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4. 추념의 시각화
  • 신도비, 죽은 자를 기리는 표지
조인수

비(碑)는 어떤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조형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돌로 만든 비석(碑石)이 일반적이다. 나무에 비하여 내구성이 강한 돌을 건축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장례와 관련된 분묘 건축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제례의 중심이 작은 의기로부터 기념비적인 시각 조형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41)Wu Hung, Monumentality in Early Chinese Art and Architectur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pp.121∼126.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석조 건축물이 발달하였던 전통이 있어 왔고, 이것을 성리학에서 수용하여 예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활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분묘에 이르는 입구에는 종종 죽은 사람의 평생 사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를 세운다. 조상신을 인도하는 길인 신도(神道)가 분묘의 동남쪽에 있다고 믿었던 만큼 신도비도 동남쪽 입구에 건립하여 신을 묘소로 모시는 동시에 무덤의 위치를 알려 주는 역할도 한다.

조상의 공덕을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하는 것이 자손된 도리이다. 높은 관직에 올라 뚜렷한 업적이 있었던 선조를 위해 세우는 신도비는 조상의 훌 륭한 덕행뿐만 아니라 이를 널리 현창한 후손의 효성을 후세에 영원히 남기는 것이었다.42)김우림, 「조선시대 신도비, 묘비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무덤 주인공의 일대기를 적은 지석은 땅속에 묻어버려 나중에 볼 수 없게 되지만, 죽은 이의 업적을 새긴 신도비는 지상에 우뚝 서서 무덤의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알려 준다.

우리나라에서 분묘와 관련된 비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고구려의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이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 비석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라 거북이 형태의 받침인 귀부(龜趺)와 몸체에 해당하는 비신(碑身), 그리고 그 위에 머릿돌로는 뿔이 없는 용, 즉 이무기를 조각한 이수(螭首)를 얹었다. 이런 형식으로 가장 이른 예는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이며 고려시대에는 같은 형식을 계승한 고승들의 탑비(塔碑)가 많이 남아 있다. 이들 비석은 3∼4m 내외의 높이로 정교한 조각과 단정한 글씨로 뛰어난 예술적 기량이 발휘되었다.43)비석에 대해서는 이호관, 「석비의 발생과 양식 변천」, 『한국의 미 15: 석등, 부도, 비』, 중앙일보사, 1981, 183∼192쪽 ; 정영호 편, 『국보 7: 석조』, 예경, 1984를 참조.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서 왕릉으로는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의 경우에도 귀부와 용 조각이 있는 신도비를 세웠으며, 일반 사대부의 경우에도 같은 유형의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다. 한편, 고려 말엽부터는 거북이 모양의 귀부 대신에 간략한 형태의 사각형 받침을 사용하고 머릿돌도 지붕 모양으로 바뀐 비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석을 보호하여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머릿돌에 지붕의 기와까지 상세히 새긴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은 조선시대가 되면서 신도비와 비석의 주된 형식으로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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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랑 선사 대보광선탑비(圓郞禪師大寶光善塔碑)
원랑 선사 대보광선탑비(圓郞禪師大寶光善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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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당나라 때에 무덤의 제도가 새롭게 정비되면서 관리의 품계에 따라 비석의 형태와 규모를 달리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이와 유사한 제도가 시행되지는 않았다. 대신 품계에 따라서 신도비를 건립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하는 규범이 있었다. 누구나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종2품(從二品) 이상의 관직이나 품계를 갖춘 사람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 나 비석의 모양에 대해서는 별도로 정해진 바가 없었던 탓인지 다양한 형태의 비석이 나타나고 있다.44)김우림, 「조선시대 묘제의 이해」,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 조사 보고서』, 고려대학교 박물관, 2003, 244∼255쪽. 조선 초기에는 머릿돌을 활짝 핀 연꽃 한 송이가 거꾸로 매달린 형상으로 만들고 받침돌에도 연꽃잎 모양으로 장식하는 신도비가 등장한다. 연꽃은 불교 및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각종 미술품에서 널리 쓰인 것으로 아직까지 불교적 내세관과 장례 풍습이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상황을 알려 준다. 즉, 무덤에 묻힌 사람이 극락왕생하기를 염원하는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 무덤에 묻는 지석(誌石)을 도자기로 만들거나, 장례식에 사용하는 만장(輓章)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같은 형식의 장식 요소가 이미 고려시대에 동종, 향완, 사경 등 불교 의식용 미술품의 조성기(造成記)에서 나타나고 있어 그 유래에 대해 알려 준다.45)전승창, 「15세기 위패형 자기 묘지와 위패 장식 고찰」, 『호암 미술관 연구 논문집』 4, 호암 미술관, 1999, 95∼116쪽. 이러한 연꽃무늬 장식의 신도비는 유사한 형식의 지석과 마찬가지로 조선 초부터 16세기 전반까지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성리학이 정착되기 전 단계에 불교적 요소가 아직 신도비 형식에서도 반영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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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흔 신도비
윤사흔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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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머릿돌 윗면을 둥글게 처리하고 구름무늬를 조각하고 삼족오(三足烏)가 있는 해와 방아 찧는 토끼가 있는 달을 포함시킨 형식의 신도비가 있다. 이 유형은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고대 신화에 기초한 해와 달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머릿돌이 없이 비신의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거나 양쪽 모서리를 잘라낸 형식의 신도비도 있는데, 이러한 유형은 신도비보다 묘비에서 많이 나타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나타난 귀부와 이수로 이루어진 신도비는 조선 초기 왕릉에 세워졌듯이 전통적인 유형이었다. 세종 영릉에 세워졌던 신도비는 귀부 위에 노출되는 높이만 하더라도 447㎝에 상단의 너비가 178㎝의 대형 비석이다. 흰 대리석을 사용하여 상단에는 별도의 이수 없이 용 두 마리 가 마주 버티고 선 장식을 조각으로 더하였는데 비각을 세워 그 속에 설치하였었다.46)김구진, 「구영릉 신도비와 석물에 대하여」, 『역사 교육』 18, 역사 교육 학회, 1975, 33∼85쪽. 귀부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 비신을 받치고 있는데, 거북이는 사령(四靈), 즉 네 마리의 신령스러운 동물에 속하고 북방을 상징하는 현무(玄武)로도 나타나며 복희(伏羲)가 거북이 등에 나타난 모양을 보고 팔괘(八卦)를 창안했다고 하는 등의 여러 신화와 관련된 동물이다. 이수는 여의주를 다투는 여러 마리의 이무기로 장식되는데, 용으로 변하여 승천하면 사령의 하나가 되어 비를 내리는 등 각종 영험을 발휘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따라서 귀부와 이수로 인하여 신도비는 지상과 천상, 이승과 저승을 소통시키는 매개물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신도비 중에서 이러한 예로는 윤효손(尹孝孫)의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귀부를 거북이 없이 연꽃잎 등이 장식된 네모난 형태로 대신한 신도비도 많이 만들어졌다. 한편, 귀부는 그대로 유지되지만 이무기 장식 대신 팔작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얹은 신도비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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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상감 진양군 영인 정씨 묘지석
백자 상감 진양군 영인 정씨 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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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개 신도비
한사개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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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신도비의 형식은 머릿돌을 집의 지붕 모양으로 만들고 받침도 사각형으로 간단하게 만든 것이다. 머릿돌의 생김새에 따라서 팔작지붕형, 삿갓형, 평탄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팔작지붕형이 17세기 이후 조선시대의 신도비를 대표하는 형식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소요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경제적인 이유와 비신이 풍화되는 것을 보호해 준다는 보존상의 이점에 따른 것이다.47)김우림, 앞의 글, 2003, 253∼254쪽. 귀부와 이수를 갖춘 신도비에 비하여 단순하고 간략해진 이러한 신도비는 어쩌면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검박한 생활 태도를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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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신도비
세종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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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손 신도비
윤효손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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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의 비신 윗부분에 비의 명칭을 쓰는데 이것을 제액(題額)이라 하며, 대개 전서체(篆書體)로 가로로 길게 쓰게 된다. 간단하게 관직과 시호, 성씨만 쓰게 되어 “영의정문정신공신도비명(領議政文貞申公神道碑銘)”처럼 된다. 신도비의 비문은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서(序)와 주인공의 생애를 시로 읊은 명(銘)으로 구성된다. 서는 산문체로 우선 신도비문의 제목을 쓰고 주인공의 품계와 관직, 시호, 성 등을 상세히 기록한 비제(碑題)를 시작으로 주인공에 대한 가계와 주요 경력 및 특기 사항을 기록한다. 명은 사언, 오언, 칠언 등의 운문체 시로 이루어지며 주인공이 공덕을 찬양한다.

