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1장 예를 따르는 삶과 미술
  • 5. 옛사람에게 배우는 교훈
  • 행실도, 올바른 처신의 본보기
조인수

성리학의 실천윤리로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중시된 만큼 군주에 대한 신하의 충성,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 지아비에 대한 지어미의 절개가 강조되어 충신, 효자, 열녀의 대표적인 사례를 그림으로 도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책은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출간되는 경우가 많았다. 1434년(세종 16)에 군신, 부자, 부부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인물들의 행적을 모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목판으로 인쇄하여 간행하면서 백성들이 교화되어 풍속이 아름답게 되고 태평한 세상이 펼쳐질 것을 염원하였다. 여기에는 선별된 효자 110명, 충신 110명, 열녀 110명에 대하여 개개 인물의 행실을 묘사한 그림을 싣고 행적을 기록하였다.54)정병모,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 『진단학보』 85, 진단학회, 1998, 185∼227쪽 ; 송일기·이태호, 「조선 후기 ‘행실도’ 판본 및 판화에 대한 연구」, 『서지학 연구』 21, 서지학회, 2001, 79∼121쪽 참조. 따라서 330점에 달하는 판화가 수록된 대규모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판 화를 포함시킨 것에 대해서는 먼저 그림을 보고 인물의 행적에 대한 글을 읽으면 깊은 감동을 빨리 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것이다.55)이태호·송일기, 「초간본 『삼강행실효자도』의 편찬 과정 및 판화 양식에 관한 연구」, 『서지학 연구』 25, 서지학회, 2003, 413∼414쪽. 내용은 대부분 고대 중국의 유명한 인물이고 우리나라의 사례를 일부 덧붙였다. 예를 들어 효자의 경우 우리나라 사람은 22명이 수록되었는데, 삼국 4명, 고려 7명, 조선 11명이었다. 이후 성종대에 한글을 덧붙인 언해본을 출간하였고, 1490년(성종 21)에는 각각 35명씩만 간추려 105명이 수록된 『삼강행실도』로 다시 출판되었다. 여기에 우리나라 사람은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 등 총 14명이 포함되었다.56)홍이섭, 「삼강행실도 영인에 대하여」, 『삼강행실도』,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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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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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1511년(중종 6)에 『삼강행실도』를 널리 백성들에게 보급하려고 3,000권 가까이 인쇄하여 배포하였고, 1514년(중종 9)에는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인물로만 구성하여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8명 도합 59명을 포함시키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인물의 복식이나 건축물 배경은 계속 중국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어서 1518년(중종 13)에는 장유(長幼)와 붕우(朋友) 사이의 윤리에 대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가 편찬되었다. 한편, 1617년(광해군 9)에는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예법을 다시 세우고 예에 기초한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전쟁 중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1,123명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로 집대성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1797년(정조 21년)에 종합적인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가 편찬되어 유교 윤리를 널리 보급하였다. 앞서 발간된 행실도는 모두 목판화였 던 것에 비해서 『오륜행실도』는 활자본이었다. 여기에는 모두 150명이 수록되었으며 우리나라 인물은 17명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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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신속삼강행실』의 이부투강(二婦投江)
『동국신속삼강행실』의 이부투강(二婦投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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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행실도는 대개 궁중에서 사업을 주관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된 판화는 모두 당시 가장 기량이 뛰어난 화가가 그렸다. 특히, 세종대의 『삼강행실도』의 판화는 안견(安堅)이 참여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 원본이 전하지 않고 있어 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57)송일기·이태호, 앞의 글, 113∼116쪽 ; 이태호·송일기, 앞의 글, 427∼425쪽.

한 사람의 행적을 책의 한쪽 면 전체를 차지하도록 하였으며, 하나의 화면에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는 여러 장면이 함께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전개하는 방식으로 이미 종교 미술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섬세한 필선과 잘 짜여진 구도, 그리고 다양한 시점을 활용하여 생동감 있는 화면을 보여 준다. 『동국신속삼강행실』의 편찬에는 이징(李澄), 이신흠(李信欽)을 비롯한 여러 명의 뛰어난 화가가 참여하였지만 유사한 산수, 건물, 인물 등이 여러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방대한 양의 작업을 짧은 기간에 완성해야 했던 사정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례로 이루어진 만큼 임진왜란 때 정절을지 킨 열녀들이나, 『주자가례』에 없는 독특한 풍속으로 부모의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는 여묘살이의 장면이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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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
『오륜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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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행실도』는 이전의 판화와는 다른 양식으로 변하였다. 즉, 하나의 장면으로 화면 전체를 구성하며 구성 요소 간의 합리적인 원근 표현으로 좀 더 사실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기존 목판화의 선묘 위주의 묘사 방식에서 탈피하여 붓놀림까지 표현하는 기량이 발휘되었다. 개별 인물의 경우 다양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얼굴에는 표정까지도 나타난다. 이렇게 뛰어난 회화성과 화법상의 유사성으로 미루어 아마도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던 김홍도(金弘道, 1745∼?) 또는 그의 화풍을 따른 화원의 작품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이전의 행실도에서 분묘를 표현할 때는 대개 벽돌로 봉분을 만든 것처럼 묘사했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흙무덤으로 하고 석물까지 정확하게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목판화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구체적인 개성보다는 사회적·도덕적·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개별 인물의 특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반화된 인물의 형상이 이 책에서 의도하는 관습과 규범의 확산에 적합하기 때문에 구도, 필선, 시점 같은 시각 미술의 조형적 요소는 강조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행실도와 더불어 별도의 효자도, 열녀도를 목판으로 인쇄하여 책으로 꾸몄으며, 향교 등을 통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좀 더 많은 백성이 이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때로는 한문 대신 한글로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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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
문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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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도는 별도의 독립된 주제로서 고려시대부터 제작하였는데, 『효행록(孝行錄)』에 기초하여 효자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전하며 조선 초기에도 효자도는 계속하여 그려졌다.58)효자도에 대해서는 이수경, 「조선시대 효자도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유교 이념의 생활 속 실천-조선시대 효자도 병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 평론, 2006, 376∼399쪽 참조. 일반적으로 효자도는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 24명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한겨울에 얼어붙은 강을 깨고 잉어를 잡아 계모를 봉양한 왕상(王祥), 자신도 늙었지만 더 연로한 부모님을 위해서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노래자(老萊子)의 고사 등이 잘 알려진 사례이다. 목판화로 제작되어 책의 삽화로 포함되기도 하였지만 병풍의 형태로도 종종 그려졌다. 이러한 효자도는 궁실에서는 세자의 거처에 설치하여 이를 본받도록 하였고, 효자에게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하였다. 즉, 유교의 핵심 이념인 효의 정신을 고취하고 효행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효자도는 장식성이 가미되어 커다란 병풍의 형태로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여 그리기도 하였다. 선명한 채색을 구사하여 나무와 괴석은 장식적으로 묘사하고, 장대한 건축물과 상서로운 오색 구름을 배치함으로써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교훈적 내용을 시각적 효과를 살려서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이후 효자도는 민간화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문자도의 ‘효(孝)’의 경우에는 효자의 이야기로 글씨를 구성한다. 이렇게 교육적인 목적과 장식적인 취향이 어우러져 유교적 시각 문화는 사대부의 일상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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