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3. 야외 의식과 시각 문화
  • 괘불, 사찰 앞마당에 걸린 큰 불화
정명희

일주문을 통해 사찰로 들어서면 사천왕이 수호하는 천왕문(天王門)이 나온다. 천왕문을 지나 누(樓, 樓閣)를 통과하면 사찰의 가장 중앙 공간인 앞마당이 펼쳐진다.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중심 전각과 누각은 마주 보며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혹은 대적광전 앞에는 높이 1m 내외의 돌기둥이 좌우 측에 서 있다. 각 한 쌍씩 서 있는 돌기둥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에 비해 높이가 낮다. 당간지주가 번(幡)이나 당기(幢旗)를 걸기 위해 한 쌍으로 세운 것인 데 비해, 괘불을 걸기 위한 괘불 석주(掛佛石柱)는 좌우 측에 각각 한 쌍으로 모두 네 개의 돌기둥이 하나의 세트이다. 대웅전 앞에 괘불 석주가 남아 있는 사찰은 비록 현재 괘불이 전해지지 않더라도 한때 괘불을 소장하였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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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 석주
괘불 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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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을 걸기 위해서는 괘불 석주에 긴 나무 봉을 올려야 하였다. 요즘 에는 도르래가 장착된 철제 괘불 석주를 두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예전 사람들은 대나무나 길게 다듬은 나무 봉에 홈을 만들고 괘불 위쪽에 달린 둥근 철제 고리를 단단히 묶은 후 돌기둥에 고정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괘불을 하늘 높이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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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이운
괘불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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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은 야외에서 개최되는 불교 의식과 행사에 걸렸다. 평소에는 함에 넣어 두었다가 많은 사람이 모인 야외 의식이 있을 경우에만 꺼내어 사용하였다. 대웅전이나 대적광전의 내부에 들어가면 불상을 모셔 놓인 벽면 뒤쪽으로 괘불함을 볼 수 있다. 폭은 대체로 50∼80㎝, 길이 500∼800㎝의 긴 함은 더러 벽면에 설치한 선반에 올려놓기도 한다.

괘불은 그 크기만큼이나 보관에도 많은 주의를 요한다. 한 점을 조성하기 위한 비용도 어마어마하였고, 한번 만들면 100여 년 이상 사용되었기에 보통 때는 괘불함에 넣어 보관하였다. 괘불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건조시킨 좋은 재질의 소나무나 은행나무를 가공하여 함을 짰다. 함의 외면을 칠하고 건조시키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충해와 습기에도 안전하게 하였 다. 위판과 아래 판, 옆 판재를 연결하기 위해 쇠를 단련하여 장석을 부착하였다. 함 바깥에는 무거운 괘불의 무게를 지탱하며 옮길 수 있도록 손잡이를 달았다. 괘불함은 보관함인 동시에 괘불과 함께 야외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제작 공정상의 특징으로 괘불함은 외부의 장인이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간혹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청곡사(靑谷寺)에서는 괘불함을 만든 후 서씨 성을 가진 서선발(徐先發)이란 장인이 함을 만들었으며, 그가 나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이었음을 화기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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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함
괘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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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함은 괘불을 조성하면서 함께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1767년(영조 43) 조성된 통도사 괘불의 경우처럼 괘불을 새로 만들었으나 괘불함은 옛 것을 물려받아 그대로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183)정명희, 『꽃을 든 부처: 보물 1350호 석가여래 괘불탱』, 국립 중앙 박물관 미술관 테마전, 2006.

괘불은 의식의 주체이자 예배 대상인 동시에 의식이 펼쳐진 도량에 강림한 불보살의 상징물이었다. 따라서 의식 도량으로 괘불을 옮기는 것 역시 의식 절차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괘불이운(掛佛移運)은 1709년(숙종 35) 간행된 『범음집』에서부터 의식 절차의 하나로 수록된다. 여러 종류의 의식에 괘불이 사용되나 ‘괘불이운’이 의식의 순서 중 하나로 출현해 지속되는 것은 영산재이다. 한편 괘불이운이 이운 절차를 수록한 이운편에 포함된 경우도 있다. 의식집에는 사찰에 봉안된 불상, 불화, 승려의 가사, 지전(紙錢) 등의 이동에 필요한 의식을 ‘이운의식’편으로 정리해 두었다. 사보살(四菩薩)과 팔금강(八金剛)을 불러 청정해진 도량에 괘불이 옮겨짐으로써 의식 도량은 불보살이 강림한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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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의 여러 유형
괘불의 여러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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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을 한 점 조성하려면 통상 100여 명 내외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야 했다. 법당을 보수하거나 불상을 새로 만드는 일에 맞먹을 정도로 사찰의 큰 불사였다. 괘불이 남아 있는 사찰은 조사가 어려운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른바 큰 사찰뿐 아니라 지금은 쇠락한 작은 사찰에서도 훌륭한 수준의 괘불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괘불이 없는 절은 괘불을 갖출 것을 목표로 삼았고, 훼손되거나 오래되어 낡은 괘불이 있는 곳은 새로 그리기 위해 고심하였다. 의식 전담용 불화가 제작되고 어느 사찰에서나 괘불을 사찰의 필수 품목처럼 인식하는 현상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신앙 행위에 있어 불교 의식이 차지하던 중요성을 말해 준다.

