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3. 혼령이 깃드는 곳
  • 초상, 조상을 대신하는 그림
조인수

실존 인물을 똑같이 그려 내는 초상화(肖像畵)는 기록이나 교훈을 위한 목적으로 쓰이기도 하였지만 유교의 조상 숭배와 더불어 제의적인 용도가 우선시되었다. 원래는 사람이 죽어서 땅속에 묻히고 나면 혼령을 나무에 옮겨 신주로 삼고 이를 사당에 모셔 섬기는 것이 유교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형상을 재현하여 이를 숭배하는 불교의 관습이 전파되면서 초상 조각이나 초상화가 성행하게 되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주에 비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초상화는 강렬한 인상으로 말미암아 조상을 추모하는 제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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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원 초상
이후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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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염두에 두고 핍진(逼眞)하게 그리는 것을 가장 중시하였던 탓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의 초상은 극사실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게다가 외형만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품까지 전달해야 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입각하여 단아한 선비의 모습을 창백하면서도 엄격한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비록 사대부들이 직접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경우는 매우 적었지만, 초상화의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사대부의 후원과 감식안이 없었다면 조선시대의 뛰어난 초상화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대개 기량이 탁월한 화가들이 초상의 제작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정제된 양식과 극도의 사실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릴 때 얼굴은 인물의 개성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지만 신체와 배경은 간 략하고 단조롭게 그려진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초상화는 대개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소매 속에 집어넣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뒤쪽 배경은 생략되어 빈 공간처럼 표현되고 바닥에는 채전(彩氈)이나 화문석(花紋席)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얼굴만 다를 뿐 유형화된 모습으로 인물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다양하게 전개된 근대 이후 서양의 초상화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의 초상화는 경직된 자세의 인물을 반복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뚜렷하다. 서양의 경우 자연스러운 자세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배경에도 등장인물과 관련되는 여러 물건을 현실감 있게 배치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우리나라의 초상화가 성리학을 배경으로 한 사대부의 시각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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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로 초상
김재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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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상화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조상 숭배와 관련된 제례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일상생활 속의 한 장면을 포착하여 표현하고 공개된 장소에 작품을 진열하는 서양의 초상화와는 달리, 동아시아의 초상화는 사당과 같은 종교적인 공간에서 제한적으로만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서양의 경우처럼 손쉽게 살펴보고 인물의 세속적인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며 회화적 기교에 주목하는 일은 드물다. 의례 규범을 준수하여 초상화를 봉안하며 이를 위해 펼치는 각종 의식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초상화를 제도와 양식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의례 속에서 초상화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고려시대에는 경령전(景靈殿)이라는 유교식 원묘(原廟)로서의 진전(眞 殿)과 왕실 원당(願堂)을 중심으로 한 불교식 영당(影堂)에 왕과 왕비의 초상을 모셨다. 그러나 현재 남아 전하는 고려의 어진(御眞)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형식이나 양식을 알기는 어렵다. 단지 조선시대와는 달리 초상화뿐만 아니라 소조상(塑造像)이나 주조상(鑄造像)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 눈길을 끈다. 이는 초상의 제작과 숭배가 비록 먼 고대부터 존재하였던 것이지만 불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더욱 활발하게 발달하였고, 종교 의례적인 측면이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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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상
태조 왕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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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경우 송대 초기에는 황실에서 조상의 초상을 주로 불교 사찰에 봉안하였는데, 이는 당나라 때부터 성행하던 관습으로 당시 민간에 널리 퍼진 풍습을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조상을 기리는 효사(孝思)는 유교의 전통에 기인한 것이지만, 이미 중국 불교에서 조상 숭배 의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효를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로써 불교 사찰에 부모의 초상을 봉안하고 재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 되었다.

