식이 근거하고 있는 신앙에 따라 달라졌다. 영산재(靈山齋)에서는 불단이 상단, 명부단(冥府壇)이 중단, 영가(靈駕)를 위한 단이 하단이나 예수재에서는 상단에 지장단, 중단에 시왕단, 하단에 사자단이 배치된다. 그런데 특정일에 설치하는 의식단이 아니라 전각 내부 공간이 아예 삼단으로 구성된 것은 의식 문화가 그만큼 사찰의 신앙 행위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보여 준다.

대웅전에 삼단이 갖추어지는 현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찰의 중심 전각에 들어온 삼단의 배치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 초 진관사에서 삼단은 각각 별도의 전각으로 건립되었다. 상단은 불단, 중단은 승려의 무리인 승혼단(僧魂壇), 그리고 하단은 역대 왕과 왕후를 의미하는 종실단(宗室壇)이었다. 하단에는 역대 왕실의 위패를 모셔 진관사에서 개최된 수륙재가 조선 전기 왕실 인물의 천도를 위한 목적임을 보여 준다.

1496년 간행된 『진언권공』에는 삼단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어 삼보(三寶)를 북벽에 모시고 제천을 동벽에, 대왕과 왕후, 망혼(亡魂)들을 남벽에 모신다는 구성이 갖추어졌다. 이 시기 중 어느 때인가 삼단은 대웅전 내부로 유입되었다. 의식의 주체를 삼단의 위계를 두어 청하는 절차가 정립되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전각의 삼단 구성은 의식의 순서에 맞추어 정례화되었다.

삼단에 대한 인식은 국가 주도로 수륙사가 건립되고 왕실 주도의 불교 의식집이 간행되던 조선 전기와 불교 의식이 좀 더 저변화된 조선 후기의 변화가 크다. 17∼18세기에 나온 의식집에서 제천을 모셨던 중단은 당시의 의식에서 지장보살과 삼장보살(三藏菩薩)을 모시는 명부단으로 바뀌었다. 하단은 왕실 망혼을 위한 자리에서 명도(冥途)의 영혼을 위한 단으로 바뀌었다. 사찰에서 치르는 의식 중 천도 의식의 비중이 커지면서 명부계 신앙 이 중단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것은 의식에 동참하는 계층의 변화를 반영한다. 왕실 인물을 위한 천도재에서의 의식단과 불교 신앙이 저변화된 시기의 의례 변화가 삼단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명부 신앙과 신중 신앙은 중단의 자리를 놓고 시기에 따라 자리를 바꾸었다. 신중이 전각의 내부 벽면을 채우며 장엄된 예는 고려시대의 기록에서부터 발견된다. 신중은 의식의 진행에 있어 필수적인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된 『진언권공』에서는 여전히 고려시대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17∼18세기까지는 중단이 명부계(단)이다가 19세기 후반 간행된 의식집에서부터는 다시 중단으로 대두된 이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각 안으로 들어온 삼단은 주 전각의 불화 배치와 구성에도 변화를 가져왔다.165)조선 후기 전각 내부 구성에 있어서 불탁의 위치가 고주 뒤편으로 후퇴하여 앞 공간을 넓게 사용하려 하고 삼단으로 구성되는 것은 삼단분작법의 정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년이 남아 있는 불탁의 예를 통해서도 이러한 현상은 17세기경 정착된 것으로 본다(허상호, 「조선 후기 불탁 연구」, 『미술 사학 연구』 244, 한국 미술사 학회, 2004, 121∼170쪽). 조선 후기 정립된 삼단에서 각 불단을 주재하는 존재를 불화를 통해 나타냈기에 의식과 불화의 관련성은 더욱 밀접하다. 전각의 중앙에는 주존을 상징하는 상단 불화가 걸렸고, 그 좌측과 우측은 각 의식단의 구성에 맞는 불화가 걸렸다. 중단에는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혹은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가 봉안되었다. 조선 후기에 지장보살도와 함께 중단 불화로 새롭게 대두되는 삼장보살도는 명부 신앙이 확대되면서 조성되었다. 삼장은 천장보살(天藏菩薩), 지지보살(持地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세 보살로 삼장보살이 거느리는 권속들은 수륙재 의식문에서 봉청(奉請)되는 인물들이다. 의식을 진행할 때 청하는 존재를 불화에 그려 넣은 것이다. 중앙의 상단 불화를 중심으로 중단의 명부계 불화(경우에 따라서는 신중도), 하단의 감로도(甘露圖)는 조선 후기에 하나의 세트로 정립되었다.166)삼장보살도와 감로도의 조합은 수륙재의 공양을 받을 주체와 구제받는 대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수륙재 의식의 성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삼장보살도에는 수륙재 의식을 진행할 때 봉청되는 인물들을 도해하며, 감로도에는 수륙재를 비롯하여 음식을 베풀어 영혼을 구제하는 의식 장면을 그린다(이용윤, 「수륙재 의식집과 삼장보살도」, 『미술 자료』 73·74, 국립 중앙 박물관, 2006, 91∼122쪽 ; 김정희, 「조선 전기 불화의 전통성과 자생성」, 『한국 미술의 자생성』, 한국 미술의 자생성 간행 위원회, 한길 아트, 1999, 173∼209쪽).

전각 내부가 삼단으로 구성되면서 각 단에 대한 공양과 예불 의식이 발달하였다. 불단에 대한 예불은 상단 권공으로, 명부 신앙에 기초한 예불은 중단 권공으로, 영가에 대한 공양 의식은 하단 권공으로 삼단 예불이 정비되었다. 대웅전에 들어선 신자들은 중앙의 예배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도는(右遶) 순서에 따라 상단 → 중단 → 하단으로 돌면서 불화가 봉안된 불 단 앞에서 예불하였다.

삼단의 변화는 신앙과 교리의 변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변수에 의해 서서히 일어났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불화가 나타난 것은 기존의 형식 내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의례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의식 문화의 변화는 다른 문화 현상에 비해 보수적이며 서서히 일어나지만 의식 문화가 일상적인 예불 공간에 변화를 불러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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