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2. 예를 실천하는 장소
  • 향교와 서원, 성현과 스승을 추모하는 곳
조인수

향교(鄕校)는 국가에서 각 지방에 세운 교육 기관으로 고려 때 처음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에는 1읍 1교의 원칙으로 전국 각지에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향교는 풍속 교화(風俗敎化)의 근원이다.”라는 정신 아래 유학을 널리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우수한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장소가 향교였다.19)이상해, 『한국미의 재발견 12: 궁궐, 유교 건축』, 솔, 2004, 149∼199쪽. 조선시대의 향교는 이러한 교육의 기능뿐만 아니라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시고 배향하는 문묘(文廟)로서의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향교의 건축적 공간은 제향(祭享) 공간과 강학(講學)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제향 공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과 명현의 위패를 봉안한 대성전(大成殿) 및 동무(東廡), 서무(西廡)로 이루어진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사성(四聖), 십철(十哲) 및 송조 육현(宋朝六賢)의 위패를 모신다. 동무와 서무에는 대성전에 모시지 않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들 위패를 모신다.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명현인 동방 18현(東方十八賢) 등을 모신다.

향교 내에서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은 앞뒤로 배치되는데 때로는 강학 공간이 앞으로 나오는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가, 때로는 제향 공간이 앞으로 나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 배치가 적용된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강릉 향교이고 후자의 대표적 예가 나주 향교이다. 향교에서 주로 배우는 것이 유교의 경전에 기초한 가르침이었고 그 중심 사상은 올바르게 예를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의 최고 성현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향교에 함 께 세우고 이와 더불어 공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성스러운 공간과 일상의 공간이 함께 병존하는 셈이고 성속(聖俗)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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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 서원 전경
병산 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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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선현 제향을 위해 사림(士林)들이 설립하였다. 서원은 원래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강조하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선현을 모시는 사묘의 기능을 덧붙였지만 점차 강학보다는 향사(享祠)의 기능을 중시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지역에 기반을 둔 문벌 세력이 향 촌의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상징적인 향사 기능이 강화된 결과이며, 이로 인하여 서원의 건축적 구성도 사당이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는 “서원에는 강당과 사당이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사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이황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서원의 사당에서는 배향한 성현의 신주를 모셨으며, 임금으로부터 서원의 명칭을 하사받아 사액(賜額) 서원이 되면 여러 혜택을 누렸다. 예를 들어 도동 서원은 김굉필을 배향하고, 도산 서원은 이황을, 병산 서원은 유성룡을, 필암 서원은 김인후를 각각 배향한 곳이다.

서원은 17∼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전국에 600여 개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 인물을 여러 서원에서 배향하고 모시는 첩설(疊設)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20)김봉렬,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 3: 이 땅에 새겨진 정신』, 돌베개, 2006, 55∼120쪽. 중종 때 개혁을 부르짖다 젊은 나이로 죽어 갔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신주는 그의 주검을 염습하였던 양팽손(梁彭孫)이 사당을 세웠던 능주의 죽수 서원(竹樹書院)을 비롯하여 고향 용인의 심곡 서원(深谷書院), 은거하려고 했던 양근의 미원 서언(迷源書院), 해주의 소현 서원(紹賢書院), 나주의 경현 서원(景賢書院), 여산의 죽림 서원(竹林書院), 영흥의 흥현 서원(興賢書院) 등 여러 서원에서 모셨다.21)이종묵, 『조선의 문화 공간』 1, 휴머니스트, 2006, 344∼347쪽. 조선 성리학을 완성시킨 이이를 기리는 서원은 전국 도처에 설립되어 20여 개나 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서원이 각종 폐단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47개만 남게 되었다.

제례는 삼가 근본으로 돌아가고 은혜에 보답한다는 ‘신종보은(愼終報恩)’의 뜻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므로 제사를 올리는 장소는 돌아가신 조상의 혼이 신령의 형태로 강림하는 곳이 된다. 따라서 사당과 그 내부는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공경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정결하고 단출하게 꾸며진다. 신주를 놓은 신주함을 교의(交椅) 위에 올리고 그 앞에 향탁(香卓)이나 제상(祭床)을 놓는다. 이들 가구는 모두 최소한의 장식에 나무의 자연색을 그대로 살리거나 검은 칠을 입힌 간결한 모양이다.

사대부들은 돌아가신 조상과 스승을 정성껏 모시는 사당을 집안이나 서원에 마련함으로써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공경과 추념의 마음을 갖도록 하였다. 사당에는 다시 조상이나 스승의 혼령이 담겨 있는 신주가 봉안된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의 혼령은 신주뿐만 아니라 초상과 분묘에도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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