법당 안의 괘불함을 마당으로 옮겨 괘불을 펼치는 일은 절의 큰 행사였다. 작은 규모의 의식이나 개인적인 발원에 의한 의례는 법당 안에서 진행하였으며 괘불을 걸고 야외 의식으로 치르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괘불은 항상 걸려 있는 전각 안의 불화에 비해 보존 상태도 양호하고, 오래된 불화도 많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괘불은 100여 점에 달한다. 같은 불교 문화를 공유하였던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불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괘불은 조선의 불교 의례가 남겨 놓은 독특한 불교 미술품이다.

그렇다면 괘불에는 어떤 존상을 그렸을까? 법당 내부에 걸리는 불화처럼 교리와 의식의 종류에 따른 다양한 종류의 괘불이 존재하였을까?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드는 괘불을 한 사찰에서 여러 점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불화를 하나의 괘불 안에 통합적으로 그리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야단은 법당 안의 상단을 대신하였으며 야외로 옮긴 괘불은 법당 안의 주존을 대신하는 존재였기에 법당에 거는 불화와 유사한 점이 있다. 17세기에 그린 괘불은 영취산(靈鷲山)에서 열린 부처의 설법 장면을 장대하게 재현하였다. 크기는 법당 안의 불화에 비해 커졌으나 점차 일반 불화보다 인물을 생략하고 구성을 단순화하는 방향으로 제작되었다. 괘불의 도상으로는 의식이 베풀어지는 곳에 막 내려와 많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힘과 위엄을 지닌 존상을 선호하였다. 수미단에 앉아 설법하는 모습보다도 입상 형식의 부처를 즐겨 그렸다. 괘불이 펼쳐질 때 의식 도량은 마치 그림 속의 부처가 강림한 듯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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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괘불재
미황사 괘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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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은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야외에 걸려 있어야 했다.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는 큰 규모와 사찰에 내려온 듯한 위엄 있는 부처가 선호되면서 가로로 폭이 넓은 불화보다는 세로로 폭이 좁은 형식의 괘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18세기에는 한 존상만을 단독으로 그린 독존 형태의 괘불이 유행하였다. 제작상의 이유와 야외 의식용 불화라는 기능에 의해 괘불의 조형적인 특징이 형성되었다.

현존하는 괘불의 도상은 대체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삼신불회도(三身佛會圖) 계통으로 크게 구별된다. 이 두 가지 불화는 사찰의 중심 법당에 걸리는 대표적인 불화로 조선시대 불교 사상의 두 가지 축을 의미한다. 한 사찰에서 여러 점의 괘불을 갖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기에 여러 의식에 두루 쓰여 다양한 신앙적 요구와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대표적인 존재를 그리게 되었다. 그 존재가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이다. 주존을 중심으로 설법회 장면을 그리던 것에서 점차 등장인물을 축소시키는 단순화된 구성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의식의 주존만을 그린 독존형 괘불도 제작되었다. 독존형 괘불은 영산회상도에서 권속을 생략하고 석가모니불만을 독립시켜 그린 경우도 있지만 보관을 쓰고 온 몸을 장엄한 장엄신 여래가 괘불의 독특한 도상으로 그려졌다. 장엄신 괘불은 영산회상의 석가모니불에 대한 신앙과 부처의 세 가지 몸(佛身)에 대한 신앙이 함께 담겨 있다.

의식은 경전, 주석서와 같은 교학적인 불서보다 현행되던 시기의 실제 신앙 내용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였다. 의식에 사용되는 각종 불교 문화재 역시 의식의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각에서의 불보살에 대한 예불인 상단 권공으로 가장 인기를 누린 영산회작법은 괘불을 걸고 진행하는 야외 의식을 통해 독립된 대형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괘불을 조성한 후 남긴 기록에는 괘불을 영산회탱(靈山會幀), 대영산회탱으로 기록한 예가 많이 있다. 의식 도량에 큰 불화가 펼쳐짐으로써 의식이 열리는 곳은 영산회상의 설법처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는 맥락에서 부여된 명칭이다. 도상적으로도 영산회상의 설법 모습을 그린 불화가 현존하는 괘불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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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괘불
내소사 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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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법음집』의 거불
『오종법음집』의 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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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의식 절차의 정비 과정에서 영향받은 일군의 괘불도 조성되었다. 영산회 의식에는 도량에 내려와 의식 도량을 영산회상으로 상징할 수 있는 불보살이 청해지는데, 이 절차를 거불(擧佛)이라고 한다. 영산회, 영산작법의 거불 절차는 시기별로 그 구성에 변화가 있다. 16세기 영산회에는 법화 거불(法華擧佛) 이외에도 화엄 거불(華嚴擧佛), 참경 거불(懺經擧佛), 지장경 거불(地藏經擧佛) 등 다양한 존상을 청하였다. 다양하던 거불 절차는 17세기에 이르면 법화 거불만으로 간결하게 재구성된다. 이런 정리 과정을 거쳐 영산회의 가장 핵심적인 불보살의 조합으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다보불의 세 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세지보살의 네 보살이 갖추어졌다. 의식이 진행될 때 청해지는 영산회상불보 살은 의식의 장에 걸리는 불화의 도상으로도 채용되었다. 의식에 사용된 시각 문화는 의식의 내용 변화를 수용하며 보조를 맞추어 나갔다. 불화의 도상이 변화될 정도로 의식과 시각 문화는 상호 간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제작되었다.184)정명희, 「의식집과 괘불의 도상적 변용」, 『불교 미술 사학』 2, 통도사 성보 박물관 불교 미술사 학회, 2004, 7∼27쪽.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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