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1. 예를 알려 주는 책과 그림
  • 태극과 태극도
조인수

성리학이 이전의 유교와 다른 점은 현상 세계의 배후에 만물의 근원이 되는 형이상학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고 이를 태극(太極)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태극 문양이 태극 사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태극 문양을 이용하는 태극도(太極圖)는 만물의 근원을 도해한 것이 된다. 과연 만물의 근원을 단순한 기호로 나타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일단 접어 두기로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용하는 태극 문양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사대부의 시각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태극 문양으로 많이 쓰이는 것은 상하 또는 좌우를 적색과 청색으로 구분한 문양, 음양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좌우를 흑백으로 구분한 문양, 회화적 요소를 강조한 흑백의 소용돌이 문양, 동심원식의 문양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소용돌이 문양을 변형시켜 원을 세 개 또는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적, 청, 황, 녹 등의 채색을 가한 삼태극, 사태극 등도 넓은 의미에서 태극 문양의 범주에 속한다.9)조인수, 「태극 문양의 역사와 태극도의 형성에 관하여」, 『동아시아 문화와 예술』 1, 동아시아 문화 학회, 2004, 27∼61쪽 참조.

태극 문양에 대해서 심오한 태극 사상을 기초로 형태적 분석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상하 구분을 음양으로 논하고, 서로 엇물리는 양상을 기운의 순환으로 설명하고, 청색과 적색을 우주의 조화로 이해한다. 이는 태극 문양을 우주 원리의 차원에서 신비한 형상을 지닌 기호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태극 사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상징적인 기호는 그 자체의 형상이 원래는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것이었지만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서 사용되면서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된 태극 문양은 조선시대의 시각 문화적 배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확대보기
태극도
태극도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 미술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태극 문양은 원을 상하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하여 중국의 태극 문양은 주로 원을 좌우로 구분하는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태극 문양이 대개 적색과 청색으로 채색하는 반면, 중국의 태극 문양은 대체로 흑색의 음과 백색의 양을 대조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유명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비로소 태극을 도해한 태극 문양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태극 문양은 작은 원을 배치하고 이를 세 겹의 동심원이 차례로 둘러싸고 있으며, 바깥의 세 개의 원은 좌우로 분리되어 각각 엇갈리며 흑과 백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반면, 널리 알려진 태극도, 즉 곡선으로 원을 구분하여 흑백의 음양 도상을 취한 태극 문양과 팔괘(八卦)의 결합은 명대 초기에 비로소 나타난다. 팔괘는 고대 전설상의 인물인 복희(伏犧)가 창안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팔괘의 형성 과정도 태극 문양의 경우만큼이나 분명하지 않다. 태극도에서 나타나는 팔괘는 복희 팔괘(伏羲八卦)라고 알려진 선천 팔괘(先天八卦)이다. 이는 하나로 연결된 선으로 양(陽)을 표현하고, 중간이 끊어진 선으로 음(陰)을 나타내는 효(爻) 세 개를 쌓아서 괘(卦)를 구성하고 순차적으로 배열하여 음양의 가감과 천지간의 상호 작용을 도해한 것이다. 주돈이의 태극 문양은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재현적인 요소는 찾아보기 힘들고, 별도의 설명 없이는 태극 문양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명대의 태극 문양은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여 음양의 상호 작용을 역동적인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이 조선시대에 성리학적 맥락에서 널리 사용된 것이다.

확대보기
『역범도(易範圖)』의 복희선천팔괘도
『역범도(易範圖)』의 복희선천팔괘도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에서 태극 문양의 기원에 대해서는 그것의 신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종종 과장되어 논의되기도 하였다. 가장 오랜 예로서 통일신라 때 창건한 감은사(感恩寺)의 기초 석재에 새겨져 있는 문양에서 태극 문양의 시원을 찾기도 하지만, 이는 형태상으로 볼 때 전형적인 태극 문양과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태극 문양이 종종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공민왕릉의 석물, 귀족들의 석관, 청동 향로 등에 등장하지만 이들 태극 문양은 후대의 경우와 달리 태극 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서 성리학에 기초한 태극 사상을 표현한 태극 문양은 조선시대에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부터는 각종 공예품과 건축물의 장식에 태극 문양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중국보다도 더 활발하게 태극 문양을 사용하는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건축의 경우 궁실, 능묘, 관아, 서원, 사찰 등을 망라하여 대문이나 난간의 장식, 기와의 문양, 문설주 장식, 계단 소맷돌 장식 등에 태극 문양을 많이 사용하였다. 왕실과 관련된 건물 이외에도 관아 건물과 서원 등에도 태극 문양이 장식되었고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이들 건물의 대문을 비롯한 여러 문에 커다랗게 태극 문양을 그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 건축물에 장식된 태극 문양은 형태상으로는 상하를 적색과 청색으로 구분한 전형적인 한국식 태극 문양도 있고, 흑백으로 구분하고 소용돌이처럼 묘사한 중국적인 태극 문양도 있는데, 전자가 대세를 이룬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사회 전반에 성리학 이념이 파급되는 과정에서 성리학 우주론의 핵심이 되는 태극 사상을 표현하는 태극 문양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그 원리의 실현을 정치적 이상으로 추구하였던 만큼, 성리학자들이 관리로서 정무를 맡아보던 관아 건물과 성리학을 배우고 성현을 모시는 서원의 대문에 커다랗게 태극 문양을 그리는 것은 태극 사상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확대보기
월중도(越中圖) 제3폭
월중도(越中圖) 제3폭
팝업창 닫기

따라서 조선시대의 태극 문양은 성리학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극 문양의 보급과 더불어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과 크게 관련이 없는 불교 건축물이나 일상 생활용품에도 벽사적(辟邪的)·길상적(吉祥的) 의미를 지니며 광범위하게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렇게 널리 사 용된 태극 문양은 형태도 상하로 구분된 태극 문양, 좌우로 구분된 태극 문양, 소용돌이 형태의 태극 문양, 삼태극, 사태극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확대보기
도동 서원 수월루
도동 서원 수월루
팝업창 닫기

앞서 살펴본 대로 권근과 이황은 문자와 도형을 결합시켜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심성을 설명하였다. 조선 초기에 이미 그림으로 태극 사상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후 여러 학자가 태극 문양을 포함한 도설을 사용하여 다양한 학설을 전개하였다.10)이애희, 「도설을 통해 본 조식(曺植)의 성리설(性理說): 「학기도(學記圖)」의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5, 한국사상사학회, 2000 ; 김낙진, 「장현광의 역학과 세계 이해」, 『도설로 보는 한국 유학』, 예문서원, 2000, 64쪽, 180쪽. 이는 조선시대 학자들이 나름대로 태극 사상을 이해하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도해하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에 대한 주체적인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 태극도를 이용한 성리학 사상의 시각화가 널리 유행하였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성찰에 기초하여 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이를 예학의 차원에서 다듬어 갔다. 조선의 현실에 맞는 예의 실현을 모색한 결과가 예서로 나타나게 되었고 좀 더 정확한 예의 실천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도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활용하였다. 또한, 도설은 단순한 도해의 수준을 넘어 예를 구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제 남은 과제는 현실의 세계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