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1. 예를 알려 주는 책과 그림
  • 예서의 발간과 도설의 활용
조인수

예가 중요하였던 만큼 그것의 이념과 실천에 대하여 설명한 예서(禮書)도 많이 발간되었으며,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도설(圖說), 즉 그림이나 도표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도(圖)’라는 글자가 사실적인 회화와 개념적인 도식을 모두 가리킨다는 점에서도 그림과 도표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던 전통 시대 시각 문화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그동안 회화라고 간주되지 않았던 도표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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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 종묘
『국조오례의』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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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성립된 조선 사회에서 예는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핵심이었다. 유교적 통치 체제의 정립을 위해서 조선 초기부터 국가 전례(典禮)와 민간 예속(禮俗)을 유교적 의례로 바꾸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1401년(태종 1)에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가 설치되었고 1420년(세종 2)에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을 중심으로 왕실 의례 전반을 유교적 예제의 기준에 맞추어 개혁하였다. 그 결과 기본 법전에 해당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등장하고 국가의 기본 예식을 『세종실록』의 「오례」를 거쳐 마침내 성종대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집대성시키면서 국가 의례를 체계화시켰다. 이렇게 조선 초기에 국가에서 편찬한 예제와 관련된 책에 이미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도설이 덧붙여졌다. 여기에 실린 도설들은 많은 경우 중국에서 이전에 발간된 책을 참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송대에 편찬된 『삼례도(三禮圖)』에 수록된 각종 기명과 복식 등의 그림을 조선의 도설들과 비교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송대부터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고 출판이 활발해지면서 문자뿐만 아니라 그림이 포함된 책자가 많이 등장하였다. 이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용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글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눈앞에 펼쳐 보여 독자의 호 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시각 문화의 확산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 새로 정비한 의례 제도를 좀 더 정확하게 실행하려는 의지는 이렇게 의례서에 도설을 포함시킴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한편, 『경국대전』이나 『국조오례의』에는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 백성까지도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문물과 제도를 유교에 기초하여 정비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왕실을 중심으로 예를 설명한 이러한 의례서보다는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성리학 원리에 좀 더 충실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보급하려 노력하였다.2)조선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수용에 대해서는 고영진, 『조선 중기 예학 사상사』, 한길사, 1995 참조.

고려 때 성리학과 함께 도입된 『주자가례』는 조선시대에 관혼상제의 규범서가 되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한 송대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주자가례』는 관혼상제에 대한 각종 의례와 실천 규범을 정해 놓은 책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주자가례』를 올바르게 해석하고 충실하게 따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조선의 고유한 시속(時俗)과 절충시키고 조화시켜 토착화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지 못해서 그 내용은 아직 조선 사회에서 충분히 정착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전통적인 속례(俗禮)가 여전히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계몽하기 위하여 여러 예서가 등장하였다.

특히, 『예기』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예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고, 다섯 가지 예 중에서 제례(祭禮)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던 만큼, 상장례와 제례에 관련된 문제가 먼저 관심을 끌게 되었다.3)『예기』, 제통(祭統). 성리학적 예제를 강조하는 『주자가례』를 조선 사회에 적용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조상을 받드는 제례 의식의 절차와 이론을 모은 『봉선잡의(奉先雜儀)』를 저술하였다. 이는 『주자가례』에서 제시된 규범을 전통 습속과 조화시키는 것을 모색한 예서로서 제례에 대한 지침서이자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아직 도설이 수록되지 않았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조선 사회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나 예학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어 가히 ‘예학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여러 차례 전란을 거친 뒤에 조선 사회는 기존의 체제와 사회 구조 및 가치관이 흔들리게 되었고, 양반 지배층은 성리학적 규범을 강화하여 지배 구조를 재정비하려고 했다. 그 이면에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예법에 대한 기강이 해이해지고 유교적 생활 질서가 흐트러지면서 불교적·민간 신앙적 관습이 다시 성행하였던 적이 있다. 따라서 예제의 회복은 사대부의 지배 체제를 회복하고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예학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종대에 대비(大妃)의 상복을 1년을 입어야 하는지 3년을 입어야 하는지로 불거진 논쟁은 급기야 성리학적 실천 규범에 대한 논박을 넘어서서 운명을 건 정치적 투쟁으로 비화되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왕실의 상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예송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예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관념적인 윤리 지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였음을 보여 주며, 현실 정치의 붕당(朋黨)과 결부되면서 정권의 향배를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이었음을 알려 준다. 게다가 때때로 붕당 세력의 당파적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반목이 작용하여 예에 대한 이념이나 학설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지배층 세력의 정쟁(政爭)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등장한 예서에는 종종 도설이 적극적으로 삽입되어 내용의 이해를 돕는다.

