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9권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
  • 제2장 사대부의 원림과 회화
  • 1. 장원과 별서도
  • 명족(名族) 의식과 별서도 제작
조규희

그곳 풍속은 집집마다 각각 한 분의 조상을 모시고 한 장원(莊園)을 점유하며 같은 일가끼리 살면서 흩어지지 않으므로 공고하게 유지하여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그 예를 들면 진성(眞城) 이씨는 퇴계(退溪)를 모시고 도산(陶山)을 점유하였고, 풍산(豊山) 유씨는 서애(西厓)를 모시고 하회(河回)를 점유하였고, 의성(義城) 김씨는 학봉(鶴峰)을 모시고 천전(川前)을 점유하였고, 안동(安東) 권씨는 충재(沖齋)를 모시고 계곡(鷄谷)을 점유하였고…….59)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권14, 「발택리지(跋擇里誌)」 ; 오석원, 「안동 선비 문화의 형성 배경과 현대적 의의」, 『안동의 선비 문화-16∼17세기 처사형(處士型) 선비를 중심으로-』, 아세아문화사, 1997, 51쪽.

학자 관료였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장원은 학문 연마와 예술 창작의 공간이자 이러한 삶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터전이었다. 앞의 글은 장원을 기반으로 한 생활의 근거가 확고히 마련된 지역에서 선비의 전통 역시 오래 유지되었음을 말해 준다.

대체로 중앙에서 벼슬하던 사대부들에게 서울 집의 후원(後園)은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심미적인 공간이었던 반면, 향촌의 장원은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배권을 행사하는 공간인 동시에 은일과 은둔 또는 자연과의 관계를 즐기기 위해 조성해 놓은 원림(園林)이었다. 경제적 터전이었던 조선시대의 장원은 대토지의 집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함께 그 토지를 지배하는 거점으로서의 장사(莊舍)가 매우 중요한 구성 요인이 되어 형성된 것이었다.60)『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 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867∼869쪽. 주로 선영(先塋) 근처나 전원지(田園地)에 별장 형태로 설치한 별서(別墅)가 완성되면 사대부가에서는 동료 문인들에게서 이를 축하하는 기문(記文)과 시문(詩文)을 받아 기념해 두곤 하였다.

판서(判書) 양성지(梁誠之, 1415∼1482)의 통진(通津) 별서 낙성을 축하하여 서거정이 쓴 다음의 별서낙성기(別墅落成記)는 조선시대 별서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별서의 승함이여 북으로 송강(松岡)에 의지해 사시가 짙은 색이며 남으로 대해(大海)에 임하여 한 번에 1,000리를 바라본다. 동쪽으로는 김포의 갈현산, 부평의 안남산 등이 창취(蒼翠)하게 있고 서쪽으로는 강화도의 마니산,진강산 등 여러 산이 푸르게 솟아 있어 기상이 천만이라. 공에게 전답이 수백 이랑이라 해마다 거둬들이는 수입이 1,100두요 조운(漕運)과 상인의 배가 문밖에 있으며 고기 잡는 배의 등불이 순지(蓴地) 연소(蓮沼)의 사이에 깜박이니, 그 승경(勝景)이 무궁하고 그 즐거움도 무궁하니 참으로 경기의 낙토요 공의 자손이 대대로 지켜야할 청전이다. 하물며 서울과의 거리가 겨우 70리이니 공이 쉬는 날 문득 수레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공은 또한 장차 그곳에서 생을 마치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거소(居所)는 눌재(訥齋)라 하였고, 헌(軒)은 지족(止足), 정(亭)은 목안(木鴈)이라 칭하였다.61)서거정(徐居正), 『사계집(四佳集)』 권2, 「통진현대포곡양판서별서낙성기(通津縣大浦谷梁判書別墅落成記)」.

앞의 기문에서 보듯이 별서는 풍부한 경제적 소출과 주변 산수를 즐기는 전원적 면모를 겸비한 곳으로 사대부들의 경제적 터전이자 노년에 은퇴하여 한가로이 지내기 위한 곳이기도 하였다. 그곳에는 정자를 비롯한 여러 처소가 있어 주거와 풍류(風流)의 공간이 되었다. 관직에 있는 사대부들 에게 서울과의 거리는 별서의 입지 조건 중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자 칭송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당대 세도가의 별서는 대개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가장 많이 위치하였다.62)이성무, 「조선의 양반」, 『조선의 사회와 사상』, 일조각, 1999, 83∼93쪽.

