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3. 야외 의식과 시각 문화
  • 야단법석
정명희

소란스럽고 시끄러우며 경황이 없는 상황을 우리는 흔히 ‘야단법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의 생활 속에 익숙하게 쓰고 있는 이 말은 사실 ‘야단(野壇)에서 열리는 법석(法席)’이란 불교적인 유래를 갖는 말이다. 법당 안에 다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불교 행사는 사찰 앞마당에서 개최되었다. 대웅전 앞마당은 의식이 진행되는 중심 장소였고, 그 앞의 누각은 야외의 햇볕을 피해 자리를 잡은 사람들의 차지였다. 마당의 좌우 옆면에 놓인 승방(僧房)이나 선방(禪房)도 야외 의식이 있는 날에는 신도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 주었다. 사찰의 모든 공간은 발 디딜 틈 없이 신도들로 가득 찼다.

야외에 설치한 단(壇)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난다. 신라를 염탐하기 위해 당나라 황제가 군사를 보내자 명랑 법사(明朗法師)는 급히 채백(彩帛)으로 가짜 절인 망덕사(望德寺)를 지어 당나라 사신을 속이고 군대를 물리쳤고 문두루 비법(文豆婁秘法)으로 도량을 마련하였다.176)홍윤식, 「삼국유사와 불교 의례」, 『신라 문화제 학술 발표회 논문집』 1, 신라 문화 선양회, 1980, 93∼103쪽. 고구려에서 온 승려 혜량은 인왕백고좌회를 베풀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뿐 아니 라 궁궐, 산천의 청정한 장소에서 야외 의식을 열었다. 채붕을 설치해 무대를 마련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전각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의식 역시 사찰 내·외부에서 개최되었다. 산천의 청정한 곳이나 도성 안, 한강과 같은 곳에서도 당기(幢旗)와 번기(幡旗)를 세우고 백중 의식을 지내거나 수륙재를 열었고 노재(路齋)를 지냈다. 그러나 이는 설행 장소를 점차 사찰 내부로 한정하도록 하는, 끊임없는 반대 상소에 부딪혔다. 조선 전기에는 임금이나 종실, 사대부들의 주도로 열리는 대규모의 야외 의식이 여전히 성행하였다. 태종의 둘째 아들로 불교를 후원하였던 효령 대군(孝寧大君, 1396∼1486)에 의해 한강에서 이레 동안 진행된 수륙재는 왕실 후원 의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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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재
괘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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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 대군 이보(李補)가 성대하게 수륙재를 7일 동안 한강에서 개설하였다. 임금이 향을 내려 주고, 삼단(三壇)을 쌓아 중 1,000여 명에게 음식 대 접을 하며 모두 보시를 주고, 길 가는 행인에게 이르기까지 음식을 대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날마다 백미(白米) 두어 섬을 강물 속에 던져서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베풀었다. 나부끼는 깃발과 일산(日傘)이 강(江)을 덮으며, 북소리와 종소리가 하늘을 뒤흔드니, 서울 안의 선비와 부녀(婦女)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양반의 부녀도 또한 더러는 맛좋은 음식을 장만하여 가지고 와서 공양하였다.177)『세종실록』 권55, 세종 14년 2월 계묘 : 『국역 조선 왕조 실록 불교 사료집』 2권,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997, 342∼343쪽.

16세기에도 왕실의 기신재(忌辰齋)는 사찰 앞마당에서 열렸다. 왕실의 능을 지키는 능침 사찰(陵寢寺刹)에서는 기일마다 불교식 제사가 진행되었다. 유신들은 불교식 천도재에 반발하며 상소를 올렸다. 의식에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위패(位版)를 사용하는 것, 뜰 아래서 부처에게 절하고 중에게 공양한 뒤에야 제사하는 것, 부처를 벌여 놓은 앞에 위호(衛護)를 쓰는 일 등이 지적되었다. 이런 세 가지 일은 폐지하라는 건의가 계속되었다.178)『중종실록』 권6, 중종 3년 5월 을축 : 『국역 조선 왕조 실록 불교 사료집』 13권,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997, 186쪽. 불단은 전각 내부가 아닌 뜰 아래 있었으니 의식의 장소는 사찰 마당이었다. 야외에는 불단 이외에 승려단이 설치되었으며 선왕과 왕후의 존재는 나무로 만든 위패로 상징되었다. 조선 후기 들어 왕실 주도의 의식은 점차 사라졌다. 의식은 여전히 열렸으나 규모가 축소되고 장소도 사찰 공간으로 한정되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의식이 누구의 소망을 담아내는가 하는 의식 수요층의 변화였다.

