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8권 불교 미술, 상징과 영원의 세계
  • 제5장 불교 의례와 의식 문화
  • 4. 불교 의식 문화와 공동체의 이상
  • 무대, 주인공, 관객, 스토리
정명희

사찰 내부이든 외부이든 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은 복잡하고 분주하다. 도량의 사방에는 오색 번과 금전·은전, 지화와 괘전 등 장엄구가 총동원되어 사찰 안팎을 꾸몄다. 의식이 있기 한참 전부터 승려들은 모두 나서서 의식을 준비하였다. 의식은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서 특정한 절차에 의해 구성되어, 시간과 공간, 눈과 귀와 입과 몸으로 행하는 하나의 종합 예술이다.

사람들이 대거 운집한 대웅전 앞마당에는 대형의 불화를 내걸었다. 사찰의 지붕보다도, 동구 밖의 당산나무보다도 높게 솟아오른 불화 속 불보살은 현실에 내려와 소원을 들어주려는 신통력을 지닌 교주로 생각되었다. 혹은 기우재의 발원문에 기록되었듯이 용궁의 먹구름을 몰고 나타나 오랜 가뭄으로 타 들어간 논밭에 비를 뿌릴 수 있는 위엄 있는 교주로 인식되었다.192)안국사 괘불함에서 발견된 기우축원문(祈雨祝願文)(윤열수, 『괘불』, 대원사, 1991, 105쪽). 불보살의 강림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상징되었다. 의식을 진행할 때 도량에 오도록 불보살의 이름을 암송하는 절차를 통해 이들은 존재감을 갖게 된다. 또한, 불화의 주제로 그려짐으로써 구체적으로 시각화되었다. 이들의 강림을 찬탄하고 도량에 내려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려 예배하는 절차로 인해 의식 도량의 신이력은 높아졌다.

괘불과 도량에 걸린 장엄용 번이 도량으로 옮겨져 펼쳐짐으로써 의식이 열리는 사찰은 성스러운 공간으로 상징되었다. 의식에 동참한 사람들은 영혼을 불러 불법을 듣게 하고 깨달음을 얻는 절차를 함께 진행하면서 부처의 설법 공간에 참석하는 경험을 공유하였다. 의식에 사용된 시각 문화, 야외무대에서 의식을 주도하는 승려와 신자들이 함께 암송하는 게송(偈頌), 현실의 도량으로 내려온 불보살을 찬탄하며 올리는 범패는 의식의 무대를 역동적인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의식은 전각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였다. 사찰의 전 공간이 의식 무대가 되어 하나의 공연이 펼쳐졌다. 의식이 열리는 곳은 산 자와 세상을 떠난 자,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가 모이는 다양한 교류의 공간이었다. 무대에 등장하는 이들은 도량으로 강림한 불보살뿐만 아니라 의식을 끌고 가는 승려, 의식을 발원한 신도들과 의식의 공덕을 통해 천도 받고자 하는 영혼들이었다. 물론 어떤 때는 주인공이 되었다가 어떤 때는 관객이 되는 등 역할은 고정되지 않았다. 의식 공간에 모인 승려와 신자, 불보살과 영혼은 일정한 절차를 함께 진행해 나가면서 상호 작용하였다.

의식집에는 의식의 순서와 내용을 여러 청중을 가정하여 기술하고 있 다. 무대의 여러 등장인물은 의식의 순서에 따라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식집의 문장은 크게 의식을 진행하는 서술자가 불보살에게 서원하는 글, 서술자가 승려들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글, 그리고 서술자가 승려 및 의식 동참자에게 내용과 절차를 설명하는 세 가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193)이러한 구성은 1496년 학조에 의해 왕실의 명으로 편찬된 『진언권공』에서부터 이미 나타난다(『진언권공삼단시식문언해(眞言勸供三壇施食文諺解)』,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국학 자료 간행 위원회, 1978). 결국 의식을 진행하는 승려와 공양을 받는 불보살, 의식에 동참한 신도와 영혼은 모두 의식의 주체였다.

의식은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스토리를 갖는다. 주인공과 보조적인 인물, 각 인물의 역할은 복합적인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 의식의 전체 구조는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 상승하다 클라이맥스를 맞고 다시 하강하는 단계로 구성된다. 많은 사람이 의식에서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고 여러 사물과 의식구는 무대가 된 의식 공간을 장엄하였다.

고대부터 조선으로 이어지는 의례의 시각 문화는 즉시성에서 항구성으로, 일회성에서 상설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의례의 활성화는 사찰에 의식의 매개자, 전문 의식승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체계화된 의식 절차를 기록한 의식집과 의식 도량에 사용되는 의식 법구에 대한 수요를 초래하였다. 의식의 성행은 미술적 표현의 형식과 소재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왔다. 의식에는 그림이라는 매체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의례와 의식의 시각 문화는 신자들에게 있어 예배됨으로써 기능을 갖는 예배화와는 달리 그것이 위치하고 있던 사회 구성원과 좀 더 유연하게 소통하였다. 신자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보면서 그림 속에 도해된 부처의 자비가 자신에게 와 닿으리라는 것과 그들이 마련한 의식이 죽은 이들에게 평안을 가져올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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