원래 유교에서는 독특한 영혼관과 생사관에 기초한 조상 숭배 사상을 발달시켜 죽은 조상의 혼령이 나무로 만든 신주에 깃든다고 믿고, 고대부터 이를 사당에 모시는 것을 관습으로 정착시켜 왔다. 그러나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신주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형상의 경배 대상을 선호하였고, 이러한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 예배를 위한 초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중국의 경우 사묘(祠廟)에 초상을 안치하는 풍습은 고대부터 있었으나 당대에 이르러서야 성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불교와 도교에서 상(像)을 만들고 공양하는 풍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27)大村西崖, 『中國美術史彫塑篇』, 國書刊行會, 1931, 612∼613쪽 ; 조선미, 『한국 초상화 연구』, 열화당, 1983, 37∼38쪽. 불교의 유입 이전에도 초상화를 제작하였던 기록이 있고 고대 분묘에도 주인공의 초상을 벽 화로 장식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이는 예배의 대상은 아니고 교훈적·기록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불교 미술의 영향 아래 초월적인 존재의 시각적 재현물로서 신성한 의미를 지니며 새롭게 등장한 초상은 장대하고 경건한 의식을 통하여 좀 더 강렬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조상을 매개하게 되었다. 이 경우 이차원의 회화보다는 삼차원의 조각이 더 효과적이었는데, 이는 사실적 초상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에 따라 표현 매체도 달리 선택되었고 수용 방식도 달랐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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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신속삼강행실』의 순흥화상(順興畵像)
『동국신속삼강행실』의 순흥화상(順興畵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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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신속삼강행실』의 석주각목(釋珠刻木)
『동국신속삼강행실』의 석주각목(釋珠刻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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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영정이나 목조각상을 모셨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는 고려 성종 때 구례현의 손순흥(孫順興)이 모친이 돌아가시자 영정을 그려 제사를 모셨고, 고려 문종 때 석주(釋珠)는 어려서 승려가 되었는데 나무로 부모의 형상을 만들고 색칠하여 아침저녁으로 공양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런데 가묘 제도에는 신주를 모셔야 하는지 초상을 모셔야 하는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9)은 『서의(書儀)』에서 “세속에서는 모두 영정을 혼백 뒤에 설치하는데, 남자는 살아 있을 때 화상(畵像)이 있으면 그것을 사용해도 뭐라 할 바가 없다. 그러나 부인은 살아 있을 때 깊숙한 규문(閨門) 안에 거처하며 비록 외출할 때에도 가마를 타고 얼굴을 가렸는데, 죽은 뒤 어떻게 화공으로 하여금 깊은 방 안에 들어가서 얼굴을 덮은 비단을 들치고 용모를 그리도록 하겠는가?”라고 하여 초상을 봉안하는 관습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는 초상화의 사용이 원칙적으로 어긋나지만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28)사마광(司馬光), 『서의(書儀)』 권5, 상의(喪儀)1, 혼백(魂帛). 또한, 정이(程頤, 1033∼1107)도 “한 올의 터럭이라도 돌아가신 분과 같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장례에서 초상의 사용이 부적절함을 언급하였다. 이후 이러한 근거에 따라 장례와 제례에서 초상의 사용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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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어진
태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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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문제점을 조선 초기의 사대부는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초에는 임금의 초상을 진전에 모셨는데, 세종은 원묘 제도를 정비하여 어진(御眞) 대신 신주를 모셨다. 이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옛 제도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불교식으로 초상을 모신 진전을 폐지하고 유교식으로 신주를 모신 가묘로 바꾼 것이다. 특히, 불교나 무속에 젖어 있던 사대부와 백성의 관습을 타파하기 위해 세종대에는 불교와 민간 신앙에서 숭배하던 각종 신상을 철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이 어느 정도 정착되고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자 다시 초상화를 조상 숭배에 활용하는 경향이 살아났다. 심지어는 초상화를 봉안하기 위해서 집 안에 영당이라는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살아생전에는 초상화를 통하여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수기적(修己的) 기능을 중요시하였고, 죽어서는 사당에 봉안하여 후손이나 후학들로 하여금 그 인품을 계속 본받도록 하였다. 이로써 제의적 기능이 더해 지는 것이었다.29)강관식, 「조선시대 초상화의 도상과 심상」, 『미술 사학』 15, 한국 미술사 교육 학회, 2001, 7∼55쪽 참조.

따라서 초상화는 관찰, 감상, 완상의 대상이 아니라 경모하고 숭배하는 것이어야 했다. 비록 초상화의 제작 과정에서는 사실성과 적절한 양식이 중시되지만, 일단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것’으로 성격이 변모한다. 화가의 손을 떠나 사당이나 영당으로 자리를 옮기면 초상화는 조상의 지극한 존엄성을 대신하는 물건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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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순 초상
오재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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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대부의 초상화는 중국의 초상화와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점을 보여 준다. 우선 중국의 초상화는 15세기 중반 이래로 대체로 정면상을 취하고 양손을 노출시키는 반면, 조선의 초상화는 자세를 4분의 3 정도 옆으로 돌린 측면상을 취하고 손을 소매 속에 감춘 것이 대다수이다. 이에 대해서 튀어나온 코를 정면으로 묘사하는 것과 손을 표현하는 것이 기법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조선 초상화는 이를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초상화의 경우에도 정면상이나 손을 노출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기량이 부족해서 이를 회피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초상화에 대한 취향과 미감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중국의 경우, 특히 청대 초상의 경우 서양으로부터 소개된 명암법(明暗法)과 투시도적 원근법(遠近法)이 적용되지만 조선은 이를 제한적으로 선별해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 결과 청대 초상화는 착시 효과에 의한 실감나는 얼굴이 등장하지만 다소 어둡게 표현된다. 하지만 조선 초상화는 계속 선묘를 위주로 얼굴을 묘사하고, 특히 고려 불화에서 적용되었던 복채법(伏彩 法), 즉 안료를 비단 뒷면에서 칠하는 전통을 계승하여 은은하고 깊이 있는 인상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다소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단아한 조선 선비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서양식 명암법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오재순(吳載純, 1727∼1792) 초상처럼 최소한으로 적절히 구사하여 이상적인 사대부의 풍모와 사실적인 박진감이 잘 조화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조상 숭배에 주로 사용하는 조종화(祖宗畵)는 중국의 경우 여러 대의 인물을 한 화면에 군상으로 함께 묘사하는 선세도(先世圖)가 등장하지만 조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수백 명의 조상들이 커다란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게 되는데, 이는 하나의 그림으로 여러 조상을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경제성과 후손의 번성함을 과시하는 효과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의 기본 정신에 투철하였던 조선의 경우 사당에 4대 이상을 모실 수는 없는 것이었고, 초상화 하나하나가 조상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므로 이런 군상은 발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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