특히, 한강가의 승경지에는 당대 세도가들의 개인 별서가 즐비하였는데, “동쪽 제천정(濟川亭)에서부터 서쪽으로 희우정(喜雨亭)에 이르기까지의 수십 리 사이에 공후귀척(公侯貴戚)들이 정자를 많이 마련하여 풍경을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세종이 정의 공주(貞懿公主)와 부마(駙馬)인 안맹담(安孟聃, 1415∼1462)에게 하사하였던 도성 남쪽의 저자도(楮子島) 별서를 물려받은 안빈세(安貧世, 1445∼1478)는 “정자를 수리하고 한가할 때 왕래하며,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러 문사에게 시문을 청하여 시권(詩卷)을 만들었는데, 이는 “조종(祖宗)이 전하여 준 것을 빛내고 또 속세 밖에서 지내려는 본래의 뜻을 보이려” 하였기 때문이었다.63)『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 한성부(漢城府), 산천(山川) : 『국역(國譯) 신증동국여지승람』 1, 민족문화추진회, 1969, 272∼274쪽 ; 『속동문선(續東文選)』 권4, 「제저자도안락도시권(題楮子島安樂道詩卷)」. 이렇게 조선시대에 세도가의 개인 별서는 시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림의 제재가 되었는데, 특히 전문 화사(畵師)를 불러 별서의 형승을 화폭에 담게 하는 것은 자신의 장원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다음의 저자도도(楮子島圖)의 제발(題跋)은 이 그림이 한강의 대표적 섬 중의 하나였던 저자도의 형승을 충실히 담은 실경산수화로 저자에게 그곳의 별서를 직접 대면하며 시문을 쓰는 것과 같은 마음을 들게 하였음을 말해 준다.

저자도는 부마 안연창(安延昌)의 별서이다. …… 부마의 막내아들인 한성 좌윤(左尹) 안공(安公)은 마음씨가 담박하여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섬을 얻고는 매우 좋아하여 화사로 하여금 그 형승을 그리도록 하고 또한 나의 보잘것없는 시까지 청하였다. 섬은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여 아침저녁으로 갈 수 있는데 늙어 백발이 되도록 다시 가보지 못한 것은 명리(名利)와 벼슬에 얽매여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그림을 보 니, 상상하건대 어릴 때에 올라가 보았던 곳을 방불케 하여 마음속에 느끼는 바가 없지 않아 아래와 같이 짓는 바이다.64)강희맹(姜希孟), 『사숙재집(私淑齋集)』 권2, 「제저자도도(題楮子島圖)」.

이러한 그림들은 별서가 위치한 지명이나 헌(軒)·정(亭)·당(堂)·실도(室圖) 등의 다양한 처소 이름으로 불리는 한편 15세기 후반 무렵에는 별서도(別墅圖)라는 용어로도 불리게 되었다.65)조선시대 문헌에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별서도’란 화제는 서거정의 『사가집』에서 확인된다. 서거정은 15세기 화가 최경(崔涇)이 유 판서(柳參判)의 별서를 그린 남원별서도(南原別墅圖)에 제시(題詩)를 남기고 있다(서거정, 『사가집』 시집 보유(詩集補遺) 권1, 「제최호군화유참판남원별서도 4수(題崔護軍畵柳參判南原別墅圖四首)」, 『서사가전집(徐四佳全集)』, 오성사(旿晟社), 1980, 458∼459쪽). 이러한 화제(畵題)의 정착은 이 시기 사대부가의 대농장 경영 문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15세기 후반 사대부가에서는 토지 소유를 확대해 가며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는 한편 이러한 경제적 자신감 속에서 개별 성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편찬하기 시작하는 등 ‘사대부 거족(士大夫巨族)’으로서의 자부심이 팽배하였다.66)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경화 거족(京華巨族)’(권5)이나 ‘사대부 거족(士大夫巨族)’(권7)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태진은 거족(巨族)을 같은 용어지만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린 성씨 명단인 “아국거족(我國鉅族)”의 원문을 따라 거족(鉅族)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문집의 용례를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거족(巨族)과 거족(鉅族)은 동일한 의미로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후반의 사대부 거족에 관해서는 이태진, 「15세기 후반기의 ‘거족(鉅族)’과 명족 의식(名族意識)」, 『한국사론』 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76, 229∼319쪽 참조.

이들은 새로 마련한 별서의 낙성(落成)을 축하하거나 세전(世傳)하는 별서를 당대에 소유하게 되었을 때 이를 중수하거나 중건한 것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해 별서도를 제작하였다.67)화석정도(花石亭圖)나 저자도도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런 측면에서 별서도는 매매나 상속에 의한 토지 소유권의 이동과 관련 있는 기록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집안의 족보를 만들 듯 집안 소유의 별서를 그림으로 그려 남김으로써 가문의 자긍심을 대대로 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 개인을 위해 제작된 별서도는 사적인 공간을 회화화(繪畵化)한 매우 개인적인 그림이지만 그림의 주문자가 일군의 문장가들에게 그림을 돌려 보이며 찬문(撰文)과 제시(題詩)를 요청하여 받는 관례가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 작품들은 제한된 일군의 감상가에게 공개될 것을 전제로 제작한 작품이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별서도는 대개 이름 있는 전문적인 화사들에게 맡겨 그렸으며, 관련 발문(跋文)과 제시 등은 명망 있는 관인 문장가들의 몫이 되곤 하였다. 또한, 별서도의 화제나 화첩에 실을 당호(堂號)와 관련된 글씨들 역시 대부분 당대의 명필가에게 위촉하였다. 따라서 명문장에 더해 그림으로 특별히 기록된 사대부 집안의 소유지는 승경지 속에 위치한 명소로서 후손들에게뿐 아니라 조선 사회에서 길이 기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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