17세기 초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신의경(申義慶, 1557∼1648)은 상례에 대한 지침서로서 『상례비요(喪禮備要)』를 편찬하였다. 신의경은 전란 이후 혼란한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실천적인 예학을 정립하여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김장생(金長生, 1548∼1641)과 친분이 깊었던 인물이다.4)『상례비요(喪禮備要)』의 정확한 간행 연대는 논란이 있다. 김집(金集)의 서문에 따르면 자신의 부친인 김장생이 친구 신의경(申義慶)의 저서에 여러 대목을 증보하고 아울러, 시속(時俗)의 예제(禮制)도 참고로 첨부하여 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고 1620년에 서문을 붙여서 면모를 새롭게 하였으며, 그 뒤 김집 자신이 이를 다시 교정하여 1648년에 간행하였다고 한다. 한편, 책 끝에는 신흠(申欽)이 1621년에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영진은 신의경 몰년에 의문을 표하며 1583년에 『상례비요』가 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영진, 앞의 책, 150∼157쪽 참조). 이 책은 상례에 관계된 본격적인 지침서로서 『주자가례』를 기초로 여러 학설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었다. 『상례비요』는 비록 분량은 많지 않지 만 상례와 관계된 사항을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각 부문의 합리적인 해설을 권위 있는 여러 학자의 예설에서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더욱이 김장생과 김집(金集, 1574∼1656) 부자의 증보(增補)와 교정(校正)을 거쳤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이름은 높았다. 따라서 상례 절차에 대한 중요한 참고가 되었고 이후의 편찬물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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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비요』의 발인지도
『상례비요』의 발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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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본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40면에 걸쳐서 도설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내용의 이해를 돕고 있다. 즉, 사당(祠堂), 신주(神主), 의금(衣衾), 최질(衰絰), 오복제(五服制), 상구(喪具), 발인(發靷), 성분(成墳), 입비(立碑), 수조(受弔), 진찬(進饌) 등에 관련된 도설을 책머리에 실었다. 이에 대하여 범례에서 “도설은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의거하였고 간혹 덧붙이거나 고친 것이 있어서 보는 사람이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주자가례』에 이미 실려 있던 도설을 기초로 제작한 것이었다.

현재 알려진 『주자가례』는 대개 20개에서 50개 정도의 도설을 삽입하여 예의 주요 원리, 의복 제도, 기물들을 도식화하여 알기 쉽도록 하였고, 공간상의 건물·가구·사람의 배치나 상차림 등을 이해하기 편하도록 도해(圖解)하였다. 그런데 이 책의 지은이가 과연 주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남아 전하는 가장 오래된 『주자가례』는 1305년에 출간된 판본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도설이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5)Patricia Buckley Ebrey, Chu Hsi’s Family Ritual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에서 Introduction 및 Appendix A 참조. 이에 대해 명대의 성리학자 구준(丘濬, 1420∼1495)은 『주자가례』의 본문 내용에서 도설에 대 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도 당시의 판본에는 그림이 포함된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책의 내용과 도설이 서로 차이가 나는 곳을 여러 군데 지적한 후, 책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그림들은 주자가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다.6)김장생(金長生), 『가례집람(家禮輯覽)』, 가례도(家禮圖) : 『국역 사계전서(國譯沙溪全書)』 3, 민족 문화 추진회, 2003, 238∼239쪽 재인용. 다시 말해서 『주자가례』가 널리 퍼진 후에 누군가가 내용에 부합하는 그림들을 삽입하였고 그것이 이후 함께 출판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자가례』에 도설이 실려 있었는지의 여부는 조선의 예서에 도설이 나타난 것을 이해하는 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신의경 같은 조선의 예학자들이 참조한 『주자가례』에는 이미 도설이 포함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고려에 소개되었던 당시는 물론이고 명대 1415년에 출간된 『성리대전(性理大全)』에도 도설이 실린 『주자가례』가 포함되었는데, 이 책은 세종대에 이미 조선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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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비요』의 천시목욕습전위위반함(遷尸沐浴襲奠爲位飯含) 및 졸습설영좌친후입곡도(卒襲設靈座親厚入哭圖)
『상례비요』의 천시목욕습전위위반함(遷尸沐浴襲奠爲位飯含) 및 졸습설영좌친후입곡도(卒襲設靈座親厚入哭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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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비요』의 도설은 사당도(祠堂圖)나 사당감실도(祠堂龕室圖)같이 계화(界畵) 형식으로 건물을 그린 것, 신주도(神主圖)나 명정도(銘旌圖)처럼 상례에 사용되는 기물을 그린 것, 발인도(發靷圖)나 하관도(下棺圖)같이 의례를 행하는 장면을 풍속적으로 묘사한 것, 그리고 오복지도(五服之圖) 같은 도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송․원대 인물화 양식이 반영되어 있어서 범례에서 언급한 대로 이전의 판본을 참조한 점이 확인되며, 이중 일부는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도설임을 밝히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시신을 목욕시키고 염습을 한 후 영좌를 설치하는 두 장면의 경우 도상 배치하듯 최소한의 기물을 간략히 그린 후 물건의 이름이나 사람 의 행동을 글로 써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물건이나 행동을 지시하는 글자들이 도형의 안쪽이나 바탕에 있는데 화면상의 글씨의 위치가 실제의 제례 공간에서의 위치와 일치한다. 특정한 위치에 있어야 할 물건이나 구체적인 행위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언어적으로 지시한 것이다. 이는 문자와 기호가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시각과 언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복잡한 의례를 효율적으로 개념화시킨 것이다. 예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하는 것이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세세한 행동 지침과 각종 물건들의 선택을 일일이 문자로 설명하기 어렵다. 때로는 그림이나 도표가 혼란을 주지 않고 명쾌하게 내용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점에 착안하여 예서에 도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례비요』는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예서 중에서 이렇게 다양한 도설이 있는 경우는 아직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이이(李珥, 1536∼1584)의 제의초(祭儀抄) 같은 글에는 『주자가례』처럼 사당도, 정침시제지도(正寢時祭之圖) 등이 들어 있으며, 그 밖에 유사한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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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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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장생은 『주자가례』의 주석서이자 관혼상제에 대한 설명을 총정리하여 『가례집람(家禮輯覽)』을 편찬하여 1599년(선조 32)에 완성하였다. 이 책은 친구 신의경과 토론을 거친 후 여러 학자의 학설을 두루 살펴보고 『주자가례』를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었다. 『상례비요』처럼 실제로 예를 행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한 실용서에 그치지 않고, 『주자가례』를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인 목적이 많이 반영되었다. 『가례집람』은 도설편이 먼저 나오고 내용이 뒤에 나오는데 “도설은 한결같이 『주자가례』의 순서에 의거하였으며 간혹 보충해 넣은 것이 있어서 순서가 같지 않은 것이 있으니 보는 사람이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김장생은 책의 서문에서 “도설을 책머리에 두어 이 책이 각종 물건의 명칭과 용도가 모두 갖추어지고 의미를 거칠게나마 알게 하여 처음 배우는 선비들이 이 책을 본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있게 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7)김장생, 「가례집람서(家禮輯覽序)」, 『국역 사계전서』 1, 168쪽 참조 : 고영진, 앞의 책, 238∼139쪽 재인용. 그만큼 도설을 중시하여 첫 부분에 배열하고 뒤이어 도설에 대한 해설을 수록하고 그 뒤로 본문을 실었다.