산천의 청정한 장소나 도성 안에서 개최되던 의식은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사찰 영역 안으로 제한되었다. 일상적으로 치르는 상용 의식, 소규모의 개인 발원 의식은 법당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신도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 불교 행사와 마을 공동체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개최되는 수륙재, 기우재 등 전각 내에서 수용할 수 없는 법회는 중정(中庭) 앞마당에서 개최되었다. 사찰의 전 공간은 야외 의식을 위한 도량으로 활용되었다.179)발굴을 통해 밝혀진 삼국시대의 사찰 가람 배치, 고려시대의 기록, 그리고 사찰에 현존하는 조선 후기의 건축은 중국의 수륙당처럼 의식을 전담하는 전각의 개념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설 예불 장소를 의식을 설행할 때 역할과 기능을 절차에 따라 활용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주 전각과 그 앞 누각 사이의 공간은 좌우측에 요사채가 자리 잡으면서 사 방이 둘러싸이는 중정을 형성한다.180)중정이 의식의 중심 도량이 되는 양상을 수륙재의 일종인 삼일자기본문작법(三日仔夔本文作法)에서 엿볼 수 있다. 자기작법에서는 외정(外庭) 한쪽에 화엄단(華嚴壇)과 미타단(彌陀壇)을 설해 화엄작법(華嚴作法), 미타참법(彌陀懺法)을 행하라고 하였다(삼일재전작법절차(三日齋前作法節次)(地), 삼일자기본문작법(三日仔夔本文作法)(人),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집(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集)』, 1721년 삼각산 중흥사 중간본,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중정형 건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이 끝난 후 조선 후기에 재건된 사찰에서 공통되게 보이며 현재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난다.181)김동욱, 『한국 건축의 역사』, 지문당, 1997,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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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음집』의 예수재설단규식
『범음집』의 예수재설단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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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간행된 의식집인 『범음집(梵音集)』에는 예수재(預修齋)를 지낼 때 단을 설치하는 규정을 도해(圖解)로 제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불단인 상단(上壇)은 법당 내에 설치된 반면, 중단(中壇)과 하단(下壇)은 법당 바깥의 왼쪽에 마련하도록 하였다. 즉, 재의 규모가 작은 경우는 상단, 즉 불단을 법당 안에 두고 중단과 하단만 중정에 설치하였으나 재의 규모가 클 경우는 상단 자체를 법당 바깥으로 이동하였다. 의식의 규모에 따라 의식 공간이 결정된 것이다. 전각에서 다 수용할 수 없는 많은 의식 동참자들은 야외 뜰로 모여들었고, 의식의 삼단은 야외에 마련되었다. 의례와 공양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 사찰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중정형 건축에서 마당은 사찰의 가장 중심 공간이자 의식의 무대였다. 사찰의 진입로인 해탈문(解脫門), 주불전 앞의 넓은 마당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불보살의 강림을 받고 그들을 봉양하는 공덕으로 추선(追善)과 구복(救福)을 비는 신성한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일주문(一柱門) 바깥에서는 의례를 통해 구제받을 영혼과 의식을 주재할 불보살을 모셔 오는 절차인 시련(侍輦)이 진행되었다. 앞마당을 중심으로 법당의 내부와 외부는 각각의 역할을 분담하였다.182)야외 의식 시 상단이 괘불을 헌괘한 중정으로 옮겨 왔을 때 불단 내부의 상단은 ‘안차비’, ‘바깥차비’의 구조로 설명된다. 중국의 수륙법회가 수륙당 등 전각 내부에 상당과 하단으로 구분되어 설치되는 것과 조선시대 의식은 차이가 있다(홍기용, 『원명(元明) 수륙법회도 연구』, 중앙미술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35∼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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