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4. 추념의 시각화
  •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
조인수

무덤에 돌로 인물상을 만들어 세우는 것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전통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사대부의 무덤에도 석인상(石人像)을 만들어 세웠다.33)『성종실록』 권38, 성종 5년 1월 기유(23일) : 임영근, 「원주 지역 묘의 문인석 연구」, 『강원 문화사 연구』 10, 강원 향토 문화 연구회, 2005, 23쪽 재인용. 무덤에 사람의 모습을 한 돌조각인 석인상을 세우는 전통은 중국의 경우 늦어도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당나라 때에 문관의 모습을 한 문인석과 무관의 모습을 한 무인석으로 구분되어 배열되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왕릉에 석인상이 출현하며 고려시대에는 사대부층까지 확산되었고 문인석과 무인석의 구분이 시작되었다.34)배진달, 「조선시대 사대부 묘 문인석-용인군 소재 예를 중심으로-」, 『용인의 분묘 문화』, 용인시, 2001, 491∼505쪽. 이후 조선시대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수없이 많이 세웠다. 조선 왕릉의 경우 『국조오례의』 「흉례」에는 석조물의 크기에 대한 규정이 있어 문인석은 높이 8척 3촌(약 250㎝)에 무인석은 높이 9척(약 270㎝)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대부 무덤에 대해서는 규정된 바가 없다. 『주자가례』에는 비석에 대한 규정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무덤에는 동물을 조각한 석수(石獸)는 거의 세우지 않고 주로 석인상을 세웠으며, 석인상의 경우도 대개 문인상 한 쌍으로 구성되고 무인상은 매우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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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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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은 관복을 갖추어 입고 손을 가슴에 모아 홀(笏)을 쥔 문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 관모와 관복의 종류에 따라 복두형(幞頭形) 관모를 쓰고 공복(公服)을 입은 인물과 금관형(金冠形) 관모에 조복(朝服)을 입은 인물로 분 류된다. 복두는 상하 두 단에 각진 형태이며 기다란 각(脚)이 뒤쪽에서 좌우로 뻗기도 하고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드리워지기도 한다. 문인석의 경우 입체 조각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복두의 각이 좌우로 뻗은 형식은 없다. 공복은 조정에 나아가 공무를 볼 때 입는 옷으로 목깃이 둥글게 파이고 소매는 넓고 길어 발까지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한편, 금관과 조복은 의식이나 중요한 행사 때 착용하는 예복이다. 금관은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앞뒤로 길게 연결된 양(梁)은 품계에 따라 숫자가 다르다. 조복은 뒤에 자수로 장식한 후수(後綬)와 옆에 옥으로 장식한 패옥(佩玉)을 화려하게 늘어뜨린다.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 아래에는 양쪽 발이 보이는데 신발의 코만 동그랗게 노출되어 있다. 홀은 원래 신하들이 왕의 명령을 받아 적는 도구였다가 점차 의례용품이 되었던 것으로 옥, 상아, 나무 등으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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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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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사대부 무덤의 문인석은 대부분 왕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복두공복의 형식이다. 그러나 16세기 후반부터 금관조복 형식의 문인석이 등장하여 이후 두 가지 형식이 지속된다. 그런데 왕릉에서는 18세기에서야 비로소 금관조복 형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사대부 무덤에서 먼저 시작되어 왕릉으로 확산된 셈이어서 흥미롭다.35)배진달, 앞의 글, 494∼495쪽. 조선 후기에 사모(紗帽)가 보편화되면서 복두는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복두를 대신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금관조복의 문인석이 등장한 것일 수 있다.

왕릉과 달리 사대부 무덤의 문인석은 대개 지방의 석공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양식을 보여 주기보다는 지역에 따라, 무덤 주인공 및 후손의 신분과 재력에 따라 차이가 많다. 그동안 불교 조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던 것에 비하여 조선시대 무덤의 석물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 였다. 그 결과 조선시대 문인석의 조형적 특징 및 역사적 변천에 대해서는 아직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수량이 많고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며 조선시대 사대부 시각 문화의 독특한 양상을 잘 알려 주기 때문에 앞으로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문인석은 대체로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 어깨를 움츠린 듯한 경직된 자세로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정면을 향해 두 발로 버티고 서 있다. 무덤의 양쪽에서 한 쌍이 대칭으로 서로 마주보는 형식으로 배치되므로 중앙에 주인공이 위치하고 양옆으로 권속(眷屬)이 도열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전체적으로 돌덩어리의 느낌이 강하며 인체 조각으로서의 생동감은 드러나지 않는다. 머리와 손을 제외한 몸 전체는 두꺼운 옷으로 덮여 있어 신체의 자연스러운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마치 사각 기둥과도 같은 둔중한 느낌을 준다. 인체의 비례도 머리와 손이 상당히 크고 다리가 짧아 비사실적이다. 고개를 앞으로 빼고 턱과 홀이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여 특이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결국 인체미의 사실적 표현에 의해 일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보다는, 죽은 자의 공간인 무덤에서 필요로 하는 석물로서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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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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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에는 문인석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었다가 성종대에 비로소 사대부 분묘의 석조물을 품계에 따라 다르게 크기를 정하고 있는데, 석인상의 경우 1품에서 2품까지는 175㎝, 3품에서 6품까지는 160㎝, 그 이하는 145㎝로 정하였다.36)『성종실록』 권47, 성종 5년 9월 신미(19일) : 임영근, 앞의 글, 24∼25쪽 재인용. 그러나 실제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대략 150㎝에서 2m 내외의 크기였으며, 지역과 문중에 따라 크기와 형식은 각각 달랐다.37)김은선, 「조선 후기 능묘 석인상 연구 : 17∼18세기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81∼95쪽 ; 김은선,「조선 전기 경기 묘제 석조 미술의 이해」, 경기도 박물관, 『경기 묘제 석조 미술, 상: 조선 전기 해설편』, 경기도 박물관, 2007, 232∼253쪽. 왕릉의 문인석은 조선 초에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인물 표현에 약간 굴곡진 신체 곡선이 나타났는데 점차 단순하고 추상화되다가, 조선 후기에 다시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변한다.38)김은선, 앞의 글 참조. 그러나 사대부 무덤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일정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다양하게 변모한다. 무인석은 숫자는 많지 않지만 머리에 는 투구를 쓰고 손을 모아 긴 검을 쥐고 서 있어서 문인석과는 뚜렷이 구분된다.39)고려대학교 박물관,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 조사 보고서』, 고려대학교 박물관, 2003. 그리고 왕릉에는 나타나지 않는 쌍상투를 틀고 손을 모은 자세의 동자석이 등장한다. 동자상은 원래 불교 미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대부 무덤에서는 16세기 전반기에 처음 등장한다. 아마도 이 시기에 유행한 불교의 명부(冥府) 신앙이나 민간의 도교적 조형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40)김은선, 앞의 글,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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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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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분묘의 석물은 매장된 주인공이 높은 지위에 있었거나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알려 준다. 또한, 이러한 석물을 어렵게 장만한 후손들의 갸륵한 효심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흙으로 만든 간략한 봉분과는 대조적으로 커다란 돌을, 대개는 다루기 어려운 화강암을 힘들게 쪼아 만든 석물은 죽은 자를 영구히 추념하게 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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