『가례집람』에서는 『상례비요』와 달리 처음에 고대 중국 삼대(三代)의 궁실과 각종 기물, 복식에 대한 그림과 설명을 수록하고 있다. 즉, 일반 사대부의 가례가 아닌 그것의 연원이 되는 왕족의 가례를 먼저 싣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에 『주자가례』에 대한 도설이 실려 있는데 『상례비요』보다 더 풍부하고 상세하다. 절하는 방법이나 희생으로 쓰는 돼지처럼 회화적인 표현이 좀 더 많이 나타나기도 하며, 표의 형태를 지닌 복잡한 도식도 늘어났다. 따라서 김장생처럼 예학에 정통한 성리학자도 도설의 효용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십분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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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초상
이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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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이재(李縡, 1680∼1746)가 관혼상제에 대한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참고서 『사례편람(四禮便覽)』을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의 예제는 중국의 것과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주자가례』를 따를 수만은 없었다. 이재는 『주자가례』의 내용을 보완하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도록 조정하였는데 상례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례비요』를 주로 참고하면서 당시의 관행을 참작하였다. 『사례편람』의 간행은 이재가 죽은 후 증손자 이광정(李光正)에 의해 1844년(헌종 10)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 책은 『주자가례』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당시의 풍속과 적절 히 절충함으로써 이후 발간되는 예서류의 기준이 되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가례가 사회 저변에 확산되고 일상생활 속에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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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
『사례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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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언해』의 상여
『가례언해』의 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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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에도 여러 가지 그림과 도표로 이루어진 도설이 각 권마다 수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각 편의 앞에 도설을 배치하였다가 편의를 위해서 1884년(고종 21) 판본부터는 각 편의 뒤에 실었다. 비록 도설의 수는 많지 않지만 그림의 작도가 매우 정교해서 회화적인 측면에서 이전보다 발달된 수준을 보여 준다. 특히, 1884년 판본은 가늘고 정확한 선묘를 구사하여 초간본보다 기법적으로 우수하다. 이는 도설을 단순히 내용의 이해를 돕는 보조적 기능을 넘어서 자체의 시각적 요소를 중시한 결과이다. 기왕이면 정교하고 세련된 도설을 수록함으로써 예법의 절도와 격식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이제 도설은 부수적인 역할에서 그 자체로서 책의 격조를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한편, 사대부들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주자가례』를 널 리 보급하기 위하여 언해(諺解), 즉 한글로 번역을 하여 편찬하였다. 본격적인 가례 언해서로 신식(申湜, 1551∼1623)의 『가례언해(家禮諺解)』가 등장하였는데, 여기에도 도설이 포함되었으며 설명이 한글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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