신도비에 들어가는 비문을 작성하는 사람, 글씨를 쓰는 사람, 전서를 쓰는 사람은 대개 인근에 살고 있는 집안사람이나 외척, 혼인으로 맺어진 친척, 정치적인 성향이 같거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문인, 또는 당대의 문장가에게 의뢰한 경우가 많다. 비문을 찬술하는 찬자(撰者)는 후손이나 함께 관직 생활을 했던 동료, 학맥을 같이하는 문인(門人), 친구 등 절친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 인물의 경우에도 관직과 품계를 중시해서 결정하였으며, 때로는 당대의 문장가에게 의뢰하여 신도비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글씨를 쓰는 사람은 고인이나 그 후손과 인척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글씨로 인하여 신도비의 예술적 가치가 한층 높아지므로 당대에 유명한 서예가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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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상 신도비
이봉상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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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의 재료를 살펴보면 받침과 머릿돌은 대부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신은 일반적으로 화강암, 대리석 등을 사용하며 오석(烏石)이라고 하는 검은색의 흑요암(黑曜巖)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비신을 만들 수 있는 커다란 돌을 구하기는 쉽지 않아서 강화도처럼 비석에 적합한 돌을 구하기 쉬운 지방으로 후손이 관직을 나갔을 때 신도비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신도비의 건립 시기는 대개 무덤의 주인공이 사망하고 나서 한참 후였다. 왜냐하면 제작 경비와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사화(士禍)에 연루되는 것 같은 정치적인 이유로 당장 세우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뒤늦게 추증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 신분이 되었을 때 건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신도비 건립 비용은 여러 후손들이 힘을 모아야 가능하였으며 큰 돌을 떼어 내고 옮기는 데는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문인석이나 신도비 같은 무덤의 석조물은 원래의 종교적·제의적·사회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단순히 장식적이고 정적인 조형물에 그치지만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조형물을 통하여 의례와 규범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돌이라는 재료가 나타내는 것처럼 안정감과 영속성을 상징한다. 그 결과 이들 조형물은 해당 구성원 사이에서 집단적인 기억을 환기시키고, 전통과 관습의 불멸성과 지속성을 감지하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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